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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변화를 감사하지 못하는 군상들
작성자 zenilvana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를 고쳐주었는데, 그 중에 아홉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사람이었다. 그런데 유독 "사마리아" 사람 만이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제사장에게 자기 나은 것을 보이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했다는 얘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의문이 가는 몇가지 사항들이 있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을 중심하여)

1. 문둥병이란 불치의 병을 고침받은 10명 중에서, 어떻게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고맙다는 인사를 했나?

2.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남어지 9 명은 믿음이 없었다는 것인가?

3. 9명도 고침을 받았으니 그들도 어떤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꼭 돌아와서 감사해야 구원이 되는가?

4. 그 9명이 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제사장에게 보인 그 후로 다시 문등병 환자로 돌아갔다는 말인가?

5. 아홉명 전부가 고맙다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드리기 어렵다. 무슨 이유냐?

6. 10명 전부에게 제사장에게 그 병이 나았음을 보이라고 했는데 무슨 이유일까? 예수님과 제사장과의 관계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공과책을 설명하신 이아무개 목사님은, 역경에서 온 겸손과 그리고 순종, 유태인임으로 특별 감사가 필요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 모습 그대로 곧 감사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라는 논지로 설명하고 있다. 너무나 상식적이며 초보자를 위했다 할까, 아니면 성경의 글귀에만 집착하고 역사적 이해 및'영적인 비죤'(spiritual vision)이 미흡한 점이 많다고 보았다.

우선, 예수님이 전도 활동을 하시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예수님, "사마리아" 사람, 유태인들, 제사장, 로마제국의 통치, 모세의 율법, 유태인들의 신앙제도,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 즉 이방인의 차별 등등의 복잡한 인과 관계의 역사를 알아야 위에서 제시한 여러가지 의문점의 해답을 구할 수있다.

첫째, 당시의 유태인 사회는 정치와 종교의 권력이 분리되어 있었다. 첫번째 왕이었던 "데이빋"시대에 제사장인 "나단"이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바와 같이, 항상 "모세"의 율법상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의식은 제사장의 소관이었다.

두째, "사마리아" 사람은 원래 "솔로몬"왕이 죽고 그 아들 두 명이 유대땅을 둘로 가르기 전 까지는 12 지파의 하나인 Dan지파로 땅을 배정받고 살던 한 민족이었다. 기원 후 700년 경에 "느부간네살" 왕이 "에루살렘"을 공략하여 거기 살던 사람들 70,000명을 포로로 잡아서 바비론으로 끌고 갔다가 70년만에 되돌려 보냈다.

이때, 제사장 "에스라"가 제2차의 "토라"(구약)을 재집성하던 과정에서, 끌려가지 않고 남았던 북쪽지파 사람들이 다른 인종의 피로 섞임으로써 유태인의 혈통을 더렵혔다 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태인 혈통에서 제외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네 '모세의 경전'을 별도로 만들었고 심지어 성전까지 지었으나, 결국 돌아온 사람들이 후에 처들어가 허물어 버렸다.

참고 1:구약의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얘기가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고, 그 다음의 것은 "엘로힘"으로 부르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분개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똥물을 퍼넣는 일이 벌어졌었다. 그 이후로 몇 백년동안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가 되었고, 예수님 당시만 해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그들의 더러운(?) 땅을 피해서 요단강을 끼고 "여리고(Jericho)" 까지 와서 예루살렘의 고지로 올라가는 여행을 해야 했었다.

세째, 제사장 구룹은 "모세"의 형 "아아론"의 후예들인 "레위"족속으로, 자자손손 대를 이으며 제사장의 직분을 도맡아 그 특전을 누렸다. 정치권력자 밑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하던 구룹이었으며, 바리세인, 서기관 그리고 로마사람과 정치적 연분을 유지했던 "사두게"인들은 성전이란 체제를 통하여 자기네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했었다.

네째, 땅을 기업으로 받은 유대인은 누구나 자기네 명절이나, 기타 종교예식에 참가하기 위하여는 자기가 가진 제일 좋은 것으로 성전에 제물을 받쳐야야 했고, '레위' 족은 이러한 성전의 수입으로 호의호식 하도록 했었다. 그 제도가 비대해져서,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중앙은행의 역활을 하는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참고 2:예수님이 성전에서 환전상들의 좌판을 뒤집어 없었던 이유가 이런 특권층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제도에발발한 이유였다.

이 제도의 근본이념은 "성결주의"(Purity System)라는 율법주의로써, 이들 종교 및 정치권력자들의 이권을 확보하는 수단이 됐으며 인간 차별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 3: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씼는 관례를 "실로암"의 샘가에서 38년 기다렸던 불구자의 얘기로도 알 수 있다. 거기서 예수님이 그를 고쳐 주었다는 얘기는 몸을 싰지 않아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한 것이다. 사람들을 그 성결(Purity)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메겨서, 제일의 하층은 눈먼 사람들, 과부와 고아들, 절름발이, 문둥이, 죄진자, 노예, 등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이에 속했다. 거기에는 우리들 같은 모든 이방인들이나 "사마리아"사람이 포함된다.

