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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된장의 철학!
작성자 coffee

한때는 지구가 중심인 것이 상식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그 상식은 틀렸다. 또 종잇장을 보라. 그 종이는 앞면과 뒷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상식이다. 하지만, 뫼비우스 띠를 생각해보자. 이 종이에는 오직 한 면밖에 없다. 한쪽을 선택해 고리를 따라가 보면 다른 면으로 보였던 것이 실제로는 같은 면임을 알게 된다. 이번에도 상식은 틀렸다. 신이 중심이던 세계에서 인간이 중심인 세계로 그리고 이제는 인간이 더는 중심이 아니다. 주체는 라캉식으로 빗금 그어져 있으며 시대적 공간적 사회체의 산물이다. 이 것은 바로 이러한 상식을 뒤집는 철학적 성찰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답은 없다. 우리가 답을 가진 게 아니다. 개인의 동일성에 대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똑같은 강에 두 번 뛰어드는 것은 가능한지, 어렵게 느껴졌던 철학적 질문들!
돼지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로 인간과 돼지는 동격이 되는가?
젠장!과 돼지는 동격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된장!
아 철학 이라는 것 똥품이 먼저인가 ?
냄세가 문제인가?

2017-06-16 09:08:10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7   coffee [ 2017-06-16 11:21:16 ] 

재소외는 정신분석 치료를 통해 근본 환상의 새로운 횡단을 정기적으로 겪음으로써만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이는 누구 들으라꼬 하는 개소리지비?

6   coffee [ 2017-06-16 11:16:59 ] 

라캉에 대한 몇몇 고찰(2/2)

로렌초 키에자, 『주체성과 타자성(철학적으로 읽는 자크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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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959년에 라캉이 『세미나7』에서 한 정의를 따라가자면, 주체란 “실재와 기표 사이의 중간항”(220)이다. 오이디푸스 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기표]으로 재구축되는 주체란, 그러한 상징적 작업 자체가 가져다주는 불만족으로 말미암아 실재의 욕망으로의 모순적인 운동을 일으키는 셈이다. 상상계라는 게 대상에 대한 거울적 동일시 내지 극단적인 소유욕이었다면, 상징계는 대상의 허상에 대한 또 다른 허상이다. 가령 어머니가 아버지의 남근을 욕망할 것이라는 아이의 망상, 그리고 그러한 망상 위에 구축된 아버지의 법에 대한 존경심이다. 하지만 이런 외경(畏敬)이 곧 어머니의 소유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지 않던가?



3.2. 여기서 실재에 대한 물음은 이런 식이다: 거울반사될 수 없는 잔여물, 상상계와 실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공백으로 이해되는 “대상a”라는 것이, 상상계로의 퇴행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실재의 차원이란 게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증은 가능한가? 좀 더 간명히 요약하자면, 상상과 실재는 구분가능한 범주인가?



3.3. 확실히, 키에자의 문헌학적 작업이 증명해주듯 세미나5권(1957-58년)에서는 ‘타자의 타자는 있다’라고 생각했던 라캉의 희망사항은,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세미나6권에 와서는 “타자의 타자는 없다 (……)기표의 여하한 현시의 구체적 결과를 보증해줄 그 어떤 기표도 존재하지 않는다”(224)로 변경됐다. 전자의 경우엔 궁극적인 부정적 법, 즉 초재적 아버지가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후자의 경우엔 이러한 욕망의 소실점이 사라져버린다. 무엇이 라캉으로 하여금 욕망의 확실성(혹은 그러한 가상)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는가? 아무래도 이건 라캉의 개인적인 전기를 들여다봐야할 듯하다. 허나, 이는 본서에서 진행될 연구는 아니다.



3.4. 첨언: 사실 라캉은 세미나4권에서도 초재적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가지고 있었다. “상징적 아버지[부성적 법/아버지의-이름]는 오로지 너머에만, 과감하게 말하자면 초월에만 위치시킬 수 있는 상징적 구성물의 필연물이다”(242) 하지만 이후엔 이러한 망상을 포기한다(……아마도 생각했던 것만큼 여자가 남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명한 경험적 관찰을 했으리라). 이때부터 기표라는 건 실재[어머니 그 자체]에 구멍을 내는 요소, 즉 대상을 나름대로 규정하고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대상에 대한 조직화/표식을 남기지만, 그것은 통로가 됨과 동시에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란 표현의 이중성처럼,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잔여로 남게 된다. 규정된 내용이 곧 그 대상인 건 아니다. 보다 깔끔한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인용하자면,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논고』, 1.1)



