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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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벌기업 창업자, 인간 그 사람
작성자 zenilvana

옛날, 수원의 남쪽에 평동이란 동네가 있었다. 수원 시내에서 외곽으로 좀 떨어져 나오면 "선경직물주식회사" 란 간판이 정문위에 밖힌 직물공장이 나섰다. 예전에는 한적한 동네였으나 이제는 시내 한복판이거나 아파트 단지가 들어앉아 있지나 않을까 짐작하는 그런 곳이었다.

이 공장의 주인되시는 최종건씨는 해방되기 4-5년 전 까지는 이 직물공장의 기계공이었다. 그는 서울의 아현고개를 넘어서 이화여대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외쪽에 보이는 경기공업기술 전문학교를 졸업하자, 자기 고향인 수원 평동에 있는 일본사람의 직물공업사에 방직기계 기계공으로 취직하였다. 해방될 당시에 그가 무슨 직책의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일본이 패망하여 도망하는 와중에서 공장은 문을 닫았고, 그럼으로써 그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는 한국사람의 체격기준으로 볼때 드물게 보는 큰키의 거인으로서, 그의 얼굴 모양의 생김새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연상시키는 호랑이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하여 이런 대기업을 이룰 수 있었는가 하는 데에는 많은 일화가 있다. 그중 하나를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자기네 동네에서 그는 소위 "가다"로 군림하며, 술과 주먹을 좋아하는 시골의 한량이었다. 이 해방통에 별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그 직물공장을 미 군정이 입찰에 붙혀서 민간에게 불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자기의 똘만이들을 동원하여 그 공장의 방직기계를 돌리는데 없어서는 않될 중요부품들을 모조리 빼내어 가마니에 넣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집 마루 밑에 숨겨 놓았다.

입찰이 있을 적마다 뒤에서 구경하며 일 돼가는 것을 관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찰공고는 나갔으나 입찰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아무도 입찰에 응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당시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고, 방직기계 부품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누군가가 입찰을 하려고 공장을 살피다가는 방직기계들이 하나 같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들 손을 들고 물러났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그 직물공장을 아주 헐값에 낙찰시키는 유일한 행운아가 된 것이었다.

이제 자기 공장의 주인이된 최 사장은 여러가지 천을 생산해서는 서울의 동대문이나 지방의 큰 도시에 팔면서, 그런대로 장사가 순조롭게 운영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초에 한국에는 갑자기 "깔깔이 치마"라는 유행이 불어 닦쳤다. 서울이나 지방의 내노라하는 아주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은 이 깔깔이를 입지 못하면 점잖은 자리에 나서지를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대문이나 남대문의 큰 포목상들이 이 깔깔이 천을 짜 내놓으라고 웃돈을 언져놓고 성화를 처도 방직기계가 빼놓을 수있는 양은 한도가 있어서 도저히 시장의 요구를 맞출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최 사장은 이미 "한국직물연합회"의 중진인물로 활략하고 있을 때라, 이 호황의 경기에서 누구가 경쟁자이고 어느 공장이 원사가 없어 손을 놓고 있는가를 파악하고 있었던 차다. 이 싯점에서 승리자로 부상하는 길은 누가 원사를 얼마나 충분히 확보할 수있는가의 께임으로 결론이 난다고 생각했다.

이 깔깔이의 원사는 "폴리에스타" 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국의 "듀퐁"이란 회사가 "나이론"을 개발하면서 이 인공섬유가 미국을 전쟁의 승리자로 이끄는 일력을 담당했었다. 전쟁 종결 이후에 영국의 "임페리얼 케미칼"이란 회사에서 또 다른 인공섬유인 "폴리에스타"를 생산해 냈다. "나이론"은 값싸고 질긴 장점이 있었으나, 습한 기운을 함유하고 있어서 의류로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나고 있었다. 이때에 이 새 섬유는 "나이론"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습한 성질이 없고, 좀 더 가벼운 "폴리에스터" 섬유를 선호하게되어 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국제무역을 해본 역사가 없었고, 이로 인한 국제시장에서의 신용과 무역업의 경험과 그 조직적 활동이 없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전적으로 일본 사람들의 국제상사들에게 의존하며 모든 원사를 일본에서 수입하는 현실이었다. 일본은 그들이 우리를 36간 착취해간 댓가로 많은 금액의 자금을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이미 한국정부에 지불한 입장이었고, 또 차관이란 형태로 신용보증 및 산업화의 자금을 빌려주고 있었다.

일본상사들이 자기네 본전을 되찾을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등한시 할 리가 없었다. "이또쯔(c. Itoh & Co.)"는 한국시장에서 "포리에스타"원사의 생산업체인 "帝人브랜드, 즉 테이진"의 판매상이었다. 일본은 당시에 생산업체와 판매업체의 역활이 엄격히 구별되어 있었다. 생산업체인 "帝人"은 명치유신 이후 귀족계급의 것이고, 무역업자는 오사카의 상인들의 것으로써 일반계급들이 하는 사업이었다. 따라서 원사 생산업체는 무역업자인 "이또쯔"를 통하여서만 무역이 성사됐었다. 세계의 문물이 의식주 문제에서 자동차나 전자제품으로 그 산업상 중요성이 바뀌면서 지금은 "토요다" 나 "소니"가 세계적 기업으로 판을 치고 있지만, 1960년대는 섬유회사가 굴지의 기업으로 날리던 시절이었다.

