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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5: 政經(정경)유착의 길목에 서서
작성자 zenilvana

박정희 장군이 5-16 혁명 거사를 성공시키고 대통령의 자리에 않았을 때에, 처음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 받은 분이 이동원(李東元, 1926년~2006년)씨였다.(참고 1)

최종건 회장님은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생 최종현씨를 만나려고 미국에 처음 여행한 이야기를 내게 잠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위스콘신 대학교 B.A.를 하고 시카고 대학교 M.A.과정을 수료한 것으로 인터넽 프로필에 소개되어 있다. 내가 입사했을 때 들은 얘기로는 서울농대에서 농화학을 전공하다가 미국유학 했다고 들었다. 경영학 과정을 M.B.A.라고 표기하는데 그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여튼 그의 동생들 셋중에서 가장 공부 잘했던 사람이라서 최회장이 선경직물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하여 특별히 뒷바라지를 했던 것 같다.

최종건씨는 동트는 새 시대에서는 별 볼일 없었던 존재였다. 한국에 직물공장이 그것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당시에 내노라하는 큰 기업들이 기라성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시골의 한 기업인이 새 혁명세력에 줄이 닿아서 급기야는 한국의 10대 재벌기업의 하나로 부상했는가? 그의 비서로서 듣고 또 측근에서 경험한 것이 있어서 다음의 얘기를 세상에 내어놓는다.

이외무부 장관이 1962년께에 부산 동래 관광호텔에 투숙해서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었다고. 동래 관광호텔을 항간에서 처주던 시절이었다. 이장관이 투숙하던 방문 앞에 화환과 함께 값진 특산물이 몇일 째 배달되었다. "수원 평동 선경직물의 최종건"이란 명함이 걸려 있었다. 이장관은 군사정권이 불러서 귀국한지가 얼마 않됐던 시절이라, 이런 한국식 대접(?)을 외국물을 먹던 선비의 양심으로는 거북한 짓거리로 여겼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가, 일변 호기심이 않가는 것은 아니었다. 몇일 후에 그 미지의 사람이 인사를 드리겠다고 찾아 왔다.

"제가 최종건입니다. 이렇게 외진데 오셔서 불편하신 일은 없으십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래서는 않된다는 것을 아실 분 같지만서도...선생께서 염려해 주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어찌 모르겠읍니까? 미국에 유학 중인 제 동생이 장관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림이 좋겠다고 해서 실례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그 동생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잘 모르시겠지만서도...최종현이라고 합니다. 장관님의 이름을 제게 얘기하면서, 한국이 이제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자리에서 이장관님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고 제게 말했읍니다”

"그래요?"

이장관은 침묵에 잠기다가,

"저에게 과분한 성의를 베풀어 주신데 대하여 인사가 늦었읍니다만...,
혹시, 제게 무슨 부탁할 일이라도 있어서 인지요?

최 사장은 때를 놓칠세라, "실은 새로운 국가건설로 나가는 마당에서 저도 뭔 가를 공헌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 길을 찾고 있읍니다. 시골에서 직물이나 짜는 사람으로서 막막한 처지였는데, 동생의 말로는 장관님께서 어떤 도움을 주실 수가 않을거라고 해서요. 이렇게...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외무부장관이오. 외무부 계통의 사람이 경제계에 누구를 알겠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

"무슨 사업을 하신다고요?"

"저는 직물공장을 운영하고 있읍니다."

"분명히 내 분야가 아니구먼. 가만있자..., 그 방면에 내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야 할 사안이구먼. 그런데 언론인인데 괜찮을런지요. 조선일보의 방우영사장이라고. 혹시 그런 이름 들어보신 적이 있읍니까?

저야, 수원에서... 그저.

그 사람한테 한번 가보시오. 그 사람이 활량이라서 발이 넓으니 아마도 최사장이 알고 싶어하는 길을 가르쳐 들일 수도 있을것 같소."

정치학으로 박사를 받은 사람답게 그는 최사장에게 바른 길을 제시했다. 문론 이장관의 소개장이라 할까 명함을 들고 방 회장을 만나게 됐을 것이고, 거기서 방 회장한테 한 기업인으로서 새 혁명운동에 일역을 담당하고 싶다고 역설했는지 아니 했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고...그는 언론인으로서 보다는 고급요정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으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라는 자서전을 남길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밤의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그가 2016년 5월 8일에 88세로 사망하자 이명박이를 위시하여 정계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그의 빈소에 나타났다고. 그는 이후락이란 술 친구와 지금 신나게 새 물결을 타고 밤과 낮으로 재계를 주무르던 터였다. 이후락씨(참고 2)는 군의 정보장교였다. 박정희 대통은 군사정권이 우선 다루어야 할 사안이 언론통제였던 지라 박정희 대통은 그를 그 방면에 기용했다.

최종건 역시 수원에서 힘깨나 쓰던 호걸이었던지라 방우영회장의 생리에서 첫눈에 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후락 역시 뒤질세라 방회장과 주거니 받거니 술과 여자, 그리고 금력이 오가던 시절이라서. 호걸은 호걸을 알아본다 할까...술좌석에 관한한 최 사장도 남 못지 않게 한가락 하던 사람이었다.