3.5. 이로써 불가능성은 상징계에 내속(內屬)적인 게 된다. 부성적 은유에서 느끼지는 불만들은 어렴풋이 느껴지는 실재의 공백,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대상a를 떠올리는 계기로 작용한다. 대상a란 일종의 상기물(reminder)인 셈이다. 하지만 상기되는 지점은 어디까지나 상징계의 층위다. 우리는 실재는 결코 직관될 수 없는 미지의 베일로 이해되며, 인식에게 허락된 것은 그것의 어렴풋한 실루엣뿐이다. 키에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오로지 상징계의 관점에서만, 사후적인 방식으로만 원초적 실재를 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항상성의 0, 이 비-사물에 구멍이 뚫렸기에 (상징계의 결여로서의) 실재가 창조되었다는 것 역시 승인할 것을 라캉은 우리에게 요청한다.”1



3.6. 이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주체가 내밀하다고 표현하는 건 다소간 괴의할 수 있다. 그는 타자이기 때문이다(혹은 타자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밀하다고 파악된 것은 역으로 무의식 속에서 타자의 이마고를 가지려고 하는 끈적거림, 그래서 역으로 밀도를 가진 것은 내부가 아닌 외부가 된다. 즉, 외밀성(extimité)인 것이다. 자기의 밀도란 없다. 공백이다.



3.7. 『세미나10』에서 라캉이 “주체적 궁핍”(309)라고 부른 것은 적확하다. 욕망이라는 건 부성적 은유에 의탁한 주체가 느끼는 불만족과 궁핍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고, 이 결여가 욕망의 본질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인 지점이기도 하니, 왜냐하면 주체는 주체 스스로의 모자람, 즉 아버지의 법이 곧 어머니의 욕망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반항적 층위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은 [아버지-법의]결여로부터 말미암았지만, 동시에 [아버지-법의]결여를 욕망하기도 한다.



3.8. 라캉에게 주체란? 영원한 회색분자일 수밖에 없다. 이상화의 효과들과 충동의 실재 사이라는, 지극히 모호한 영역에서 갈팡질팡한다. 여기서 욕망이란? 끊임없는 억압된 것의 회귀다: “욕망은 필요 위로의 기표의 입사(incidence)에 의해 표식된 편차[일탈]의 여분을 되돌려주는 어떤 것이다”(312)



3.9. 하지만 이런 라캉식의 욕망은 소유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가령 『세미나9』에서 라캉은 뿌리 깊은 스스로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자신이 아닌 이상화된 무엇이 되고자하는 심리와, 이러한 이상화된 모델을 제시하는(혹은 그럴 것이라 마음대로 단정 지어지는) 타자의 규준(規準)-찾기를 욕망으로 이해한다. “욕망이 타자 안에서 찾는 것은 욕망함직한 것(le désirable)이라기보다는 욕망하는 것(le désirant), 타자가 결여하는 것이다.”(321) [2.11에서 말했듯]이러한 욕망의 배후엔 불안으로 말미암은 자기부정/대상화 충동이 깔려있기 때문에 자의적인 왜곡이 불가피하다. 또한 라캉은 대상a를 상상화 이전의 실재적 결여로 보고 싶어 하지만, 그러한 인식은 가능할까? 적어도 라캉의 대전제인 게슈탈트와 근원적 불안을 고려한다면, 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3.10. 라캉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고 본다. 『세미나7』에서 “인간이 아는 향유의 유일한 계기는 환상이 산출되는 현장에서 발생한다”(347)라고 적었을 때, 상징계로부터 좌절된 공백 너머의 무엇은, 그 어떤 식으로든—심지어는 그 실마리마저도—인식되자마자 실재값으로부터 탈락된 환상으로 현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대상a가 ‘잔여물’로서 표현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국부적으로 축소시킨 왜곡을 할 수밖에 없는 인식-틀 속에서, 대상a라는 건 전체의 부분, 어쩌면 부분의 또 다른 부분일지도 모르는 잔여물로서만 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미나10』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향유는 이 잔여물, a를 통해서만 타자를 알 수 있다”(347)



3.11.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해된 향유의 기능은 참으로 괴이한 건지도 모른다. 항유의 유일한 계기인 환상이라는 건, 어머니가 자신의 작은 남근을 사랑할 것이라는[혹은 자신이 그러한 남근을 갖고 있다는] 상상적 남근이나, 또는 보다 다른 양태로서 그러한 상징적 남근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아버지의 법에 대한 충성서약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전자는 나르시시즘이고 후자는 파시즘이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그 대전제에는 자기실망/자기부정의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에, 저 환상이라는 건 불안의 대용품, 즉 희망사항일 수밖에 없다. 또한 아버지와 매개된 환상라고 볼 수 있는 상징계에 대한 변증법적 부정운동(그리고 여기서 일시적으로 드러난다고 희망되는 실재의 몫)이라는 것 역시도, 궁극적인 오류를 최대한 유보시키기 위한 지연전술에 다름 아닐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타자에게 닿을 수 없다는, 상상의 연쇄에 불과하다는, 결코 욕망/사랑받을 수 없는, 그런 식의 우울한 무의식적 깨우침이 존재한다.



