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김정"<jhk5@naver.com>
To: "민용"<ysmin@naver.com>;
Sent: 2016-04-19 (화) 09:20:31
Subject: FW: ♡ 나에게 朴正熙를 설명해 준 中國人
작년 여름이었습니다. 북경에서 상해를 가는데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저녁 6시부터 시작한 기차여행은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장장 14시간 계속되었습니다. 기차는 같은 칸에 침대가 좌우로 2단씩 4개의 침대가 있었습니다.
북경 역에서 애인과 이별하며 서러워하던 아가씨와 나, 그리고 엉덩이가 내 서너 배는 됨 직한 미국인 한 명,그리고 젊은 중국 청년 한명이 같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신화사 통신에 근무 한다는 청년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제게 물었습니다. 한국의 발전은 박대통령에 의해 그 단초가 제공되었는데 박대통령의 국가 발전의 핵심 전략이 무엇이었느냐는 입니다. 남의 나라 기차간에서 박대통령의 국가발전 핵심전략이 뭐였냐는 질문에 진땀이 났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새마을 운동 생각이 나서 그렇게 대충 설명 했더니 그 청년은 내가 무안하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 경제발전의 핵심전략은 '집중화(集中化)' 라는 것입니다. 60년대 당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은 자원도 기술도 전무한 상황이라 경제발전의 단초 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산업이라는 것 자체가 전무라 해도 좋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경제발전이란 눈사람을 만드는 일과 같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먼저 주먹만한 눈을 뭉칠 수 있어야하는데 이 주먹만한 눈 뭉치 조차 만들만 한 눈이 한국에는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청년은 눈 뭉치는 시늉까지 내며 내게 설명했습니다.
박대통령은 그래도 한국이 산업국이 되기 위해서는 없는 눈을 만들어서라도 눈사람을 만들어야 한다고 작심했습니다.
청년은 우리의 누나나 어머니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수출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누나의 머리카락이 당시의 우리 나라 산업의 기초 원자재였다는 게 저도 지금은 실감나지 않습니다. 어떻든 박대통령은 동원할 수 있는 국가자원은 모조리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여기서 박대통령의 능력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국가 자원을 총동원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게 아니랍니다. 능력이 없으면 있는 자원을 모으는 것도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예를 들어 박대통령과 비교했습니다. 한국에 비해 자원이 넘치는 이들 나라가 지금은 한국의 반도 못 쫓아 가는 건 동원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당시의 박대통령과 한국민은 동일한 목표의 설정에 성공했고 그 합의는 잘 살아 보자.였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설명은 계속됩니다.
이 총동원된 자원은 '재벌'이라는 창고에 쌓아두는 게 박대통령의 집중화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빈약한 자원을 여기저기 분산시키면 힘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원을 모아두는 저수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재벌'이라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의 계산은 간단했답니다. 저수에 물을 고이게 한다. 그래서 저수지에 물이 고이고 고여 넘치면 아래로 흘러가게 마련이고 이는 논과 밭으로 가게 마련이다. 그 물이 저수지에 고이는 데 한국은 20년 정도 걸렸답니다. 그리고 그 물이 흘러 넘치기 시작한게 80년대라고 청년은 설명했습니다.
20년 동안 한국인은 고생했답니다. 노동자가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였고 후세의 지금 당신들이 누리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박정희의 개발 독재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원칙적으로 독재는 나쁘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원칙을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물었습니다. 그럼 과거의 재벌은 나름대로의 기능을 했다고 치면 현재 한국의 재벌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하느냐고 했더니 그 청년은 그건 한국인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큰 저수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든지,아니면 작은 저수지를 여러 개 파는 게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할 것이라든지 한국인이 판단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중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중국이 지금 60년대의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국가 자원의 집중화를 위해 재벌과 국가가 정경 유착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국가는 마스터 플랜을 재벌은 그에 따른 서브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래서 한국처럼 단기간에 국가 경쟁력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은 한국에 비해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이 풍부하여 한국보다 더 단기간에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며 만약 60년대에 중국에 박대통령 같은 주석이 있었다면 지금 미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한국의 민주화에 관해서 이런 평을 했습니다. 한국 민주화의 일등 공신은 박정희다. 경제성장과 정권의 독재는 역방향으로 움직인다.
독재적 경제 대국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날이 훤히 밝아오고 기차는 아주 긴 철교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정말 박대통령은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요? 궁금했습니다.
