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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재용, 홍라희, 홍진기 또 이병철
작성자 zenilvana

이재용(李在鎔, 1968년 6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의 아들로, 2017년 현재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1968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경기초등학교, 청운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게이오기주쿠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을 졸업하였다. 1998년 6월에 대상그룹 명예회장 임창욱의 장녀 임세령과 결혼하였고 임세령과의 사이에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을 두었다. 임세령이 2009년 2월 12일에 '소송이혼' 절차를 밟았으나 이후 이 소송을 취하하고 2009년 2월 18일 조정이혼으로 이혼이 완료되면서 '합의이혼'으로 마무리되었다.

1992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2001년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DBA) 과정을 수료했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를 하였고 10년 뒤인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승진했고 2년 뒤인 2003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로 승진을 했으며 4년 뒤인 2007년 전무로 승진하면서 경영진으로 편입하였다. 대한민국 내에서 벤처 사업 창업이 활발하던 1990년대 말 재벌 3세로서 인터넷 사업 분야를 통해 처음으로 전면에 나섰었고 2000년 'e삼성'을 이끌었지만 실패한 바 있다.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2001년), 삼성이건희회장장학재단 이사(2002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2003년), S-LCD 등기이사(2004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전무(2007년), 삼성전자 부사장 겸 최고 운영 책임자(2009년), 삼성전자 사장(2010년), 삼성전자 부회장(2012년) 등 여러 보직을 거쳤다.

2017년 1월 12일에 이재용을 1차 소환조사하여 1월 16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재용에 대해 구속 영장을 청구하였는데, 이규철 특검보는 브리핑에서 "금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하여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 위반 횡령, 국회에서의 위증 혐의로 구속 영장을 청구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18] [19] [9] 2017년 1월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 전담 부장판사 조의연은 이재용 구속 영장 청구에 대해 영장실질심사를 하였고 2017년 1월 19일 기각 결정을 내렸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2017년 2월 13일 2차 소환 조사한 후 구속 영장을 재청구하였다. 2017년 2월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 전담 판사 한정석은 이재용 구속 영장 청구에 대해 영장실질심사를 하였고 2017년 2월 17일 구속 영장을 발부하여 구속 중이다.

이재용의 어머니는 홍라희(洪羅喜)다. 이재용의 할아버지가 되는 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는 일제 강점기에 판사를 지낸 분이다. 우리나라 최고 재벌인 삼성그룹 역시 친일파 후손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홍진기는 그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총독부 고등문관을 지냈다.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의 후손들은 “일제시대 판사직을 맡은 것만으로 친일파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은 다르다. “일제 때 사법부 관리로 임명받기 위해 노력한 행위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된다”고

죽산 조봉암 선생을 처형한 장본인. 홍진기 일생 중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이승만 독재정부 때다. 1954년 법무부 차관을 거쳐 이듬해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국가보안법 파동’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키도 했다. 3·15 부정선거는 그에게 대통령 신임을 얻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줬다. 홍진기는 부정선거를 수습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내무장관에 선임됐다. 정권에 반발하는 시민은 모조리 잡아들였다. 부정선거에 불만을 품기만 해도 ‘빨갱이’로 몰아 있지도 않은 죄를 물었으며, 4·19 혁명 땐 내무장관으로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발포를 지시하기도 했다. 그의 말 한마디로 당시 수도권에서만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홍진기는 항일운동가 죽산 조봉암 선생을 처형하는 데 두 팔을 걷고 도왔다.

“이(승만)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죽산 조봉암은 이 같은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작된 간첩혐의 유죄판결에 대한 재심청구 바로 다음 날이었다.

죽산 조봉암은 일제치하 때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으로 7년 간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 헌법제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대학시절 죽산 조봉암 선생 자택을 방문했을 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산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준다. 악수 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

물론 죽산 조봉암 선생 처형은 그에게 위협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이중간첩 혐의를 조작해 ‘정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죽산의 처형을 행동에 옮긴 주역은 바로 홍진기 당시 법무장관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홍진기가 처형 명령에 서명한 다음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군사법정서 사형선고를 받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홍진기 또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60년 5월, 5·16 쿠데타 이후 설치된 군사법정은 홍진기에게 1심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살아날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던 홍진기에게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그에게 ‘동아줄’이 돼준 사람은 다름 아닌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였다.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고 이병철 회장이 홍진기 타계를 기리며 쓴 조사에도 잘 나와 있다.

