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반 상놈은 제도적으로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조선땅에서 사라졌다. 위키백과에서는 이래 말하고 있다. 1894년 음력 6월 25일(양력 7월 27일)부터 1895년 8월까지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 운동을 말한다. 10년 전 갑신정변의 실패 후 망명했던 개화파들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위세를 업고 돌아와 추진한 일본식 개혁으로서 갑오경장(甲午更張)[1]이라고도 불렸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으로 세분하며, 이듬해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요 내용은 신분제(노비제)의 폐지, 은본위제, 조세의 금납 통일, 인신 매매 금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이다.
"수천년 동안 내려오든 양반상넘의 시스템"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이 차별제도는 이씨조선에서 시작된 것이고, 일반인들을 상넘으로 치지 않았다. 상넘이란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나던가 정치파동에서 그 신분으로 전락한 부류를 한정해서 불렀다.
원래 북한 주민들 특히 평안도나 함경도에는 소위 양반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關北(관북)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그쪽 사람들이 '대가 세어서' 왕조의 흥망에 결코 이롭지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로 남쪽 사람들이 양반 상놈에서 갑질을 해댔었다. 따라서 6-25민족 상잔까지 거론할 근거가 희박하다고 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