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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번:경제성장은 3가지가 충족돼야
작성자 zenilvana

첫째가 자본이다. 그 다음이 인력 그리고 마지막이 기술이다. 당시에 한국은 자기자본이란 것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을 보상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차관이란 명목으로 돈을 빌려왔다. 물론 일본이 그 보상액을 주었지만 일본 금융계로 부터도 차관을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박통이 대한항공기를 빌려타고 독일로 가서 파독 탄광부와 그 간호사들의 손을 붙잡고 울면서 '아데나워'수상에게서 받아온 차관도 한몫을 했다. 당시에 미국은 군사쿠테타로 간주해서 전혀 돈을 꾸어주질 않았다. 그가 한때는 남노당의 간부로서 활략한 과거도 그렇게 결정한 이유도 있었다고 본다.

박통은 만주사관학교 특기생으로 해서 일본 정규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었다. 그가 어찌 명치유신이란 일본의 과거사를 모르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경제적 성장과정도 익히 아는 바였다. 그것이 뭐냐? 국가위주의 경제정책이었고 국민들로 하여금 저축하게 해서 경제성장의 자본을 형성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과 중국을 착취해서 축적한 자본도 큰 역활을 했던 것이다.

그만큼 자본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던 차에 한국도 일본이 걸어간 발자취를 따라가자던 판에 남덕우 경제기획원 원장이 先輸出 後分配의 청사진을 내어놓은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이 싻트던 당시에 내가 선경산업에 입사해서 1년만에 100억불 수출목표를 이마팍에 붙이고 Sydney, Australia로 홀혈단신으로 떠났던 것이다.

다음에 인력, 즉 노동자의 문제는 별로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일자리가 없던 판에 수출을 위한 공장이 싸구려 일꾼을 불렀던 바라 얼마를 주건 말건,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던 말던, 그렇다고 over time을 어찌 생각이나 할쏘냐? 실제로 나의 경우는 20일쯤되면 받은 월급이 동이 나고 말았다. 물론 뻐쓰에 매달려서 출퇴근을 했어도 그렇게 생활이 않되었다. 월급 받는 날에 맥주 한병과 소고기 반근을 사는 것도 사치에 해당했다.

토요일은 물론이요 일요일에도 가끔 나가야 했다. 일이 밀려서가 아니다. 회사에 오는 전화를 받던가 경비까지 해야 하는 요구를 수출과 직원이 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에 회장실에 전화가 계속 울려서 회장실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너의 회장 지금 있어?" 말투가 사뭇 고압적이랄까 건방지게 들렸다.

내가 군대식으로 "나는 수출1과 아무개인데 누구십니까?" 물을 수 밖에.

그쪽에서 "그런 건 알 필요없어. 지금 있어, 없어?" 목소리도 걸걸한데다 그 기세조차 등등해서, 얼떨결에 "않 계십니다."라고 했더니 전화를 갑자기 끊었다. 내가 후에 최종건회장의 비서가 되고 나서 안 사실은 이 사람이 이후락이었다.

禪涅槃

2017-02-18 07: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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