최 사장은 한국에 나와 있는 지사를 통하여서는 이 절호의 찬스에 필요한 원사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남대문 시장 입구 4층 건물의 한 사무실에 오파상을 차려놓고 "도요멩까" 의 "벤베르쿠" 원사 (Rayon 계통:나무를 '세루로이드'의 용액으로 바꿔서 만든)를 중개알선하던 "독고 선"이란 옛 연희전문 시절에 농구선수로 날렸던 분이 있었다. 수원 평동의 어떻게 보면 촌사람이 일본으로 무작정 상경을 하려하면 무슨 의지할 사람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 '오파商' 독고씨를 대동하고 일본 오사카의 어느 식당에서 "이또쯔" 본사의 평직원과 상담이 시작되었다. 얘기가 시작되자 마자, 최사장은 이 사람 하고는 얘기가 않되겠다는 것을 알았다. 객지에서 비용만 처들이는 처지에 큰 성과가 재빠리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 자기가 원하는 다량의 원사를 구입하려면 결정권을 쥐고 있는 최고 상급자에게 직접 통하는 것이 가장 빨른 길이라고 판단됐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최 사장은 갑자기 요리점의 탁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면서, 안주머니에서 거액의 현찰을 꺼내서 상위로 내쳤다. 그리고, 큰소리로 이렇게 소리질렀다. 워낙 세게 상을 쳤으니, 그 소리가 굉장했다. 그 곳에서 식사를 하던 손님들이 너무나 놀라서 두리번거리는 그들을 향하여,

"여봐! 주인...! 시끄러워서 도저히 얘기를 나눌 수 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당장 다 내쫒으시오!"

문론 일본 말로다. 이 광경을 앞에서 목격한 그 본사의 평사원이 너무나 놀란 남어지 상담을 중단하고 허겁지겁 본사로 달아났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난 일을 상사에게 고해 받쳤다.

그 다음날 "부쪼"가 호텔방으로 찾아와서 "대접이 소홀했음"을 정중히 사과하고, 최 사장 일행을 자기네 본사로 안내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선경은 무역회사로 변신할 수 있었고, 깔깔이 천으로 횡재를 하면서 5-16 군사혁명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추구할 때 그 바람을 탈 수 있는 재력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훌륭한 일을 성취하면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최종건이란 사람이 하늘의 운을 바라고 가만히 있었었는가? 그가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그 현장에서 과감하게 도전한 적극적 사고방식과 어려운 상황에서 기발한 착상으로 일을 꾸며 나갔던 그의 기개를 나는 높이 평가한다

내가 한때 가까이서 모셨던 최종건 회장의 출생년도와 사망한 해를 다시 확인하려고 오늘 인테넽에서 이것 저것 뒤지던 길에 아래의 글이 발견되어 여기에 삽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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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계 CEO(최고경영자) 가운데 강한 추진력과 남다른 승부 근성 때문에 ‘불도저’라 불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 불도저라는 애칭은 최 창업주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의리파, 불같은 추진력, 강한 뚝심’은 최 창업주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비’ 같은 성격에 ‘조조’의 꾀도 많았다.

이런 점을 잘 드러낸 에피소드 하나.1966년 선경직물은 차관 도입 문제로 일본 정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중소기업에 불과한 선경직물의 상환 능력을 의심하며 차관 제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싶었던 최 창업주는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을 단골 술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가 술집 마담에게 거짓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하라는 것. 술집 마담은 때가 되자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말을 건넸다.

최 창업주는 일본 관계자 앞에서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 나가겠다.”고 밝힌 뒤 2시간 가량 단잠을 자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거, 죄송합니다. 저 위에 좀 다녀 오느라 늦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 관계자들은 최 창업주가 정부 최고위층의 부름을 받고 나간 것으로 모두 오해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선경직물이 정부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구나.’를 암시하며, 차관 도입 문제를 깨끗히 해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참고:

1) 일본 본사의 原絲 담당 "부쪼"(部長)는 그 상활동의 모든 재량권을 한 손에 쥐고있는 아주 강력한 자리다.

2) 독고 선씨는 훗날 선경이 대기업이 됐을때 무역담당 상무로 발탁되었고, 내가 그 밑에서 한동안 그의 총애를 받았었다.

3) SK Group은 선경산업, 선경종합상사, 선경-테이진 합섬, 선경 아세테이트, "워커 힐", 나중에는 "유공을 인수하여 원유의 수입과 시판, 선경해운, SK Telecome, 기타 많은 방계회사를 소유한 재벌임.

4) 崔鐘建(최종건)회장은 폐암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1926-1973년, 향후 48세), 그의 동생되는 崔鐘賢(최종현)회장은 68세로 早卒하고(1929년~ 1998년), 그의 아들 崔泰源(최태원)이 기업을 계승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빼돌리다가 4년 징역을 언도받고 복역 중에 2년하고 몇개원 만에 박근혜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서 지난 달 국회 청문회에 나타났던 인물임.

禪涅槃

2017-02-23 07:29:50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zenilvana [ 2017-02-23 13:05:02 ] 

안내 광고판이 따로 있으니 그리로 옮겨주시오.

이 사람이 이처럼 철따구니가 없는 줄 몰랐네.

1   dakshang [ 2017-02-23 12:13:00 ]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공순이 공돌이라 불렀지요. 내 친구의 미제 부품을 열당에도 한번 올린 적 있습니다 만, 그 친구 그 부품 구매자를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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