3.12. 동어반복의 지루함이, 곧 정신분석이다.



3.13. 이런 점에서, 근친상간금기라는 건 아버지의 법이나 거세공포증의 결과라기보다는, 실재로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었을 때 어머니가 진실로 자신의 남근을 욕망했던 건 아니라는, 끔찍한 좌절을 최대한 유보하고 싶은 회피심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3.14. 좀 더 밀고나가자면 라캉의 사드와 칸트에 대한 독해, 즉 법의 향유(칸트)와 향유의 법(사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슬라보예 지젝은 사드야말로 은밀한 칸트주의자라고 말하면서 경향성[아버지의 법]을 제외하고 보편적 정언명령[욕망]에 따라 행동하기를 거침없이 주장한 칸트에 대한 해석을 내놓을 테지만, 그 욕망이란 대상 그 자체가 아닌 환상[법]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3.15. 라캉 역시도 이러한 선결문제의 오류를 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후기로 지나가면—가령 『세미나23』에선—“타오르는 불[‘거대한’ 향유의 신기루]은 한낱 실재의 가면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재는 절대적 영의 편에서 찾아야 한다”(382)고 지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런 주의사항을 말하기도 했고: “우리는 잉여 향유[대상a의 향유]가 있는 척할(faire semblant)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383) 하지만 라캉의 논의를 아무리 반복한다고 해도 “항유가 있는 척할”뿐인 악무한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텐가? 기껏해야 그게 인간의 조건이고, 따라서 부정적인 운동을 반복해야만 하는 태도를 제시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현대의 슬라보예 지젝이 그러한 하드보일드적 인생관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내가 봤을 때 기다리는 건 배드엔딩뿐이다. 대전제가 잘못됐다. 인간은 불안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고, 사랑 역시도 결여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며, 같은 이유에서 ‘그 자체’에 대한 질문지를 통해선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에 도달할 수 없다. 라캉에게선, 좌절이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을 낳지 않던가?



4.1.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질문: 주체를 좌절시키는 대상a의 끊임없는 횡단, 즉 부성적 은유에 공백을 야기하고, 환상에 불만족을 불어넣으며, 동시에 다시 망상 속에 대상을 환원시키려는 충동을 유발하는 대상a의 변화는 무엇으로부터 말미암는가? 더 단적으로 말해서, 여자는 왜 남근을 사랑하지 않는가? 어째서 남근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왜 멈추지 않는가? 이러한 여자로부터 좌절된 남자의 시선에서, 여자를 파편화/대상화하며 환유적 욕망을 안으로부터 재구성해볼 수는 있겠지만(그리고 이게 라캉이나 지젝이 하는 환유적 욕망-구성원리의 전부인데), 그럼에도 이런 논리로서는 여자의 횡단 그 자체가 붙잡히지 아니한다.



4.2. 끝맺음: 라캉은 욕망이론으로 대표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욕망에 무지했던 건 아닐까?









※메모한 구절들

-“상상적인 바로서의 타자가 있다. 바로 여기, 타자와의 상상적 관계에서 전통적인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이 구성된다. (……) 또한 분명 내 자리에서 말하는 타자, 내 안에 있는 이 타자가 있다. 이것은 나의 상대방인 타자와는 전적으로 다른 본성의 타자이다.” (세미나3)(85)



-“주체성은 분석가로서의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제거가능하지 않다.” (세미나5)(85)



-(4)주체 안의/주체의 구조적 분열에 대한 발견은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전복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정신분석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라캉이 반복해서 진술하듯이, “나는 내가 있지 않은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에크리)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인 나, 언표의 주체는 실제로 무의식적 층위에서 생각한다. p90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한 바처럼, “우리가 말한 것의 진정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탈중심화된 타자[언어 그 자체]이다.”(『삐딱하게 보기』, 264쪽) p98-99



-즉, 아이는 (알지 못한 채로) 어머니의 상실된 남근의 대역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아이에게 아직은 박탈된 존재로서 지각되지 않는바 어머니는 전능하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아이의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p153



-아버지의-이름은 세미나 5권에서 라캉에 의해 “기표들의 기표”(195), “타자의 타자”(195)로 이해된다. p195



-“남근은 기의에 있어서 기표의 존재로부터 결과하는 어떤 것이다.” (세미나5)(196)



