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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회장 애인 曰 비서님을 잘 말해준다고
작성자 zenilvana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된지 얼마 않된 때의 일이었다. 1971년 6월의 어느날 나는 "링컨 컨티넨탈"의 앞좌석에 앉아서 서울의 시가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남산 중턱의 어느 길가였는데, 차안에 앉아서 서울의 시가지를 내려다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 곳이 어느 쯤인지 얼른 짐작이 않가는 그런 데서 기다렸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났다. 한 20여분이 조이 됐는데도 차안에 탄 분은 전혀 기척이 없이 그냥 기다리고만 계셨었다.

드디어 누군가가 문을 열더니 급하게 내 뒷자리로 들어와 앉았다. 최종건 회장님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했는데 워낙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차가 발동을 걸더니 스르르 미끄러지며 남산을 내려와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서 경부고속도로의 입구라는 데에 잠간 멈추었다. 그리고는 텅빈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요즘 사람들은 텅빈 경부고속도로라면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 되겠지만, 당시에 막 개통된 고속도로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끔 도로수리차든가 트럭이 지나갈 뿐, 민간 승용차는 전 구간을 통하여 손꼽을 정도였다. 우리는 지금 부산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고속도로 여행이라 도로 옆에 전개되는 풍경도 새삼스러웠지만 뒷자석에 누가 타고 있는가가 더욱 궁금했었다.

그냥 돌아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였지만, 내가 한 대기업의 회장비서라는 자가 경솔하게 뒤를 힐끔거리는 것이 할 짓이 아닌것 같아서 참고 기다렸다. 두어 시간이 지나서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게 되면서 비로서 뒤에 탄 사람이 누군가를 알게 되었다. 20대 중반의 묘령의 아가씨였다. 아주 예쁘게 생긴..... 후에 안 사실이지만, 한양대학교 영화연극과 출신이라고 했다.

우리들 모두가 짜장면을 주문했다. 식사를 끝내자 회장께서 듬뿍이 팁 놓는 것을 잊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 왼쪽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회장의 출장비 중에서 잔금을 꺼내 치뤘다. 참고로 나의 여행경비는 오른쪽에 깊이 넣어놓고 있었다. 그날 아침 경리부에서 회장의 경비와 나, 비서의 출장비를 각각 별도로 받아 냈었던 차제여서 돌아올 때 얼마를 남겨서 처자식과 부모님에게 소고기의 반근이라도 사가기를 바랬던 것이다. 놀라웠던 것은 여행 후에 세어본 그 비밀스러운 내 출장비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회장님은 용케도 얼마를 써야 하는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차차 알게 되었지만, 돈계산에 아주 밝으신 분이었다.

다시 고속도로를 들어서서 또 달렸다. 큰 차지만 워낙 속력을 내다 보니 차가 흔들렸다. 한국에는 한대 밖에 없는 차라고 했다. 타이어를 일부러 수입해야 할 그런 미제 자동차였다. 내가 속도계를 곁눈질 하여보니 시속이 100마일 (160km)을 넘고 있었다. 뒷자석에 누워 있는 듯한 회장님의 목소리가 간간히 속력을 낮추라고 명령했다. 운전해 본 사람은 이 운전사의 기분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새 차에다가 그 이름난 "링컨..."을 몰고 지금 아무 거리낌없는 텅빈 대로를 달리고 있다. 한번 신나게 마음내키는 대로 속력을 내보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렸을 것이다. 침묵이 계속되었지만 나의 모든 신경은 뒷자석에 줄곧 몰려가 있는 가운데, 드디어 동래관광호텔에 도착하게 되었다. 자기네들은 옛날 동래의 관아 같이 보이는 큰 개와집 건물로 들어갔고, 우리는 3층인가 4층의 신관에 방을 정해서 여장을 풀었다.

식사 후에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방을 서성거리는데, 전화가 울려왔다. 운전사가 말없이 내게 전화기를 안겼다. 회장님이 나를 부르는가 하고 전화를 받으니까, 아까 그 여성이 나보고 하는 말이 "지금 회장님께서 동양합섬의 '이양구'라던가 하는 그 회사 회장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출타 중인데, 우리 동래에 있는 디스코에 가서 춤이나 추자"는 것이었다.

우리 회장님은 동양합섬 회장의 "벤쯔”로 옮겨 타시고 좀 전에 어디로 가셨고 우리들만 막 돌아왔던 차였다. 회장의 애인인 것 같은 젊은 여성 하고라...? 실은 나도 갓 31살의 젊은 나이였을 때였으니, 미모의 젊은 여성하고 춤을 춘다는 것이 결코 싫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 망정에 쾌히 승락하고, 그 "링컨 컨티넨탈"을 다시 타고 어디로인가 가로등 조차 없는 시골길을 한동안 출렁거렸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녀로선 이미 와보았던 '디스코 텍'이였던 것 같았다.