“당신(홍진기)은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 온 같은 임원이요, 사업의 반려자였고, 가정적으론 나의 사돈이었다”며 슬픔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도움을 받은 홍진기는 1961년 12월 혁명재판소 상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196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재판기간 중 실제 복역한 건 고작 9개월에 불과했다.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홍진기는 이병철의 후원을 받아 1965년 동양방송 사장을 시작으로 1986년에 사망할 때까지 중앙일보 종신사장으로 있었다. 홍진기의 운은 사망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의 호를 딴 학교가 생긴 것이다.

서울대는 2003년 새로 단장한 법학동 로비를 홍진기 호를 따 ‘유민홀’이라 불렀다. 이를 두고 항간엔 그의 공을 기리고 본받으라는 의미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 건물을 기부한 사람이 홍진기의 아들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홍진기는 김윤남과의 사이에서 모두 4남2녀를 두었다.

자식으로는 장녀 홍라희 여사(이건희 전 삼성 회장 아내,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비롯해 장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전 주미 대사) 차남 홍석조 보광훼미리마트 회장(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삼남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 사남 홍석규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회장), 차녀 홍라영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 등이 있다. -인터넽에서 research 한 결과-

禪涅槃

2017-02-23 12:43:32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3   zenilvana [ 2017-02-23 15:44:12 ] 

이병철이란 사람은 나긴 난 사람이다. 군사정권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홍진기를 무기징역으로 바꿨고, 또다시 사면을 받게한 배경에 무엇이 작용했다고 보시오?

당연히 돈이지요. 당시에 군출신들은 배가 고팠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또한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혁명공약을 실천하기에는 자본이 딸렸지 않았겠오. 내 짐작에는 이병철씨가 거금을 쾌척해서 홍진기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로 하여금 평생의 은인으로 써먹을 계산이 섰던 거로 봐야 합네다.

군사정권에 이왕 선을 댈 작정이면 이런 구실로 돈을 뿌렸을 것은 명약관화였을 짓이고, 그 후에 정경유착을 나가면 그보다 더 배의 돈이 굴러 들어올텐데 왜 망설였겠오. 정치나 기업이나 이같은 大眼(대안)으로 앞을 내다봐야 하는데...쫌씨들이 한다는 수작이 바로 눈앞에 잔꾀에 전전긍긍하니 한국이 뭐 잘 풀리겠어요?

2   zenilvana [ 2017-02-23 15:28:16 ] 

일본치하에서 똑똑한 판사로 부역했다 해도, 이승만 정권시에 법무장관으로 조봉암씨를 사형언도를 상소한 바로 그 다음 날에 처형했다는 사실은 그의 인간성을 엿보는 기회가 아닌가?

물론 이승만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고 칩시다. 왜놈들의 앞잡이로 뭐하는 자리입니까? 독립투사를 잡아 족치고 죽이던 그런 일을 한 사람이외다.

1960년 3월 18일 마산사건으로 최인규가 사임하고 나서 4-19학생의거 시에 학생을 포함한 민간인 200여명을 살상한 내무부 장관이 바로 홍진기였오. 나도 그 날 아침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상대학생들 대열에 섰었읍니다. 우리들 앞으로 중앙대, 단국대 학생들이 뛰어서 경무대로 향했던 잠시 후에 시체로 변해서 돌아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다.

그런데 홍진기는 어쩐 이유인지 심판대에 서질 않고 대신에 최인규가 사형언도를 받았읍니다. 내가 "법창의 봄"이란 궈아무개 판사가 남긴 책에서 최인규와 조봉암이 형장으로 끌러가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읍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장은 양쪽이 돌벽으로 막혀져 있는 긴 골목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한국 독립열사들이 처형되던 바로 그 곳이오. 지금은 폐쇠된 걸로 압니다만.

사형언도를 받은 수인은 감방을 자주 옮기다가 이 골목길을 들어서면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발악을 하던가, 아니면 순순히 그 길로 들어서던가. 최인규가 앞의 예였고, 조봉암씨는 후자였다고 쓰여있오.

그가 그 길로 접어들자 몇 발자국을 걷다가 담벽에 피어있는 달개비꽃을 즈윽히 감상했다고. 그리고는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쳤읍니다.

살인자는 아귀비환에 빠지고, 조국의 광복을 위했던 사람은 초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읍니다. 참으로 감명깊은 일화라서 나는 가끔씩 그 장면을 상상하곤 했읍니다

1   bibliatell [ 2017-02-23 14:34:24 ] 

역시, 대단한 가문이군요. 물론 뿌리는. 저도 엄청나게 친일을 한 가문의 후손인데,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친일 가문인 것이 너무너무 싫고 후회스러워 COMING OUT한 유일한 반항아요 가문의 왕따인 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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