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쓰는 글을 보신 분들중에 “진솔하다”하며 칭찬해 주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젊쟎은 말로, “조마조마하다”하시며 저의 파격적인 발언에 우려를 표해 주시는 분들도 있고, 화를 내면서 따지듯이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가령, 제가 “십일조를 내시려거던, 일부는 교회에 내시고,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돕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하자,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있는 저의 막내누님은 “남이사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던 말던, 내가 번 돈 중에서 십일조를 교회에 내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냐?”하는 식으로 제 말을 싹 무시하는 눈치입니다.
저희 누님은 성품이 착하고 교회를 평생 헌신적으로 섬겨온 모범교인입니다. 목사인 제가 질투가 날 정도로 누님은 입만 열면 담임목사님 자랑을 합니다. 저는 누님에게, “미국유학을 와서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생 목사는 무시하고 나보다 나이가 적은, 누님 교회의 목사 자랑은 왜 그리 많이 하느냐?”고 항의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몇년전에 한국에 갔을 때 누님집에서 밥을 먹다가 누님이 담임목사한테 백화점에서 파는 비싼 외투를 삼개월 할부로 사 주었다고 자랑하길래, 저는 화가 났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 나한테는 양말 한 켤레 안 사 주고, 담임목사한테는 비싼 백화점에서 외투를 사 주었다고 하니 “누나는 목사 욕하고 돌아 다니는 교인 보다는 낫지만, 왜 그리 담임 목사 자랑을 많이 하냐? 세뇌당했냐? 목사가 다 그 놈이 그 놈이지 별 수 있냐? 담임 목사한테 푹 빠져 가지고 꼴보기 싫다.”고 신경질을 내었습니다. 연예인들처럼 목사도 인기를 먹고 살기에 자기보다 인기가 많은 목사를 보면 배알이 꼴리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목사들 앞에서 다른 목사들 잘 한다 하는 말을 절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목사도 인간인지라 겉으로는 “아, 그러시냐?”하지만, 속으로는 “그래서 어쨌다고? 이 주책 바가지야!”하면서 속상해 할 지 모릅니다.
만약에 미운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 앞에서 “어떤 목사는 설교를 잘 한다더라.” “어떤 목사는 기도를 많이 한다더라” “어떤 목사는 사랑이 많다더라” 해 보세요. 듣는 목사는 속이 상해서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저의 누님과 자형는 중학교와 국민학교만 나와서 물려받은 재산없이 작은 식당을 열어 조카들의 대학교육을 시키고, 새 집을 짓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자랑스런 분들이기에 제가 깊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의 누님은 돈이 없어 작은 야쿠르트를 두 병을 살 수 없어 한 병만 사서 어린 두 조카에게 나누어 먹일 정도로 가난할 때도 교회에 십일조를 내던 신실한 사람입니다. 힘들게 일해서 번 돈중에서 기쁨으로 십일조를 내는데, 제가 옆에서 시비를 걸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번 돈으로 술먹고 담배피는데 날리는데, 평생 교회에 십일조 내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가서 동생을 위해 기도하는 누님이 훌륭한 성자와 같은 분이라고 봅니다.
저는 여전히, “십일조의 일부는 교회에 드리고,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십일조를 드릴 형편이 되는 사람은 십일조를 내어도 좋겠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굳이 십일조를 안 내어도 괳챦다고 봅니다.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교회에 받치는 것 못지 않게 훌륭한 헌금이라고 봅니다.
이런 논조의 제 글을 읽고 한국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가 “그럼,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하는 항의성 메시지를 보내어 왔더군요.
목사들은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바쳤다는 성경이야기를 인용하며, “거, 봐라.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이 가진 마지막 동전 두닢까지 헌금하는 것을 칭찬하지 않았느냐?”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합리화”하며 심지어 “교인들이 축복을 받게 하는 헌금교육”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말도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헌금강요는 교인들의 피를 짜서 목사가 비싼 차타고 호의호식하려는 날강도와 같은 짓이라”는 제 말도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봅니다.
가난한 사람이 마지막 남은 동전 두닢을 헌금한 것을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짜서 목사들이 해외여행 다니고, 비싼 차를 타고 호의호식을 해도 좋다는 허가증을 주는 말씀이 아니고, 목사들이 먼저 마지막 남은 동전 두닢조차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기부하는 모범을 보이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일을 보더라도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론이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한번 이라도 통톡을 해 본 사람이라면, 성경은 좋은 말씀도 있지만, 우상숭배, 근친상간, 노예제도, 가족간의 살인, 전쟁과 같은 인간사의 온갖 추한 면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영어사전에 보면 bibliolatry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성경우상숭배”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책 혹은 성경이라는 Bible이라는 말과 우상숭배라는 Idolatry 가 결합된 합성어인데, “성경우상숭배”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겨야지, 인간이 쓴 종교의 경전인 성경책을 너무 하나님 섬기듯이 하면 안된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같은 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성경도 잘 이해하면 우리 인생의 영양가 높은 우유가 될 수 있지만, 성경을 오해하면 인생에 해독을 끼치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 “완전하신 하나님이 불량품을 만들 수 있나?”하는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후 인간이 하는 짓거리들에 실망하여 “예잇! 내가 잘 못 만들었구나. 홍수로 확 쓸어서 다 죽여 버리고, 다시 만들어야 겠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홍수를 보내어 노아가족만 살려 내고 나머지 인류는 몰살 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불량품 정도가 아니라 온 인류를 죽여 버려야 하는 큰 실수를 하셨다니 어딘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두번째로 만든 작품인 인간이 아직도 전쟁과 살육을 반복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두번째 작품인 현 인류도 완제품으로 보기에는 하자가 너무 많습니다.
성경책에는 하나님이, “앞으로는 홍수로 사람을 몰살 시키는 짓을 하지 않겠다. 약속하는 징표로 무지개를 만들어 주겠다.”고 해 놓고, 몇년전에는 중국에서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동남아에서는 홍수와 비슷한 쓰나미로 20만명의 사람들이 몰살당한 일도 있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백지수표와 같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천둥과 번개가 치면, "신이 노했다"고 하면서 겁을 먹었고, 홍수가 나면, "하늘이 벌을 내렸다"고 해석하던 일이 많았는데, 이런 비과학적인 우주관과 미신적인 신앙심이 지배하던 시대에 쓰여진 성경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에 대한 사실 보도라기 보다 인류를 향한 교훈이 담긴,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symbolical and imaginary)이야기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도 생각해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만들어진 것은 여섯번째 날이라고 하는데, 아담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기에 좋았더라”고 감탄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을 녹음해 놓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게 됩니다.
해와 달이 창조되기도 전에, “첫째날이 지나고 둘째날이 되었다”는 말도 현대의 과학적인 견지에서는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성경은 천동설이 지배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종교문학의 산물이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은 히브리인들이 강조할 때 쓰던 과장된 어법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네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꺼내라고 하느냐?”는 말씀도, “너나 잘 하세요”란 말이지, 실제로 10 미터가 되는 대들보가 어찌 사람 눈에 들어 가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도 인류가 신앙적으로 상상한 말씀이지,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헛다리를 짚은 일도 있지만, 자식이 철들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심정처럼, 인류가 지혜와 사랑으로 성숙해 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성경의 이면에 스려 있다고 봅니다. 지혜와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 그것을 저는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고지식하고 무식한 광신자가 되지도 말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차가운 이성주의자에 머무르지도 말고, “한 눈 뜨고 꿈꾸는” 지성적인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