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父系社會(부계사회)와 母系社會(모계사회)로 구분된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은 모계사회로 시작해서 부계사회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식량을 공급받는 수단에 있어서 사냥보다는 농작물의 생산이 더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원시시절에는 남자는 들로 산으로 동물의 잡으러 다녔고 집에 남아서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는 근처의 식물의 열매를 거두면서 식량을 마련하였다. 수렵이란 위험한 것이라서 남자가 죽기가 십상이었던 고로 그 가정의 연속성을 유지하자면 자연 여성이 식생활 및 자손 번식의 주된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수만년 전에 Fertile Crescent(참고 1)라고, 오늘 날의 에집트, 이스라엘, 시리아, 이락, 터키 그리고 이란 등등의 지역에서 밀, 보리, 등속의 풀科(과)의 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인류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이스라엘 '여리고 城'에서 (Jericho)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그 곡물창고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인도의 인더스와 간지스강 유역과 중국의 황하유역도 이에 해당한다.
소규모로 시작한 여자들의 일이 남자들이 본격적으로 농삿일에 전념하면서 영양공급이 좋아졌음으로 인구증가를 경험했고, 그로써 남자들이 사회질서를 요구해서 자식들의 계보를 남자의 이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에도 중국의 남-동쪽인 티베트 접경지역에는 아직도 어머니 중심의 가족관계가 남아 있고, 인도에도 남-동쪽 Kerala 지역이 이런 가족형태을 유지해왔다고 한다. (참고2)
이처럼 남자 위주의 사회 내지 경제구조에서 여자들이 남자에게 의존하는 위치로 바뀌면서 과부가 탈락되는 내력의 역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예를 몇가지 추적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舊約(구약)의 '룻記(Ruth)'가 대략 기원 전 1100여년경의 얘기였으니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과부의 기록이 아닌가 한다.
얘기인 즉슨, '나오미'라는 여자가 '베들레헴'에서 남편인 '엘리메렉' (Elimelech)과 살았는데, 흉년이 들자 死海(사해)동쪽의 땅인 '모압'지방으로 갔다. 거기서 남편을 잃고 아둘 둘 마저 죽자, 두 며누리들에게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서 再嫁(재가)하고 살거라고 일렀다고. 그 중의 한 며누리인 '오프라'(Orpah)는 제 갈길을 갔으나, 또 다른 며누리인 '룻'(Ruth)는 시어머니를 따라 '베드레헴'으로 돌아왔다고 한다.(Ruth 1:18)
며누리인 '룻'이 부자인 '보아즈'(Boaz)의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 척하면서 그를 꼬실 것을 청하자, 시어머니'나오미'가 허락하고 여차여차 해서 두 사람이 재미보다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의 이름이 '오벧'(Obed)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王(왕) '데이비드'(David)의 할아버지가 되었던 바였다.(Ruth 4:17)
한편, '이스람'의 창시자인 '모하멭'(<Muhammad or Mohammad, Mohammed, Arabic: محمد) (c. 26 April 570 – 8 June 632) was the founder of the religion of Islam>이 기원후 632년 이래로 당시의 세계를 제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戰死者(전사자)를 배출하였고, 동시에 과부와 고아들을 대량 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누구든지 재력이 있는 자는 4 명까지 부인을 둘 수가 있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단지 모든 것을, 심지어 잠자리를 포함해서, 동등하게 대우하여야 한다는 단서를 단단히 붙어놓았다고 한다.
과부들의 八字(팔자)에 이런 파격적인 조처가 있었던 시기가 한반도에서로 말하자면 신라(新羅:기원전 57년 ~ 후935년)가 羅-唐(나-당)연합군으로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시기였었다. 그 당시에 생긴 과부들을 어떻게 우리 민족이 처리했다는 기록을 내가 알지 못하나, 조선시대(1392 -1897년)에 들어와서는 과부를 오밤 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홋이불을 씌워서 업어가는 방법으로 改嫁(개가)시킨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방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럴 행운(?)조차 없었던 대부분이 장마당의 작부로 연명하던가, 남의 눈을 피하는 첩으로 살았던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과부라 하면 남정네들이 모두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습성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불쌍한 인간들을 이렇게 대우했어야만 했는가? 그들도 우리들의 어머니, 누이, 여동생, 사촌, 팔촌이 아니었던가? 이들이 어찌어찌해서 불행한 처지에 빠지게 됐었거늘, 과부를 재혼하지 못하게 했던 법이 조선땅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甲午更張(1차에 갑오경장, 혹은 2차에 갑오개혁)이란 것이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대대적인 사회제도의 혁신으로 여러가지 법령이 내려젔었다. 정치, 경제 및 군사문제에 대하여는 여기서 거론할 필요가 없고, 사회적으로 인재등용에서 부터 문벌과 신분타파(소위 양반-쌍놈), 문무관리 차별폐지, 연좌제 형벌폐지, 조혼 금지, 청상과부 재가허용, 公私奴卑(공사노비:노예제도)혁파, 의제 간소화 등등을 제도적으로 개혁하였다.
내게 특별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靑霜寡婦(청상과부)의 再嫁(개가)를 법적으로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불과 117년 전인, 서기 1895년에 말이다. 그 이전에는 과부가 다시 시집을 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우리들의 잘난 양반들, 조선사람들이 이런 짓을 했었다. 이게 야만인들의 작단이 아니면 무었이었던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구나.
참고:The Fertile Crescent (also known as the cradle of civilization) is a crescent-shaped region containing the comparatively moist and fertile land of otherwise arid and semi-arid Western Asia, the Nile Valley and Nile Delta.
In current usage, all definitions of the Fertile Crescent include Mesopotamia, the land in and around the Tigris and Euphrates rivers; and the Levant, the eastern coast of the Mediterranean Sea. The modern-day countries with significant territory within the Fertile Crescent are Iraq, Syria, Lebanon, Cyprus, Jordan, Israel, the State of Palestine, Egypt, as well as the southeastern fringe of Turkey and the western fringes of Iran.
The region saw the development of some of the earliest human civilizations, which flourished thanks to the water supplies and agricultural resources available in the Fertile Crescent. -Wikipedia
참고 2: 이곳에 예수의 12 제자 중에서 도마(Thomas)가 예수교를 전파하였고, 그 후예들이 전체인구에서 18%의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