최 사장은 이후락 씨를 한번 수원으로 초대해서 술판을 벌리 적이 있었다 하더군. 두 분이 돼지다리 한짝씩을 뜯었다고.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만, 내 상상으로 새끼돼지나, 좀 컸다면 중퇴지가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후락씨를 형님으로 호칭하는 관계에 까지 진전힌 것을 옆에서 볼 수 있었다. 나이로 치면 이후락은 1924년생, 최종건 1926년생, 그리고 방우영은 1928년 생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칩거하던 시절에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다.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 고물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후락 씨가 얼마나 많은 떡고물을 만졌는지 모른다. 우리 회장께서 청평 호수에 별장을 지어놓고 거기에 살림을 들여놓는 과정에서 그와 "모타 보트" 를 타고 거기를 들락거린 적이 몇번 있었다. 그 별장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았다만 '형님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 후에도 이후락씨의 일본 girl friends들을 김포 귀빈실로 안내하는 일을 최회장이 처리했고, 그를 따라가서 비서가 할 일이 이런 거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 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최회장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너는 퇴근 후에 뭐 하냐?"

"저는 주한미군의 AFKN 영어방송을 들으며 잠에 듭니다."

"영어 잘 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냐. 일본말도 잘해야 한다."

"지금 세상이 그렇지가 않어."

"네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인데 내가 이게 뭐냐?"

그녀들을 도규호텔이라고... 남대문 곁 남산길 오르막에 새로 지은 호텔로 안내하고 이후락 형님에게 경과를 보고하시더군. 내가 예전에 대화했던 그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박 대통령이 졸지에 타계하면서, 그 분 앞으로 숨겨논 재산이 없었다고 항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 최순실과 박근혜, 그리고 이재용 삼성부회장 사건에서 실은 박정희대통이 무기거래와 경제건설에서 생긴 떡고물을 스위스 비밀구좌에 예치하였던 것이 들통나게 되었다. 물론 당시에 거물급들도 그 같은 경로로 스위스를 들락거렸다고 하더군.

그 엄청난 돈을 최태민이가 관리하다가 최순실에게 넘어간 것을 박근헤 대통이 자주 확인 내지 키우는 과정에 간여했다고 해서 온 나라가 촛불과 태극기로 뒤덮여 있다.

이후락씨가 얼마나 많은 떡고물을 만졌는가? 나는 모른다. 우리 회장께서 청평 호숫가에 큰 별장 하나를 지어놓고 거기에 살림을 들여놓는 과정에서 그와 "모타 보트" 를 타고 거기를 들락거린 적이 몇번 있었다. 그 별장이 누구의 것이였는지 짐작은 가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모타 보트" 안에 나를 앉혀 놓고 얼음알 같은 호수 면을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희열을 만끽하는 그의 얼굴을 쭈구리고 앉아서 올려다 봤었다. 물 위로 그의 머리카락은 휘날렸고 그의 볼이 뒤로 주름잡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아! 사람이 행복의 극치에 이르게 되면 저런 얼굴을 할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참고 1:

연희전문학교 정경학과에서 수학하고, 미국 리오그란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52년 미국 켄트주립대학 대학원 석사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다가 영국으로 가서 1958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박정희정권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 주 태국 대사 1964년 외무부 장관, 주 스위스 대사, 국회외무위원장, 1964년에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의 차관을 차입하는 조건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묻어두기로 한다. 1965년 12월 18일 상오 10시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 교환에 이동원 외무장관은 수석전권대표로서 참석했다.


참고 2:

이후락이로 말하면 2009년에 86세에 사망해서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는데 생전애 제갈조조(諸葛曹操)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처세에 관한한 제갈공명과 조조의 재능을 겸비했던 인물이었다. 내가 일직근무를 하다가 그와 일문일답을 한 적이 있었다.

최회장과는 가까운 관계였고, 정치자금을 거두는 일에 일조를 아끼지 않았다. . 그의 비서로써 "공군사관학교 헌충기념탑 건설"의 기금에 재벌 총수들의 "一金 얼마"의 약속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그리고 연말연시에 각계 요로에 비단포기 선물을 돌렸다. 그 안에 수표가 담겼었는지, 얼마 짜리였는지는 나는 모른다. 회장과 내가 장안의 이름난 비단장사에서 쇼핑을 했지만 마지막에 포장하는 일은 최회장 혼자서 했기 때문이다.

禪涅槃

2017-02-25 08:10:26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sangha1 [ 2017-02-26 10:53:22 ] 

정경유착이 없는 나라...정권이 있다믄...나손에 장을 지지리다....
역사책을 읽어봐도 정겡유착은 선사시대때 부탕 있었다여
촌시릅게 생뚱막게 어린척흐시나....

1   zenilvana [ 2017-02-25 14:16:18 ] 

열린마당이 개판인 것을 오래 전에 알았다만, 오늘도 댓글을 잘 써놨는데 막상 올리니까 "잘못된 접근"이라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 할 것이라면 미리 경고를 해서 다시 입력절차를 요구하던지, 최소한도 써놓은 글을 copy할 수 있게 하던지, 글쓰는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푸로그램을 지금까지 수정하지 않고 있다. 알렉스슨상이 수차례 언급했듯이 가장 후지고 잘못된 열린마당을 운영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블로그는 영상과 소리까지 필자들이 사용하도록 해온지가 벌써 여러해에 이른다. 벌써 수차례 이런 대우를 받다가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오르는군. 그리고 한주에 한두번씩 입력이 않되고 있는 정도의 기술상의 문제도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나뿐만이 아닐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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