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taciturnity가 말없음이고, talkativeness는 수다스러움으로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訥辯(눌변)을 slowness of speech라고 하고, 達辯(달변)를 eloquence of talking......앞의 두 단어는 말量의 多少를 두고 하는 표현이고, 뒤의 두 의미는 말의 속도나 流暢(유창) fluency를 다룬다.
이 4개를 섞어보면, 寡默과 訥辯 그리고 多辯(다변)과 達辯(달변)은 서로 내통하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말이 없다가 보니까 어쩌다가 입을 열면 말을 더듬는 어줍음이 있을것 같고, 말을 많이 하다가 보니까 남들이 보기에 靑山流水와 같다고 한다.
말더듬이가 청산유수를 볼때 多辯으로 보느냐, 아니면 達辯으로 보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수다쟁이가 半벙어리를 訥辯으로 봐줄 수 있을까 하는 問題(문제)를 提起(제기)할 수 있다. 또한 沈默 愛好家(침묵 애호가)가 어떤 때와 장소에 어쩌다 일어나서 한마디 했다.....그러면 사람들이 그의 말이 조리있고 유창했다고 입방아를 찔 수도 있다. 반대로 웅변가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들었다 하자. 사람들이 그 달변가를 수다쟁이라고 수근거리게 된다.
나무나 풀도 '말이 아닌 말'을 한다. 뿌리로 할뿐만 아니라 공기란 매개체를 이용함은 우리나 마찬가지다. 언젠가 초여름에 마당 건너편 가장자리에서 갑자기 굉음이 나서 고개를 드니, 뒷집들이 안개같은 장막으로 가려져 버렸다. 내가 놀래서 이 변고를 헤아려 대낯의 노란장막 속을 살피니, 소나무들이 한 瞬間(순간)에 꽃가루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소나무는 南山(남산)의 것이나 '프린스톤 NJ'에서나 바람을 타고 자기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하물며 動物(동물)에게서랴? 水中(수중)의 고래나 돌핀도 音波(음파)로 수중통신을 하며, 地上(지상)의 생명들은 공기로 소리를 실어보낸다. 왜 이런 통신이 필요한가는 그들의 집단생활에서 서로가 돕고 살아야 되는 생존경쟁의 필요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동물 중에서도 群棲(군서)하지 않는 동물은 성대가 발달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고, 서로 뭉쳐야 하는 인간은 동물세계에서는 가장 弱骨(약골)이었기 때문에 孟獸(맹수)들이 먹을 수 없는 뼈나 깨서 그 안의 骨髓(골수)를 먹다가 보니까 두뇌가 체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만물의 영장의 위치에 도달했던 바다.
다시 말해서 音聲(음성)으로 협조를 구하고 共同(공동)생활을 영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意思傳達(의사전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집단생활에 요구되는 사항이 되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 보다 말을 잘한다. 소위 "수다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여자들은 더 많이 聲帶(성대)를 사용해야 하나? 여자는 어깨가 작고 그 대신 궁뎅이가 큰데 비해서 남자는 어깨와 팔다리가 근육으로 가득하고 반면에 骨盤(골반)이 빈약하다.
그리고 여자의 성대는 작아서 높은 音(음)을 내고 남자는 성대가 튀어나와서 굵은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져 있다. 남자는 맹수와 큰 소리로 위협하며 싸워야 했고 멀리서 서로 소리지르며 응원과 협조를 구해야 했고, 또 먼 거리에 신호를 보내고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자들은 작고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을 안고 끼고 끊임없이 작은 소리를 자주 했어야 했다. 어린 것들을 위험에서 보호해야 했었고 철이 들도록 항시 주의사항을 알려야 했다. 이런 철부지들을 몰고 다닐려면 말의 質(질)은 문제가 않되었고 分量(분량)과 횟수가 요구됐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남자들은 대체로 寡默한 기질을 타고 나게 되고, 여자들은 죽을 때 까지 잔소리를 끊임없이 多辯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訥辯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達變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돌아오자. 말을 더듬어도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면 '눌변'인들 어떻겠나? 그것을 조리있게 좋은 내용을 담아서 '다변'을 하다가 보면 達辯이란 칭송을 받을 수도 있다.
결국 필요한 때와 적당한 장소, 너무 많지 않은 시간과 좋은 내용의 質(질)로 말해야 함에 귀착됨을 알 수 있다. 때, 장소, 양, 질을 분간 못하면 개인 間(간)이나 공동체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 되겠다.