춤은 잘 못 추었지만 그래도 호주 현지 여성들과 어울리며 외로움을 달랬었던 실력(?)도 있고 해서, 그 녀를 붙잡았다 놨다 하며 신나게 놀았다. 비서는 회장을 측근에서 섬기는 직책이니 그가 애끼는 사람도 깍듯이 알아 모셔야 함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녀가 나의 외국물 먹은 춤 실력에 만족했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참 열기가 올라가는 즈음에 그 녀가 내 가슴에 안겨 오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회장님한테 이 비서님에 대하여 잘 말해주겠다"

이 무슨 해괘한 말인고...? 첫 눈에 반했다는 것인지... 하여간에 그 말이 인상적으로 들려왔고, 지금도 각별히 그 때의 그 녀의 달콤한 말을 기억한다.

내가 그 다음 해 미국으로 이민을 결행하고, 뉴저지에 정착하던 무작정 시절에 자동차가 당연히 필요했었다. 마침 뉴욕지사장으로 부터 전에 선경의 수입과에 근무하던 이 아무개 대리가 중부 뉴저지에 산다는 말을 듣고, 안부도 물을 겸 전화하던 중에, 그가 1962년도 즉 10년전 모델인 '크라이슬러 뉴퐅'이란 고물차가 놀고 있다고 해서 $120불로 낙착을 지었다. 허나 그 시골, 요새 말로 the suburb 를 찾아갈 교통수단이 없는 거라. 전화번호책을 뒤져서 뻐쓰노선을 꿰어맞추어 천신만고 끝에 겨우 그 집에 도착해 하룻 밤을 자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러 모인 자리에 어떤 아릿다운 여인이 식탁에 나타나는 것라. 눈을 싰고 보니, 바로 회장님의 애인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녀도 놀랬고 나도 놀랬다. 자기가 전날밤 늦게 오느라고 같은 지붕 아래서 내가 잤었는 것을 몰랐다고...? "후회 한다"는 말을 거듭 되풀이 했다. 설혹 만났으면 어쩌자는 거였는데? Don't ask me, b'cause I do not know.

하여간 집주인이 그 녀의 오빠 된다는 짐작이 겨우 내 머리를 스쳐갔다. 최 회장께서 얼마전에 미국으로 오셨다 가셨다는 것을 그 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를 만나보려 했었겠지. 미국까지 찾아와서 그 녀를 만나야 하는 연인의 관계였던 모양이었다. 그 다음 해 가을(1973년 11월)에 폐암으로 당년 48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냥반이 나를 아껴서 직물연합회가 뉴욕에 사무실을 차릴 예정이니 한국엘 다시 나오라는 메쎄지를 국제통화에 남겼다. 그 대화내용을 녹음했었고 그의 큰 아들인 최윤원(1950-2000 폐암과 후두암으로)에게 건네주었다. (참고: 최종현씨도 폐암으로 68세에 타계했음) 최회장은 자기가 데리고 있던 부하들을 끝까지 잘 배려해주는 '오야붕'(두목)의 의리가 있다는 말을 전에 회사 다닐 적에 들은 바가 있었다. 역시...나에게도 그런 인간미를 보여주었던 거라. 결국 早猝(조졸)하는 바람에 현실화 되지는 않았다.

내가 비서란 것을 할 적에는 여럿 퇴기(退技)들, 그래야 30세를 넘을까 말까하는 미녀들이 회장님을 가끔 찾아왔다. "회장님 계세요?"라고 하면 나는 즉시 본인의 방문을 열고 "회장님을 만나자는 여인이 와있다"고 전하면, "들어오라고 해!"...무슨 일을 하려는가 궁금했었는데, 알고보니 '돈을 빌리려 오던가', 아니며 갚으로 오는 모양이었다.

회장님에게는 푼돈이었겠지. 이 냥반이 가끔 자기의 저금통장을 내게 들려서 한국은행 본점 건너편에 위치한 제일은행(요즘은 신세계 백화점)에 가서 입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얼마나 많은 돈이 있을 것 같오? 내가 0을 한참 세어봐야 하는 수억의 돈이 예치되어 있었다. 무슨 돈을 그래 저금하는가? 한번 입금이 수천만원... 당시에 내 월급은 수십만원...그 돈으로 생활이 않됐었다.

당대의 세력가들과 놀음을, 그것이 짚고 땡인지, 나이롱 뽕인지, 아니면 cards 놀음인지... 내 아는 바가 없으나, 하여간에 그 판에서 돈을 따면 내가 비서로서 할 일이 생기는 거라. 그들의 세계는 우리 저소득 층에게는 상상을 불허합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월급이 부족해서 이민을 했어야 했다.

나중에 들으니, 회장님께서 그 '묘령의 연인'에게 명동 입구에 '선경 센타'라는 고급 옷감가개를 차려 주었었는데, 회장의 사후에 부인과 형제들이 이를 알고 뺐어 버렸다는 소식을 풍문에 들었다.

禪涅槃

2017-02-24 07:19:43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zenilvana [ 2017-02-24 10:01:54 ] 

어째서 억대의 저금통장을 나이롱뽕에 쓰는가? 당연히 정경유착의 놀음이다. 표가 날 수가 없지비.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러한 통장을 지니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구태어 최태민이나 최순실의 수고가 필요하지 않지를.

돈을 잃어주고 나중에 특혜를 받으면 되는데 어째서 삼성의 이재용이가 필요하냐구?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이런 짓거리를 하다가 덜미가 잡혀서 온 나라가 깽판이 나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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