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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0년 30세 복수여권 MB11747을 쥐고
작성자 zenilvana

해외지사를 세우는 일은 한국 무역역사상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경이 현대, 삼성, 대우, 금성 등등의 10대 종합무역상사중의 하나로 지명을 받았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고 수출경험이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호주지점을 개설하라는 명령이 결국 나에게 떨어졌다. 가족이 없이 혼자 가야한다는 조건을 수락하고, 내 생전 처음으로 국외로 여행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친세라 나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길로 나섰다.

여권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무역협회에 가서 정부의 '해외지사 개발금'으로 약간의 보조금을 받아 쥐었고, 해외지사를 차려본 적이 없어던지라 그 운영의 내규를 총무부 부장과 상의하여 그 첫 초안을 작성하였다. 내 가족에게는 내가 받던 월급을 지불하게 했고, 현지에서의 내 생활비로 $500불과 별도의 지사 운영비를 따로 계상해서 매달 송금해 주기로 내정하였다.

공항에는 우리 부모님과 집사람과 첫딸, 그리고 여동생 식구들... 사촌형님들과 사촌누이들이 나를 전송하고자 그 곳에 나와 있었다. 나는 이미 여러번 말렸었다. 그들 말이 "네 덕택에 김포공항을 구경한다는데 굳이 말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처음 나가는 출국수속에 경황이 없는 중에도, 이들을 대접하고 배가 막삭이된 여편네를 붙잡고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한국을 떠났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때는 무슨 특권층이나 하는 짓거리였다.

해외지사가 설립이 거론될 때에 무슨 이유인지 나를 아끼던 '독고 선' 상무가 물러나고, 김응초란 분이 새로 부임해서 나를 인솔했다. 창밖에 기묘하게 전개되는 구름모양에 넉을 잃고 살펴보던 나는 갑자기 안주머니의 상용여권을 다시 한번 꺼내 봤다. 좀 전에 출국수속이 단조로와 짐을 느끼게 하는 순항의 속력로 세상 밖으로 나는 날아갔다.

내 나이 30살에 상용 복수여권 번호 MB11747 이라... 그때 '보잉'의 747 비행기가 새로 취항하던 때라 이 번호가 쉬울쎄라, 새 출발의 '11'이 앞에 써있었다. 가슴을 부풀리다가 일본의 '오사카' 공항에 내렸다.

그때 일본, ‘오사카’에서는 국제무역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곳 대합실에서 한동안 기다리다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우리가 1 등석의 표를 산것이 아닌데도, 박람회 때문에 일반석에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서양사람의 옆에 앉아 보니 "네델란드"사람이 회사의 회장이라며 자기를 소개했다. 서양사람에, 더구나 높은 분을 곁눈질로 자주 살피던 중에 점심식사 시간이 됐다.

서양여자 승무원이 상냥한 미소를 보내오면서 무었을 먹을 건가를 물어왔다. 회장이 '치즈'라는 초록색의 겉껍질을 칼로 짤라내면서 빨간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어줍은 시늉을 하면서 같은 것을 달라고 주문했다. 그 녀는 처음 보는 초록색 눈을 가진 '스튀어디스'였다. 서양의 젊은 여성이란 이렇게 상냥한 미소를 한껏 웃는가? 성난 얼굴만 보아오던 한국여자들과는 천지의차를 느끼게 했다. 1등석에다 그들 특유의 친절함이란 것을 후에 알았지만.

무료한 두어시간 후에 비행기가 홍콩에 도착하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불안하던 여행이었던 차에 홍콩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회장의 자리를 넘겨보려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창밖에 온 신경을 쏟았다. 비행기가 높은 삘딩들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피했다는 듯이 공항에 서서히 착륙했다. 멈추어 선지 얼마 않돼서 후덥지근한 습기가 갑자기 기내로 몰려 들어왔다. 마치 목욕탕에 들어선드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2층 뻐쓰와 혼잡한 물결을 헤치면서, 대륙 쪽 "쿠어룽"의 어느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나같은 촌뜨기가 겁낼 겨를이 없이 앞서가며 입국 수속을 해결해 주었다. 그런 목적에서 나를 따라 나왔지, 하긴.

김상무는 나를 내팽개 쳐놓고 어디론가 살아졌다가 저녁 나절에나 돌아왔다가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결국 현지인들이 사는 어느 아파트 문을 노크했더니 주인인 듯한 인도사람이 비좁은 방으로 우리를 맞아 들였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던지 서로 반가워 하면서 나를 소개도 했고, 방안을 치워서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김상무가 대짜고짜로 "조니 워커"가 있는 가를 물었다. 마시다 남은 반 병짜리도 괜찮냐고 되물으면서 우리들 앞에 내어 놓았다. 안주라는 것은 없었다. 주인이 술잔 둘을 내어놓자 김상무가 당신도 같이 하자고 했으나 그가 사양했다. 우리 둘이 몇 잔을 마시다 보니 금세 바닥이 나고 말았다.