내가 어릴 때 부터 어머니 한테 자주 들은 얘기가 있다. 외숙모가 내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당부했다고 한다. "빚 邊(변)하는 아들두지 말고 말 잘하는 아들을 얻으라!" 그런 축원이 결국 내게 성취가 됐느지는 모르나, 하여간에 내가 이 늙으막에 이처럼 끊없이 이런 글을 쓰고 앉아 있으니 어머니를 크게 실망시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떤 남자는 선천적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태어났다는 건지 남보다 더 말이 굼뜬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해서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한 사람도 많다.
우리의 두뇌를 들여다 보자. 그 중앙에 Amigdala라는 호도알 만한 원시두뇌가 있다. 다른 동물과 같이 본능적 감정과 충동을 다루는 기관이다. 그러나 동물의 두뇌를 많이 먹다가 보니까 오늘날의 Neo-Cortex라는 큰 주름진 골을 그 위에 올려놓고, 원시적 충동을 思考와 分析의 과정을 통하여 理性的 合理化(이성적 합리화)의 행동을 유발시킨다. 이런 활동의 부분을 Frontal Lobe라는 좌-우의 뇌부분으로 우리의 이마 바로 위에 위치시키고 있다.
언제가 우리 교회의 성경공부 시간을 어느 집에서 가졌었던 자리에서,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말해보자는 제안이 나왔었다. 그 집 주인이 인용한 구절을 나는 늘 상기하곤 한다. 그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나는 말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잠언에 있는 이 구절을 아주 좋아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害(해)가 따라오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나를 지혜있는 者로 인정해준다". 내가 왜 구태어 말로써 禍(화)를 부르며, 오직 말을 아낌으로써 부수적 利得(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부언하면, Benefit of Doubt...즉 침묵함으로써 남을 까리까리하게 하는 잇점이 있다는 거다.
내가 교회생활 30년을 하여오면서, 이 사람처럼 말을 않하겠다는 한국남자들을 자주 보아왔다. 입이 있으나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할까, 아니면 哲學(철학)과 宗敎(종교)의 경지에서 말을 삼가하겠다는 것인지...하여간에, 말을 않하거나 못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내가 이곳 미국이란 나라에 와 살면서 보면,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말의 豊年(풍년)을 즐기는 가를 놓칠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더욱 더 우리사람들의 말 數(수) 적은 것에 신경을 쓰게되었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인터넽'시대에 살지 않는가? 남의 이메일을 받아도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습성을 어떻게 봐주어야 할지 난처할 경우가 많다. 이런 곳에 누가 한마디 남기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를 않는다.
미국사람들은 처음 만나나 오래 사귀나 상관없이 "자잘구레한 말(?)"로써 내게 접근하였었다. 왜 이럴까를 많이 생각해 봤다. "남과 같이 있을 때 침묵함은 상대를 불편하게 해준다. 그래서 그를 마음놓게 해주고자, 즉 남을 아낀다, 또는 사랑한다"는 미국사람들의 사랑의 정신이란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희랍시대서 부터 로마에 이르던 역사 초의 서양에서는 Dialogue(대화), 연설, 토론이 발달했던 문화 속에 살아왔던 이들이다. 그런 후예들이 이런 태도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중국을 비롯해서 한국은 침묵의 문화가 발달해 왔다. 즉 喜怒愛樂(희로애락)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을 君子(군자)의 표본이라... 孔子(공자)가 말했었다. 이것을 태어나면서 부터 성장시킨 우리들이 아닐까 한다. 이 철학은 오직 感情(감정)을 다루는 교훈인데 비하여, 그논리적인 理性的 判斷(이성적 판단)은 어떻게 처리하라는 가르침이 없다.
그러다가 보니까 한국사람들의 모임에 가보면 누가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말하더라도 오직 좋고 않좋고 하는 감정만 분분할 뿐, 그 말하는 내용과 사고의 옳고 그름에는 별 관심을 쓰지 않는것 같아 보인다. 그래 놓고 자리를 파한 다음에 뒷구멍에서 "실은 그게 아닌데"라면서 말들이 많은 경우를 자주 본다. 따지면 손해보고 돌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겁낸다. 회의라는 데서는 절대로 發說(발설)을 하지 않는 것이 德(덕)으로 간주가 되고, 結議(결의)된 어떤 것도 지키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말 잘하는 목사님은 환영받고, 과묵하신 장로님은 평생장로를 해도 좋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말을 하지 않고 눈치로써 때려잡는 "어부지리"의 뒤에만 숨어버리면 어떻게 할일을 제대로 하게될까 하는 걱정이 들게될 때가 많다. 이런 것을 제대로 가릴 줄 모르면 寡默은 沈默이 되며, 多辯은 拙辯(졸변)이란 비난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공동체에 累가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나 아닐지...... 우리는 마땅히 좋은 내용의 말을 적당한 때에 할 줄 알아야 그 사회의 安危(안위)와 건전한 發展(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론 개인 間(간)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