[출처] 공서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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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중국의 젊은이 눈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오합지졸들이 사면팔방으로 제 살길을 찾는 경우에 이들을 어떻게 다시 모아들여서 일사분란하게 전투를 감행하는 군대로 만들 것인가?
일본 식민지로써 36년간 알짜를 몽조리 빼았긴 터에 미국이니 쏘련이 달려들어서 한반도를 둘로 나누던 시절에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의 갈 길을 앞에 놓고 서로 죽이고 살리고...... 그 와중에서 산야의 벌목, 구호미와 기타 생필품을 도적질하기 위하여 민주당이다 자유당이나 케싸면서 이리 붙고 저리 붙고, 저 혼자 잘 처먹자고 이리 뛰고 저리 협잡질을 하던 시절에 박정희 장군이 소위 혁명이란 것을 해냈다.
그가 내세운 공약의 제2조.....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 무슨 대안이 있어서 이런 거창한 약속을 내세울 수가 있다고 보시오?
박정희는 일제말기에 두 군사학교를, 그 하나인 만주군관학교에는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써서 과년한 나이에 입학해서 1등으로 졸업했고, 일본인 눈에 쓸만하다고 보여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했었다. 만주 관동군에 배치되어 광복군을 무찌르다가 해방을 맞아서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섞여서 다시 대한민국에 귀국했다. 한국군에 편입되기를 소원했다가 뒤늦게 허락이 되자 새까만 후배들에 섞여서 졸속 사관과정을 거치다가 결국 후방에서만 전전했던 사람의 울분을 한번 생각해보시라.
내가 만일에 정권을 잡는 날에는 현재의 하바리들을 물리치고 내노라 하는 나라를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하지 않았겠는가?
그럼 그는 무슨 생각에서 이러한 각오를 일찌기 구상했으며 훗날에 이를 실천할 수가 있었겠는가를 물을 수 있다. 내 짐작으로는 1870여년 쯤에 일본의 남부 사무라이 집단이 '도꾸가와'막부의 후예들을 진압한 역사를 일본에서 배웠을 것이다. 막부가 2-300여년 일본을 통치하던 치국의 원리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에 근거한 유교사상에 근거했다. 그러나 16세기에 시작된 왕수인의 陽明學(양명학)에 영향을 받은 이들 별볼일없는 남부세력이 중앙집권을 무너뜨리는 明治維新(명치유신)을 시작했던 것이다.
천왕을 받들어 섬겨서 나라를 새로히 부강시키게 된 것이다. 새 혁명세력이 단행해던 조치가 훗날에 박정권이 구국강병을 이룩한 모형적 전신에 해당한다.
막부들의 떨거지들, 다시 말해서 귀족들에게는 서양문물의 생산기능을 떠맡게 했고,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세력이었던 오사까의 상인들로는 그 생산품을 세계시장에 파는 상권을 유지 내지 조장하게 했었다. 박통이 바로 이러한 모형이랄까 풀랜을 모방하여 종래의 재벌그릅들을 무시하고 즉 신흥기업인들에게 장래를 떠맡기기에 이른다. 물론 집중적인 자본의 지원을 감행했고, 그들을 육성하는 각종 혜택을 누리게 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시작한 것이 일본의 대판식의 종합무역을 구상해서 소위 10대종합무역상사들을 선정하여 해외에 무조건 사람을 내보냈던 것인데, 그 중에 내가 한 몫을 해서 Sydney, Australia로 1970년에 파견되게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 전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한국의 제품들이 팔려나가게 된 것이 바로 박정희 장군의 선견지명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는 일본의 明治維新(명치유신)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러한 정치철학은 왕수인의 陽明學에 기인한다.
주자학이 원리원칙이란 공론에 치우친 것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결과를 초래해서 새로운 학문이 등장했는데 그 원칙을 간단히 설명한 것이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위키페디아에서 인용함). 다 좋은데... 아는 것과 행동이 합일해야 한다는 논조였다. 한국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거다. 아는 것으로 끝나는 태도가 실천하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경향을 말한다.
사상이란 것이 이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사상가란 사람이 전무한 형편이다. 먹고 싸는 것에 열중하다가 보니 이런 탁상공론을 개발싸게로 아는 풍조가 오늘날과 같은 무시기 잡넘들이 나라를 말아먹게 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해서라도 이런 촌넘들의 정갱이를 까서 한 줄로 民氣(민기)를 바로 잡고자 했으나... 아뿔싸! 이 사람 이후에 어느 누가 그의 뜻을 이어받았던고? 참으로 아깝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