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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양 선원(遠洋船員)의 고혼(孤魂)을 달래며...
작성자 sanghai

1957년 6월 26일. 230t짜리 배 한 척이 해양경비대와 수산업체 사람들 환송을 받으며 부산항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으로 배를 몰아 나라가 살 길을 찾으라"며 이 배를 '지남(指南)호'라 불렀다. 참치잡이 배였다. 경험도 기술도 없는 선원들은 악전고투했다. 배에 물이 부족해 세수도 못했다. 8월 15일 광복절 인도양에서 지남호 선원들 낚싯대에 참치가 걸렸다. 건국 후 처음 낚아 올린 참치였다.

▶원양어업은 1966년부터 급성장했다. 박정희 정부가 달러벌이 사업으로 키웠다. 가난한 조국에서 일을 못 찾은 청년들은 월급쟁이 두세 배를 버는 원양 선원을 꿈꾸며 몰려들었다. 대학생과 회사원도 많았다. 대서양에 접한 스페인 라스팔마스항이 우리 어선들의 주무대였다. 1970년대 30여개 선박 회사와 1만5000명이 고락(苦樂)을 함께했다. 안타까운 사고도 많았다. 한 달에 한 명은 희생자가 나왔다. 파도가 센 데다 조업 기술이 서툰 탓이었다. 1981년엔 외국 배와 부딪혀 선원 수십 명이 죽었다. 그곳 동포들이 위령탑을 세워 대서양의 고혼(孤魂)을 달랬다.

▶선원들이 목숨 걸고 잡아올린 참치는 우리 경제를 일으키는 밑거름이 됐다. 전성기인 1966년부터 87년까지 원양어업은 8억7000만달러를 벌었다.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보낸 달러보다 많았다. 원양 선원들은 숨은 애국자였다. 그 뒤로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고 중국을 비롯한 후발 주자와 경쟁이 심해지면서 원양어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엊그제 인천공항에 유골함 네 개가 도착했다. 라스팔마스에 묻혔던 원양 선원들이다. 유족들은 복잡한 절차와 비싼 비용 탓에 그동안 유골을 가져오지 못하다 정부와 원양업계가 나서 일이 풀렸다고 한다. 4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원양 선원 고(故) 김용택씨의 동생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똑똑하던 형이 친구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전 재산을 잃고 배를 탔어요. 형이 보낸 돈으로 가족이 빚을 갚고 논밭을 샀지요. 어머니는 못 보고 떠나셨지만 이제 영혼이라도 돌아왔으니…."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푸른 파도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시인 박목월이 라스팔마스 위령탑에 새긴 헌사(獻辭)다. 그 굳은 다짐과 달리 원양 선원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아직 해외에서 돌아오지 못한 원양 선원 유골이 수백기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편히 쉴 날을 기다린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2015-11-08 07:32:40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4   rousou [ 2015-11-08 14:37:35 ] 

떤널판은 일본 보댕이에 묻히고

그 딸년은 양늠 젓에 깔리 누나

3   tydikon [ 2015-11-08 09:24:21 ] 

"나같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었음"

"해외 한인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었음"

더욱 돋보일수 있었을 것인데.. 조금 아쉽다.

2   BenHuh [ 2015-11-08 08:55:59 ] 

한국의 갓 30의 젊은 사나이를 낫선 외국에 내동댕이를 쳐놓고, 약속한 생활비 조차 깍아먹는 무역활동을 시키면서, 그 담당 상무라는 자는 비밀리에 자기 개인'비지니스'를 아니 도와준다고 온갓 모략과 압력을 가해왔으며, 본사에서는 지사운영의 송금조차 걸렀기로 노동자 합숙소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출산 직전의 자식이 제대로 출산을 했는지, 무었을 낳았는지 알려주지 않는 이들 우리 동포들에 비하면, 나는 한 일본인이 내게 현지 미모의 call girl을 소개해준 인정으로 인하여 그들을 더 이상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성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나같은 젊은이가 이러한 외도(?)를 했다 하여, 나에게 도덕적으로 부패했느니, 금욕하지 못하는 나의 처신을 손가락질 하며 비난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가족을 동반 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한국경제의 부족한 외환사정과 허실하고 준비가 않된 종합무역상사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충실한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무지한 역경을 감내한다 하더라도, 내 국가와 내 회사는 나에게 제대로 정신적 및 금전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입장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동정하는 태도를 가졌어야 했었다.

한국의 정신문화인 불교나 기독교는 '자비'니 '사랑'이니를 들먹인다. 남이 고통하고 어려운 사정은 외면하면서, 자기 만의 출세, 치부, 권세에 매달려 혈안이 된 몰염치한 삶을 사는 우리 한국사람 모두들... 그리고 소위 지도자들의 졸부근성들을 보면서, 누가 누구를 죄짓게 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을 격으며 자라온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경제는 괄목한 성장을 하여왔었다. 이즈음에는 전 세계에 한국의 기업들이 퍼져나가서 각종 무역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그동안 벌어들인 외화로 인하여, 한국의 외환사정은 폭발적으로 좋아졌고, 이로 인한 '인플레'를 막기 위하여 땅투기를 허락함으로써 국내의 화폐유통량을 통제해야 하게 까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많은 부동산 부자들이 배출되었고, 이곳 미국에도 한국인들이 버젓이 가족을 데리고 와서 떵떵거리고 있다. 자기들의 이런 경제력과 해외로 쉽게 나돌수 있었던 여건 뒤에는 나같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었음으로 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이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1   tydikon [ 2015-11-08 07:46:34 ] 

"원양어업은 8억7000만달러를 벌었다.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보낸 달러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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