술기운이 돌지 않은 상태에서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자, 따지 않은 새 병을 꺼내 주었다. 자기네들 끼리 아는 얘기를 주거나 받거니 하면서 김상무가 나한테만 자꾸 술잔을 채웠다. 극구 사양했지만 무료한지라 혼자서 거의 한 병을 다 마셨다. 호텔 방으로 돌아오기 까지 얼큰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했었다. 침대에 누워서 그날 사들인 양담배 한 보루를 뜯어서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다음날 쇼핑을 하고 내 호텔 방을 찾아드니, 호텔 종업원같은 친구가 방 가운데 서서 나를 보자마자 담요 한장을 쳐들어 보였다. 댓짜곳짜로 당신은 누구냐고 내가 물을수 밖에...

그는 대꾸 않고 털담요 한가운데에 꺼멓게 탄 구멍을 더욱 높이 처들어 보였다. So...? What is the matter?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라고 내가 영어로 물었다. 내가 태웠다는 말이 나왔다. 내가 놀래서 연거퍼 "No... No" 를 외치다가 잠들기 전에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왔다.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첵크 아웉’ 할 때에 담요 한장 값을 변상하면서 김상무가 내게 역정의 소리를 질렀다. 불이 나서 황천행 하지 않았던 것 만은 다행이라 해야겠지, 하여튼...

홍콩의 단골 수입상 왕서방이 우리를 대접한다 해서, 부둣가에 떠있는 큰 보트식당으로 갔다. 이 사람은 정말 비단장사 왕서방인데, 한국에 가끔 올적 마다 다이아몬드 반지, 다이아 넥타이 핀, 다이아 목거리를 착용했다가는, 그 다음에 방문할 때는 금이나 '루비' 등등의 보석을 '셑트로 맞추어서 온 몸에 치장하고 나타났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그 식당에서 그렇게 맛있는 중국요리는 내 생전 처음으로 먹어봤다.

식사 후에 자기 "멜세데즈 벤츠"에 우리들을 태워서 어두컴컴하고 외진 어떤 데로 몰고 갔다. 덩치 좋은 문지기가 컴컴한 안으로 들여보내자, 갑자기 환한 넓직한 홀이 나타났다. 불빛에 익숙해지자 이곳 저곳을 살폈다.크지 않은 중앙의 홀을 끼고 한 단계 높게 둥그런 회랑이 둘러져 있었다. 중앙에만 비춰진 조명이 주위의 탁자와 의자들을 어둡게 만들었다. 아직 이르다는 건지 고객이 별로 많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한 곳에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좀 있으려니 한 사나이가 공책 크기의 나무판대기를 우리들에게 돌렸다. 보자하니 붉으무레한 나무 판대기가 두 조각으로 접혀 있었다. 유심히 살피는 중에 왕서방이 그 판을 열어서 웨이타'에게 중국말로 주문하는 것 같았다. 아하~ 이게 그 메뉴라는 것이구나... 그렇게 짐작하고 나도 그것을 열어서 자세히 살폈다.

한문이 좌우로 나뉘어 뭔가가 쫙 써있었다.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한 아가씨가 내 옆에 와 앉았다. 무슨 일인 가를 새삼 묻기도 뭣해서, 그냥 꼿꼿이 정색하고 앉아 있으려니까 그 처녀가 말도 없이 가버렸다. 잠시 후에 또 누가 와서 앉았다.

나는 그 때서야 그 메뉴라는 것이 소위 조선시대의 성춘향이 기생 점고판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중국은 그때까지도 그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가? 내가 놓칠세라, Do you speak English?라고 두째 여자에게 말을 거니까 아무 대꾸도 없이 또 사라졌다. 세번째로 누가 왔는데, 영어고 뭐고 상관않고 그저 눌러앉아 버리고 말지 않았던가. 삼세번이면 끝장이라는 거다. 내가 이러고 있는데 왕서방은 그의 첫 여자와 뭔가를 숙덕리다 못해 '춤의 마루'로 들락거리며 춤을 추었다. 김상무도 이처럼 자기 자리를 떴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그 역시 한국사람이 아니던가? 뻔할 뻔자지비.

이 아기씨들이 본토에서 팔려왔는지 영어를 전혀 못했다. 나 역시 춤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도 안 통하고 춤출 줄도 몰랐고..., 그 결과를 더 말해 무었하리... 현 시대에 국제무대에 나타날 량이면 어느 정도 흉내를 낼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었인가를 팔러다녀서가 아니다. 미국 결혼식에 가 보시라. 어디서 촌뜨기들만 골라왔는지 체하며 두리번거리고 자리를 지키는 꼴이란... 하여간에!

