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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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5:겉으로 밑지고 속으로 남는 장사
작성자 zenilvana

그게 先輸出 後輸入(선수출 후수입)이었다. 총무부장이 신입사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 최종현 부사장이 나타나서 나를 가리키며 1년 후에 해외지사로 파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참고1:)

약속대로 Sydney, Australia에 한국의 무역역사상 처음으로 100억불 수출을 목표로 당시 30세의 한 젊은이를 그 곳에 파견한 때가 1970년 봄이었다. Sydney 항만의 부둣가를 등진 유명한 조개껍질 모양의 '오페라 하우스' 물건너의 경관좋은 한 flat(영국식 아파트란 말)에 여장을 풀었다.

자동차가 없는 나로서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훼리'(ferry)를 타야하는 불편함과 경비문제가 있었고, 지구의 남반부에다 때가 겨울이라서 따듯한 해가 귀한 위치라서 늘 추웠다. 그런 이유로 한달 후에 그곳 downtown 한 작으마한 호텔의 한 방으로 이사를 했다. 비용절감과 시간절약으로는 왔따였다.

출근해야 했던 곳은 C. Itoh & Co.의 사무실이었다. 그곳은 양모를 전담하는 부서에 비하면 초라했다. 당시에 호주양모의 거의 전부를 '이또츠'가 세계에 수출하였던 고로 그 부서는 항구를 내려다 보는 대형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훼리'에서 내려서 George Street를 따라서 완만한 경사길을 4-500 메타를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었다.

선경 측은 실상 이 일본회사를 통하여 수출해왔기 때문에 내가 별도로 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앞에 말한대로 나는 이 채널을 거치지 않는 독립적인 무역창구를 통하여 서신을 주고 받았으니 그들 사무실에서 회전의자를 돌리기를 싫어해서 1-200 미터 더 올라가 있는 '한국무역진흥공사'의 사무실을 주로 찾았다. 48층의 원통삘딩 중간쯤 어느 층으로 기억된다. 내 호텔방에서 별로 멀지를 않았다.

당시에 공관장 한분, 그리고 조상현이란 고교 및 상대1년 선배와 둘이 근무했다. 조선배가 어느날 호주의 '오파상'들이 몰려있는 건물로 가자고 했다. 처음 들린 곳은 호주의 또 하나의 명물인 Opal을 수출하는 one man stand라 할까 그런 사람이 우리들에게 자기 물건을 보여주었다.

호주 Opal로 유명하게 비싼 것은 'Black Opal'이란 것을 그 때 알았다. 붉고, 파랗고, 녹색과 검정색이 섞여있는 semi-precious stone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Opal Stone 중에서 우유빛이 전부인데다 붉고 초록빛이 나는 것이 호주돈으로 $1.00 였다. 개중에 색갈이 더 뚜렸한 것들을 조선배와 내가 여러개를 쌌다. 물론 샘풀이란 명목이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Teddy Bear 장난감에 숨겨서 내 처에게 보냈다. 후에 미국에 와보니 그런 것들이 $2-300불의 보석반지로 팔리고 있더군.

또 다른 사무실에 꿀장사가 있었다. 긴 말 빼고, 꿀 한 초롱 (예전에 물통으로 쓰던), 아마도 10 Gal.짜리를 $10불에 팔고 있었다. 나야 호텔방 신세다 보니 감히 엄두를 못냈지만 조선배가 그 한 초롱을 샀고, 나도 좀 맛을 본 기억이 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1970년 초에 그와같은 별천지가 호주에 있었다. 양털가죽은 어떻고? 그 한장에 역시 $10불이면 떡을 첬다. 10여년 후에 '카추샤'라던가 하는 양모가죽 잠바를 입지 못하면 유행에 뒤졌던가, 아니면 형편이 않됐던가 하는 대대적인 히트상품으로 등장했다.

미국으로 이민온 후, 그것도 2-30년이 지난 후에 내가 어째서 그런 호주의 물건을 한국으로 수입해서 벼락부자를 꿈꾸지 못했던가를 후회했다. 한마디로 무역행위의 등신이었던 거라. 그만큼 수출 수출 나발을 불다가 보니 그런 쏠쏠한 재미가 지평선 저 넘어에서 나를 불렀건만...

