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과정을 지켜보면서 누적돼온 非理의 범위와 그 결과의 엄청남에 새삼 놀래는 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毒蛇들의 행태들.....훌륭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거창한 口號 뒤에 숨겨진 인간본능의 野慾, 바로 그것이었다.
국민이 주인인,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민주국가를 통치하는 위정자들이 法의 위에 올라서서 국민의 膏血을 빨아먹어 왔던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憲政을 위하여 오만가지 法을 마련해 놓고 멋대로 해석하고 아랑곳없이 적용하더군. 그들의 시녀들이 편을 갈라서 私利私慾을 위하여 시기, 질투, 거짓과 모함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積弊를 淸算하겠다고 나서는 dark horse들에게는 道德性이 있느냐는 것을 들고 나오는 作態들을 구경꺼리로 태극기를 휘두르는 골빈넘들을 어찌 보시는지. 국민을 대변한다는 넘들은 실상 僞裝轉入의 원흉으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것이 현 정당법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편이를 위하여 주소를 바꾼 것이 도덕성에 맞지 않는다고.
이승만의 건국 이래로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에 이르는 역대 정치인들이야말로 도덕성에 관한 한 결코 道德君子가 아니었다. 이들의 非道德性이 오늘의 비극을 초래했던 바다.
1960년 4-19 학생데모가 있을 시절에 나는 대학 초년생으로 서울법대 황산덕교수의 법철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法이 사회질서를 규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완벽한 것을 문자화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도덕적 해석에 따라 그 시행이 다를 수가 있다는 거다.
따라서 法規定도 중요하지만 道德精神이 바로 잡혀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럼 道德이란 뭐냐? 한 말로 그 사회의 양심이다. 알다시피 한국은 수천년에 걸쳐서 각종 외래문화와 학문과 종교를 가져왔다. 가장 원시적인 무당철학, 즉 shamanism에서 부터 佛敎, 道敎, 儒敎, 그리고 기독교가 그 땅에 정신적 기준을 뿌리내렸다.
실제로 불교, 도교, 및 유교는 종교라고 하기 보다는 人生哲學이다. 불교 자체도 석가모니의 생각이 老-莊사상과 결합한 것이라서 그것이 인도의 것이냐 중국의 것이냐를 구분하기 어렵다. 유교 역시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그 뜻을 달리 해석하고 있다.
그러한 복잡다단 것이 과연 사회적 양심인가? Carl Yung의 Collective Unconsciousness, 즉 Archetypes 란 것을 "바로 요거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고, 앞에 말한대로 도덕의 기준이 되는 어떤 一觀된 정신이 없는데에 연유한다.
황산덕 교수는 결국 종교가 법과 도덕의 상위에 있는 가치기준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럼 한국의 종교는 Carl Yung이 가설한 기독교적 바탕과는 처음부터 이빨이 맞지 않는다. 한국의 기독교가 전 국민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작 10%에도 미흡하거늘, 그들의 윤리관이 곧 한국의 도덕성의 잣대가 될 수 없다.
이명박이란 사람도 한국의 내노라 하는 영낙교회의 장로가 아니었나? 도덕성의 국제고아가 지금 도덕성을 들먹이며 일꾼을 모으고 있다. 그러면 국민들은 어떠냐? 그 애비에 그 아들이다. 콩 심은 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나온다.
뭐가 法이며 도덕성이며 나아가서 종교적 양심이 마비된 상태에서 이상적 국가가 건설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물가에 가서 숭늉을 달라는 것과 같다. 개천에서 龍이 나던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있었던 神話다. 댓글폭탄이 터지는 이즘에 이르러 민주주의의 대변인들은 자신을 다시 한번 꼭 돌아보시길...
草野에 뭍혀사는 것이 왜 좋으냐? 이 모든 골치아픈 일들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내가 虛慾을 내서 누굴 등처먹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일부러 君子然해서 남들 위에 서서 목에 힘줄 건덕지도 없고 마는. 나는 그저 내 생겨먹은대로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 사도바울이 '빌립보書 4장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