다음날에 '말레이지아'의 수도인 '쿠아라룸풀'에 잠간 내렸다가 비행기가 우리를 '싱가폴'로 다시 모셔갔다. 중국과 로마를 통하던 두 갈래의 길이 옛날에 있었다. 하나는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란 육로였고, 또 하나가 말라카 해협을 거치는 바닷길이었다.

인도양으로 들어서서 아라비아 반도의 ‘마호멭의 고향인 ‘메카’를 통과하는 바닷길이 또 다시 둘로 갈린다. ‘카라반의 남쪽 육로가 그 하나요, 또 하나는 紅海(홍해) 서북쪽 Jordan의 유일한 항구인 Aqaba를 통과하는 길이 있었다.

거기서 현 시대의 관광지로 둔갑한 Petra 사막을 거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북쪽 길목에 다다른다. 이렇게 東과 西의 문물이 통과하던 한 무역의 요지가 오늘의 싱가폴란 도시국가이다.

수천년의 무역중심지로 발달된 도시로써 고층건물들과 여기저기의 길가는 매우 깨끗했다. 그 곳의 High Street라는 포목시장을 둘러 봤다. 상점들이 늘어선 좁은 길의 좌우에는 온갓 천들이 아래 위로 걸려서 휘황찬란했다. 마치 ‘천일야화'에 나옴직한 '바그다트'의 미로가 이랬었는가를 상상하게 하는 시장거리였다.

상점들을 하나 둘 지날적 마다 특이한 향불냄새가 각각 다르게 코안에 들어왔다. 어떤 것은 'not bad'했는가 하면 다음의 것은 역겨운 것도 있었다. 김우중씨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역선배들이 그곳을 이미 누볐던 바로 그런 곳이다. 아랍, 인도, 중국, 일본상인들의 오랜 역사 속에 뒤늦게 나같은 풋내기가 석여들어서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그 곳에서 호주의 "콴타스" 비행기를 나고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언제 떠나는가 하고 창밖을 내다 보노라니, 어떤 인도인이 사진기로 보이는 것을 한 손에 높이 쳐들고 우리 비행기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아~ 내 캬메라!"... 나는 타랍의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서 그것을 받아 쥐었다. 몇일 전에 홍콩에서 샀었던 내 생애에 처음 만져본 나만의 사진기였다. 돌아와 앉자, 김상무가 코웃음을 치면서 못마땅해 했다. 홍콩에서 부터 ‘본의 아닌 실수’가 또 다시 거듭된 순간이었다. 부끄러운 현실에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한번은 '싱가폴'을 돌아다니다가, 야외꺄페에서 7UP 이란 사이다를 주문해 마신 적이 있었다. 내가 싱가폴 돈을 내놨다. 그 종업원이 잔돈을 가져다 주길래 "You keep it" 이라고 말했다. 팁을 주어야 한다니, 그렇게 했던 것이다. 김상무가 "너가 재벌의 아들이냐?" 고 비웃으며 나를 힐난했다. 아마도, 팁으로서는 지나치게 많았던 잔돈이었던 모양이었다. 벌써 여러 나라에서 환전(돈을 바꾸다)을 해왔었던 바라, 돈의 가치를 나라들 마다 제데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지가 불과 몇일 전이었다. 이번에 또 캬메라를 대합실에 남겨놨던 것이다. 갑자기 바뀌어가는 새 환경에 모든 것이 내게 새로왔고, 두뇌는 이에 맞추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갑자기 내가 이렇게 얼철철 해질 수가 있다는 건가? 더구나 나를 인솔한다는 웃사람은 나를 내버려 주기는 커녕, 일일이 빈정거리고 나무래기를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외국물을 처음 먹어보는 내 입장을 염려한다는 아량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나를 완전히 바보로 몰아넣는 것이 그가 할 일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의도에서 그러는 건지, 내 사전에는 전혀 없는 그런 거였다.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 내 자리를 찾으려고 그 안쪽을 바라보니, 노랑머리로 꽉 메어져 있었다. 그들이 우리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까만머리를 한 승객은 우리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위축돼오는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를 비행했는지 지루하다 할 때에 승무원들이 종이 한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무슨 증명서 같았다. 우리가 방금 적도선을 넘었단다. 옛날 바다와 싸우며 세계를 정복했던 그들다운 발상이었다. 적도를 넘어서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야 인도나 호주에 도착했던 영국민족의 역사적 기념장이었다.

드디어 시드니..., 그 공항에 내리니 여기가 가을에 접어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듯 찬바람이 내 얼굴을 덮쳤다. 몇일 전에 한국의 봄을 떠났던 내가 아니었던가? 세상의 진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이 말을 실감하는 그 찰라에 또 다른 무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가슴이 설레어 왔다.


禪涅槃

2017-02-21 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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