그러한 게 바로 수입이란 말씀이외다. 한국이 경제발전을 해야 하는데 그 첩경이 先輸出이라고 했지만 수출을 하려면 공장을 지어서 원자재를 해외에서 사들여야 하지 않겠오? 한국은 자연자원이 부족했고, 그것들을 가공하는 기술과 공장이 거의 전무했으니 당연히 가까운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던 것이다.

기계부속품 또는 원자재들이 청계천의 상인들을 통하여 앞에 말한 돈벼락을 탐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메에 있었관대? 나같은 빙신을 제처놓고 말씀이야. 당연히 수출전대에 앞장 섰던 기업들이 '겉으로 미찌고 속으로 남는 장사'로 떼돈을 벌었고 급기야는 재벌의 정상에 오르게 된겁니다요. 거기에 한발을 걸첬다 할까, 아니면 이들을 도운 공로자들이 지금의 50-70대가 태극기를 드는 겁니다. 왜냐?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향수로 영원히 그대로가 좋다는 시대감각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겁니다.

시대는 늘 변하니 그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라! 그런데 꼰대들이 그것을 못하고 있오. 고작 한다는 짓거리가 태극기를 날리며 그 때가 다시 오기를, 아니 그런 사람의 딸을 그 자리에, 누구든지 진보라면 빨갱이로 보이는 그 시각이 한국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읍네다. 빨간 누깔을 촛불로 태우고 살길을 찾는 이유에서 새 눈을 뜨시구레. 그제야 태극의 진정한 의미가 나타난다~ 그런 논리가 되겠오.( 참고 3)

참고 1: 최종건 회장은 1972년 가을에 타계하셨다. 그의 뒤를 이은 분이 동생되는 최종현 회장이고, 그 역시 1998년에 유명을 달리해서 현재이 SK Group의 총수 최태원이 손길승 회장이란 내 1년 선배가 고스란히 아버지의 재산을 빼돌리다가 둘다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최태원이는 내가 재직시에 중-고등학생이었던 고로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이즘의 이재용이가 같은 짓을 하다가 철창에 들었다. 그가 애비에게서 받은 재산은 60억원이었으나 현재의 富는 6兆에 이른다. 여러 경로 중에서 많은 것이 있다만,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박근혜의 눈갈임으로 합병됐다는 의심이 매우 강한 것이 최근의 탄핵의 핵심이 되고 있다.

참고 2: 최종현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직도 겸했고, 손길승선배가 전경련의 내 동료였고 또한 동기동창인 손병두를 부회장으로 추천해서 출세가도에 등장했다. 그 둘은 진주고교와 서울상대의 동창관계다. 최종현 회장은 사람에 투자한 사람으로 선경장학재단을 설립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에게 무조건의 장학금을 지급한 선구자다. 내가 훗날에 그곳을 찾았더니 예전에 본 얼굴이 나를 반기면서 미국유학을 그 덕분에 하게됐다고.

참고 3: 太極(태극)이란 陰과 陽이 돌고 돌아서 極에 이르는 頂占(정점)을 말한다. 이 개념은 易經(I-Ching)의 말로 후에 '마테오 리치'에 의하여 서양에 소개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Hegel의 역사철학, 그리고 공산주의 이념에 등장한다. 正-反-合으로 풀이된 역사철학의 개념이다. 태양이 돌면 陽이 正이 되고, 反하여 陰에 들었다가 다시 한 복판에 이른다. 이곳이 太極이다. 태극기의 도해가 바로 이런 움직임을 표현한 산물이며, 한국은 늘 正-反-合의 원리에 근거하여 나라가 세워졌다.

그런데 태극기를 든 자들이 그 뜻을 모르고 옛 박정희 그리고 그 딸 박근혜의 極을 고집하고 있다. 세상은 늘 변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거늘...아니면 혁명이란 이름으로 낡은 양가죽 부대가 터지고 만다. 시대가 변하는 것을 모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니 이들이 바로 현대판 빙신들이다. 내가 옛날의 등신이었다면.

禪涅槃
2017-02-21 06:55:11

2017-02-21 06: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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