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水去士(일수거사)란 필명은 본적이 있지만 一水去生이란 말은 내가 처음 지어낸 단어다. '한물 간 인생'이란 얘긴데, 무시기 감이 좀 갑네까?
생선시장을 넘보다 보면 한물 간 것들이 간간이 보이는데 싱싱한 누깔과 번지르르한 겉보기는 저리 가라로 어딘가 색이 바랜 것들을 만난다. 그게 한물간 생선이다. 말하자면 인생도 그러 하다는 의미로 그래 말해 보는 겁니다.
예전에 내가 젊었을 적에 싱싱하게 물이 잘 오른 처녀들을 만나면 '거~ 참 싱싱하다. 먹음직하다'라는 말을 친구들과 주고 받은 경우가 있었다. 요즘의 어린녀석들도 그러한 표현을 쓰면서 삼삼한 구미를 돋구는지 모른다. 왜냐? 나는 이미 한물이 갔다고 볼 수 있겠지비.
언젠가, 내가 初老(초노)의 시절에 뉴저지 소재 English Town Flee market을 어정거린 적이 있었다. 1972년 초에 이민와서 뭐 정착하는 길목에서 그 곳에서 허접뿌레한 것을 판 적이 몇번 있었다. 후에 '프린스톤'이란 곳에 집을 사고 오늘 같은 주말이면 그곳을 가끔 가보곤 했다. 이 때는 중국사람이나 비��남 그리고 러시아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더군. 이들이 가방이나 색안경 베이볼 캡의 모자 등등을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로 공구(工具)에 관심이 있었다만, 화창한 날씨에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장터의 분위기를 잊지 못했다.
헌데...중년이 채 않된 어떤 한국여성이 미소를 띄우며 좌판을 기웃거리는데, "야 이거 무르익은 복숭아가 색갈을 자랑하며 한껏 먹음직하지 않은가!" 바야흐로 제물을 맞았다는 건지, 얼굴은 화사하게 흰데다 볼은 분홍빛을 빛내고, 몸집으로 내려가다 보니 약간 뚱뚱하지만 탄력있어 보였다. 내가 그녀의 궁둥이가 풍만한 것까지 놓치지 않고 살피지 않았겠나.
이민와서 4년 만에 어머니를 찾아뵙고자 한국엘 갔었는데 마침 큼직한 한국배를 내게 내밀더군. 달고 새큼한 물이 줄줄 흐리는 그 배가 하도 맛이 좋아서 어머니께 "나 이렇게 맛있는 배는 내 생전에 처음 먹어본다'고 감탄을 했다. 이 여인네가 바로 그런 배맛을 상기시키는 거라. 하지만 나는 이미 내자(內者)가 도사리고 있는 판에 군침을 삼키면서 그 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서도... 그 날 이후로 무었이 정작 물이 잘 들어있는 가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 다음 해에 어머니가 미국에 오시는 길에 배나무 묘종을 7개 가져와서 뒷마당에 심게 되었고, 그후로 14개를 더 보충해서 15-6년을 한국배로 배를 불렸고 마는. 물론 내 동창녀석들을 불러서 골푸를 치게하고 쇼핑빽 가득히 나누어 주곤 했었지. 물론 '단물이 질질 흐르는 내 배'를...몇년을 그리 했더니 친구넘들이 금년 가을의 언제쯤 자기네를 부를 거냐고 묻더군.
예전에 황진이(黃眞伊 1506년 ~ 1567)년가 벽계수(碧溪水)란 녀석에게 시조(時調) 한 手(수)를 남긴 것이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골짝의 푸른 물이 흘러흘러 바다에 도착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밤하늘을 그득히 채운 이 밤에 한 밤 쉬어감이 어떻하겠는가를 묻고 있다. 내가 인생을 거이 다 산 이 마당에 밝은 달이 내 침실을 비췌우며 마음을 뒤숭숭하게 해본들 같이 놀거니 말거니 할 여인네는 간곳이 없고나.
물이란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거늘 내 물이란 것은 이미 거의 바닷물가에 도착해 가고 있는데 누구 알아줄 사람 없고 신세나 타령해본들 들어줄 사람조차 없는 이 인생의 마지막 길이 처량하다고 말해야 할까 보냐?
천만에... 사람사는 것이 어찌 남녀의 사랑에만 뜻이 있다고 말한다는 말인가. 세상살이 그 자체에는 참으로 의미있고 또한 재미있는 일이 많다. 오직 내 손과 발이 미처 다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비. 나는 요즘 매우 바쁘게 살고 마는, 단지 그것 하나만 빼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할 애비된 도리랄까 아니면 인간된 그 역활을 다한 이 마당에서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을 맘껏 즐겨보자 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