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 서울시·성남시에 이어 이 나라 야당인 새민년도 청년 취업준비생에게 일정액의 현금을 주는 '청년구직(求職)수당'을 내년 4월 총선의 주요 공약으로 내걸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문재인과 박원순, 이재명 이 세 사람이 서로 쿵~짝으로 한 목소리를 내며 연대(連帶)하여 그야말로 ‘쌩돈’을 그냥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다. 즈들 쌈짓돈도 아니면서.
내용인즉, 새민년은 제법 국민 눈치를 보느라 그런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하는 청년활동지원비 제도(내년 하반기부터 저소득 가구의 미취업자 중에서 취업 등 활동계획서를 평가해 3천명을 선정, 반 년가량 활동 보조비를 월 50만원씩 제공하겠다)의 발상에 슬쩍 젓가락만 올린 것으로 보인다. 하다못해 막노동이라도 시키면서 혹 그런다면 모를까, 실업자가 구직활동(?)을 하는 동안은 무작정 현금을, 그것도 주민세금에서 잘라서? 아니면 대기업 욱박질러서..? 마련하겠다는 위계(危計)적 발상에 경제부총리는 "명백한 포퓰리즘"이라며 중앙정부 권한으로 제동을 걸겠다고 했고, 이 문제가 정치쟁점화 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요즈음 청년 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고통 받는 청년 세대를 돕겠다는 취지에는 특히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복지’라는 명목으로 생돈을 청년 유권자들에게 직접 현금을 뿌리는 것은 황당한 발상이다. 일이나 노동의 대가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공짜로 현금을 주겠다는 발상은 유권자들을 무상(無償) 복지에 젖게 만들고 일자리 창출 효과도 없다. 무엇보다 재정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멀게는 아르헨티나와 근년의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입증된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과거 아르헨티나의 쇠락은 ‘선동가+우중(愚衆)’의 합작품이었음을 똑똑히 기억해야 하고,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이 다 그렇게 해서 곤두박질쳤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복지 재원으로 일자리 알선이나 보육처럼 공공 서비스를 제공한 북유럽 모델이 성공한 반면, 현금 지급에 중점을 둔 남유럽과 남미의 복지 모델은 실패했다. 이곳에서 실패로 끝난 실험을 한국에서 재시도한다면 세금 낭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청년들에게 공짜로 생돈을 퍼주는 것은 앞으로 나라를 더 빨리 망치도록 거드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아르헨티나의 예를 들어보자. 1950년대 일찍이 선진국 대열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에바 페론 집권 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그 재단은 '복지' 활동을 제 마음대로 벌였다고 한다. 병원을 짓고, 직업학교와 고아원을 세우고, 양로원을 짓고, 무료급식을 하고, 의약품과 현금을 나누어 주었다.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대기업에서 뜯어냈고, 복권을 발행해서 걷었고, 노동조합원들에게서 3일치씩 임금을 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을 과연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옳으냐는 의아심을 갖게 하는 사례가 많았다. 우선 그런 식으로 재원을 염출하는 것부터가 합법을 가장한 홍길동이나 일지매(一枝梅)같은 의적(?)이라도 된 방식이다. 그리고 가난한집 어린이를 한 사흘 데려다 잘 먹이고 재워준 다음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활동 같은 것도 일종의 전시효과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무엇다도 현금을 특별한 대가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일테면 그야말로 ‘꼴리는’대로 아무나 막 퍼준 것이다. 받는 넘이야 공짠데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에바 페론은 한때 대중으로부터 성녀(聖女)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 배후에 숨은 그녀의 민낯은 해외 계좌에 5억 달러를 은닉했을 만큼 탐욕스러운 선동가였다. 그 시절 5억 달러면 지금의 돈 가치로 따지면 최소 5백억 달러는 되지 않을까? 결국 아르헨티나는 몰락했고 그녀가 세운 시설들은 훗날 페허로 남았을 뿐이다.
차제에 서울시·성남시, 새민년이 진정으로 청년들을 위한다면, 그 돈을 일자리 알선이나 교육·직업훈련 사업에 써야 한다. 멀지도 않다. 바로 올해 초, 나랏돈을 멋대로 현금 복지에 펑펑 쓰다가 파산에 이른 그리스를 보고도 아직껏 이 따위 ‘공짜’ 복지 타령인가? 청년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데는 여러 다른, 보다 나은 대안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