참고 4: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로마군의 백부장의 청함을 받던 날 밤에, 더러운 네 발 가진 짐승들을 구별하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꿈을 꾸었는데, 이는 성결(聖潔)의 율법에서 해방되어 그 이방인을 만나 보라는 얘기였다.

참고 5: 같은 연고로'여리고'路上에서 강도 만나 피흘리며 죽는 사람을 방치하며 길을 재촉했다. 여자들의 월경의 피나 이들 이방인의 피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인간적 동정보다는 성결주의적 율법을 우선했던 바다.

다섯 째, 이런 사회적 불공평과 로마제국의 착취로 많은 사람들이 도탄에 빠져서 허덕였지만, 소위 '가진 자'인 제사장 구룹과 '사두개'인들은 이들을 구원하기는 꺼녕 그들의 고혈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 나라가 가까왔다고 외침"은 이러한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등병을 고쳐주고는 제사장에게 가서 이처럼 버림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인간애로서 구해주었다는 명확한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여섯 째, 누가 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을 믿는 소수의 무리들이 대다수의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복음, 즉 "기쁨의 소리"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위에 언급한 성전의 제사장 무리에 항거해야 하는 "아젠다"가 있었다.

불치의 문둥병을 고침받고도 율법주의 때문에 고마움을 표현할 수 없는 그들, 다시 말해서 고루한 생각에 매여 사는 무리들에게 "사마리아"사람을 비유하며 비인간적 정신자세를 힐난하며, 진정한 영혼의 구원이 어디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어느 세상에 문둥병을 치유받고 고마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제사장에게 보이고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할 수 없는 사회적 제도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일곱 째, 성결주의에서 하층에 속한 사람으로서, 성결주의에서 자유로울 수있었다. 사회의 고질적 병폐의 장벽을 뛰어넘어 범 인간애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예화에 해당한다. 마치 문재인 대통령이 적폐청산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정권이래로 잘 해먹었던 구세력들의 권세를, 그것이 보수인지 뭔지에 상관않고, 더 이상 계속시키지 않고자 하는 정신에 방불하다고 본다.

그래서 너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늘나라를 믿는 자 누구에게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성결주의니 율법주의니 하는 어떤 이념의 충족으로 구원이 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바올"이나 "마틴 루터"가 주장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입방아를 찧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은 실천해야 할 시대가 도래했다.

참고 6: 영락교회의 장로였던 이명박이 그 대표적으로 국민의 혈세를 착취의 화신이었다. 교회는 이들 골빈넘들이 무고한 백성을 등처먹는 기관인가? 영락교회의 장로였던 이명박이 그 대표적 사기와 협잡의 화신이었다.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먹사는 어떻고? 유병언......등등 수도 끝도 없는 이들 사이비 종교인들의 작태를 기억하시라.

여덟 째, 9명의 유태인도 비록 감사를 않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병이 나았다고 봐야한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문둥병 환자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그의 박애정신에 어긋난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적으로 '구원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원이란 물질적 구원이 아니라 정신세계에서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 복음 5장 3절에 나오는 예수님 산상 설교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말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정신적인 세계에서의 축복을 이야기 한 것이다. 물질과 그 '있고없고'의 사건이 아니다.

아홉 째, 현재 나의 입장에 적용되는 정신적 자세 (Sein)을 검토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지, 당연히 해야하는 어떤 도덕적 규범에 맞추어 자기를 구속해야 하는 Sollen의 믿음생활을 해서는 않된다. 예수님도 고통받는 문둥병적 물질을 해결할 수는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결국 신앙인 스스로 '매사에 감사하는 자'에게만 약속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열 째, 신앙생활은, 농부가 밭에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뿌린 대로 거둔다". 병이 나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결국 병이 낫는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신앙인 자신이 씨를 뿌리는 노력이 앞서야 하고, 그로써 추수를 기대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하늘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릴 수가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영어로 complacent라는 말이 있다. pleased, especially with oneself or one's merits, advantages, situation, etc., often without awareness of some potential danger or defect; self-satisfied: The voters are too complacent to change the government.

주어진 여건이 다 자기가 잘나서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어떠한 혜택을 고마워하지 못한다. 한국의 정치역사에 변혁이 일어나고 있거늘 평소에 하던대로 반발과 불만으로만 치부하는 부정적 인간은 무슨 일이던 감사할 줄 모른다. 믿어라, 믿어! 더 좋은 세월이 올 것을......

禪涅槃

2017-06-12 09: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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