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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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째서 콩놔라 팥놔라 참견해야 될까?
작성자 zenilvana

나는 1972년 초에 정식으로 영주권을 받아쥐고 Seattle공항에 내리면서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Prince라는 음악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Minneapolis의 쌍둥이 도시인 St. Paul이란 곳에 방하나를 얻어놓고 전화기를 설치하게 되었다.

전선을 연결해주고, 전화기를 놔주고, 두툼한 먼저의 번호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새것을 놓아주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래서 내가 묻기를 "저것도 새것인것 같은데 어째서 이것을 놔주는가"라고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My friend; in America you should know how to trow things away." (이 보시게; 미국에서는 어떻게 버리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하네)

내가 풍요의 나라인 미국으로 이민을 왔으니, 하긴 그 말이 그럴듯 하게 생각되었다. 왜냐 하면, 1930년대 경제공황의 주요원인은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경제가 All Stop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소모되는 정도를 넘어서면 경제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풍요 속의 빈곤'이 만들어 진다.

내가 이곳에 발을 붙이는 과정에서 또 하나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사람들은 남의 일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 현상"이다. 남이 새것을 버리고 또 새것을 놓던 말던 그 전화인이 하는 일에 내가 콩놔라 팥놔라 할 처지인가? 그가 하는 일에는 전화번호책을 놓는 것이 그의 할 일이다. 그것이 새것처럼 보이던 말던 그저 전화선 연결하는 작업 중의 한 차례이기 때문이다. 이를 대변하는 영문의 경구로써 "None of your Business"라는 의미를 이로써 나는 의미있게 받아들였고 또한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왜 노력을 해야 하는가?

나는 딸을 3명이나 두고 있다. 첫째가 3살일 때, 그리고 두째가 한살일 적에 이곳으로 데려왔었다. 이 아이들이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전에 한국대학에서 개최하는 여름방학 푸로그램에 참가시킨 적이 있다. 내가 이를 좋게 여긴 이유가 "자기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애비된 내 의사로 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왔으니 돌아가서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를 확인하고 계속 미국사람으로 살 것인지 한국인이 될 것인지를 결정해라"하는 뜻에서 그리 했던 것이다.

한달여 만에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너무 너무 실망했다"고... 그 연고가 무었이냐고 물을 수 밖에. 우선 사람들이 "너희들은 한국아이들인데 어째서 한국말을 못하느냐"고 가는데 마다 따지고 나무랬단다. 심지어 택시기사조차 훈계 내지 불평을 했고, 지나치던 행인들조차 이 아이들을 불러세워서 같은 '못할 짓"을 했던 데에 진절머리가 나더라는 얘기였다.

한국말을 내가 아니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않돼서 학교선생이 쪽지를 보내서 "집에서는 되도록 미국말을 써달라"고. 어설픈 외국발음이 붙어다녀서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돼서는 쓰건냐? 그 날 이후로 우리 부부는 되도록 영어로 이들과 대화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는 미국이민의 초창기여서 누구나 먹고 살기에 바빠서 소위 "한글학교"라는 것도 없었고, 설혹 있었다고 해도 그 아이들을 모시고 다닐 형편 내지 시간이 없었다.

이제 늙어진 우리 둘은 유창한 미국말에 따따뿌따 하면서 내 자식들과 대화를 하면서 꿀리는 영어회화를 하며 산다. 거미는 새끼들이 밥이 되는 엄연한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면 내가 자식들과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실상 문제가 돼서는 않되겠지. 그러나 저들은 이 사회의 중견인물로 잘 나가고 있는 꼴을 보면서 내가 할 일을 나는 다했다고 본다.

한국사람들은 어째서 남의 일에 나서서 잘난 척을 해야 하나?

한국사람들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한 피의 단일 민족이라고 여기고 있다. 유럽의 여러나라들, 특히 영어를 생각하자 하면 그리 생각할 수가 있겠지. 영국이란 나라는 원주민인 '켈트'족이 역사 정에 로마에 정복되었고, '바이킹'이란 게르만의 여러 민족에게, '노르만'의 불란서사람의 지배와, 해가 지지않도록 세계를 지배하면서 형형색색의 인종들과 섞여 살아왔다.

허나 한국은 고작 중국, 몽고, 일본과 내왕하다가 보니 남과 다른 것을 삭이지 못하고 저희들끼리 몰려 살아왔기 때문에 남을 이해하고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기마민족이라던 시베리아의 유목민들이 한반도에 떼를 지어 내려와서 정착하면서 같은 姓(성)을 가진 集姓(집성)촌락을 이루어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전통을 세웠다. 이를 이르러 內外思想(내외사상)이라 한다.

촌락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려면 촌장의 생각을 중시해야 함으로 누구든지 그곳 주민은 그 한사람의 눈에 나면 않되게 되어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그런 사회생활을 했었다. 여기에 더해서 유교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三綱五倫(삼강오륜)이란 것까지 곁달려서 남이나 자신들을 결속시키게 됐던 것이다. 그 여파가 바로 남에게 잔소리를 하는 전통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Nothing is permanent. 옛것은 가고 새 세상, 그것도 뭔가 남과 다른 독특성을 필요로 하는 현 세태에 아직도 고리탑탑한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나서는 꼴샌님들이 아직도 지천으로 깔려있는 한인사회, 그것이 국내인이든 해외인이든 이 최신의 싸이버공간에서 까지 그 위세를 떨치면서 "잘난 척"을 해야 하는 무리들을 본다. 시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늘 변하고 있다. 그것에 발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도태되어야 하고, 반드시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것은 自然(자연)의 理致(이치)이다.

禪涅槃

2016-04-23 07:21:37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3   rzkim [ 2016-04-27 10:34:29 ] 

지당한 글월 잘 터득 합니다

2   zenilvana [ 2016-04-23 10:18:13 ] 

다시 말해서 검정고양이든지 하얀고양이든지 쥐만 잡으면 된다. 등소평이란 중국지도자가 즉석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 말 한마디가 오늘날의 중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이 사람은 부농의 아들로서 주은래와 같이 불란서 유학을 하다가 공산사상에 매료되어서 서양사람과 일본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시절에 중국공산국가를 창건한 주역이었다.

당시의 모택동은 시골 국민학교의 선생이었다. 우연한 길에 공산당 창건 모임에 참가했다가 결국 서양사상을 옳게 보고 장개석의 썩은 사고방식에 도전해서 성공하였고, 등소평은 4차례나 숙청을 당하면서 고생하다가 이런 진리, 즉 黑(흑)과 白(백)의 논리를 뛰어넘는 철학인이 된 것이다.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사람다운 인간이 된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이런 수행을 가르치고 세상을 새로운 안목으로 보게 한다. 불교에서 이름을 날린 성철스님이 남긴 말, 즉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라는 것 역시 세상의 잡음을 다 제거하고 보면 그 진실이 보인다는 것... 남의 생각에 매어 사는 黑白의 論理(논리)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비로소 진실을 볼 수가 있다.

덜떨어진 인간들이 이래야 하느니 저래야 좋다는 생각에 매어있다면 이러한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때와 장소의 변함에 휩쓸려서 늘 낙오하는 쓸모없는 삶을 살다가 간다. 자기 만이 옳다고... 세상에는 진리라는 것은 없다. 그걸 모르니 남의 일에 콩놔라 팥놔라 하고 나서는 것이다.

1   deborah9 [ 2016-04-23 08:21:02 ] 

The moral support is much valuable than a million of cash. That is something one cannot buy wi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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