-(3)더 정확히, 이 “기표들”은 어머니의 욕망의 환유적 대상(을 위한 계속 변하는 우연적인 대역)에 상응한다. 라캉이 말하듯, “주체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것과 상상적으로 동일시한다.”(세미나5)(211) 따라서, 환유적 대상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차지하는 여하한 대상이—정확히 그것은 이미 상징적 대상으로 경험되었기 때문에—부재를 배경으로 해서 주어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대립적인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병행하여, 그것들은 하나의 흐름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비록 묶음지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유적 사슬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 흐름은 요구의 영구적인 불만족에 의해 지탱된다. 그렇다면 묶음짓기는 원초적인 부성적 은유에 이해 초래될 것이다. p211



-“은유는 무의미로부터 의미가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에크리)



-“기표에 대한 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다른 정의는 없다). 하나의 기표는 다른 기표에게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나중의 기표는 주체를 표상하는 모든 다른 기표들에 대하여 기표가 된다. 만약 이 기표가 상실된다면, 주체는 모든 다른 기표들이 아무 것도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크리)



-“문제는 이제, 실재 안으로의 기표의 입장이라는 문제이며, 이로부터 어떻게 주체가 태어나는지를 보는 것이다.” (세미나10)(290)



-사드 소설의 근본 환상은 타자의 신체에 영원히 고통을 가하는 것이라고 손쉽게 확인될 수 있다. 역으로, 영원한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희생양의 신체는 불멸적이 되어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드에 따르면 고통을 겪는 신체의 불멸성은 자연의 불멸성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사디스트가 희생양의 신체에 가하는 생성과 파괴의 지속적인 연속을 통해 즐기는 자연이다. p361



-칸트와 사드 양자 모두의 초자아적 위반이—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라캉 자신의 “묵시록적 지점”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상징계의 내파적 자기-포화를 겨냥하는—그리하여, 원초적 실재의 “견딜 수 없는” 향유 안으로 신화적으로 뛰어드는 한에서 근본악의 윤리로서 설명될 수 있는—반면에, 순수 욕망, 상징적인-것의-실재, “공포(空胞)의 영역”이 그 자체로 나타나게 만들려고 할 때, 따라서 상징계를 실재-화하려는 초자아적 도덕법칙의 역설적 경향에 저하할 때, 위반은 진정으로 “윤리적”이다. p365 (세미나7)



-사드의 경우, 무로부터는 배척된다. 물화된 고통을 통한 공백의 “정적인” 거부는, 본의 아니게 존재를 잃고 원초적 실재로 되돌아갈 위험을 마침내 무릅쓴다. 반대로 안티고네의 경우, 무로부터는 그 자체로서 단언된다. 그리하여 존재의 결여로서의 존재와 그것의 환유로서의 욕망은 보존된다. p376



-근본적 욕망은 근본적으로 파괴적이다. p377 (세미나7)



-향유는 “고통 속의 쾌락”이다. 특히 이것은 언제나 대상a의 향유와 등가적인데, 이는 상징적 구조에 구멍을 내는 실재의 잔여물이다. 타자 속의 실재적 구멍으로서의 대상a는 잉여-잔여 실재의 현존으로서의, 대상a의 항유로서의 구멍인 동시에 전체적 실재(애초에 거기 결코 없었던 원초적 실재)의 부재, 향유의 부재로서의 구멍이다. p383



-남근적 향근적 향유는 일자를 만드는 반면에, J(A빗금)는 개체를 만든다. (대상a의) 남근적 향유가 점증적으로 결여를 지우려는 척하면서(pre-tending) 상징적 일자를 만든다면, 다른 한편으로 역시 대상a를 즐기는 J(A빗금)는 말하자면 결여로부터 “그 자신의” 상징계를 발전시키는 개체를 만든다. 라캉에게 조이스는 상징계 속의 결여인 대상a를 (부분적으로) 개체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데 성공하는 한에서 “개체”이다. p390-391




-밀레의 말처럼 “[조이스의] 진정한 아버지의-이름은 작가로서의 자기 이름이다. (……)그의 문학적 생산물 덕분에 그는 그 자신을 그가 결여했던 의미 속에 재위치시킬 수 있다.” p392



-호인스와 플러스에서 시작해보자. 그들은 묻는다. “어떤 관점에서 아버지의-이름은 증환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세미나7권을 분석하며 보았듯이, 1950년대 말에 아버지의-이름(le Nom-du-Père)은 배타적으로 금지적 아버지의 금지(Non!-du-Père)이기를 멈춘다. 사실 신경증의 표준적 상황에서 또한 그것은 규제되지 않을 경우 파괴적인 향유를 증상을 통해 규제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의 “안 돼!”는 우리가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결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즐기(는 척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 나아가 라캉은 조이스를 다루는 후기 저작에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격발되지 않은” 정신증의 경우 주체가 사회적 공간 안에 거주할 수 있게 해주는 이 동일한 규제가 결국은 증환 그 자체에 의해 실행될 수 있다. 즉, 타자의 빗금침 (구조적 결여의 출현)을 뒤따르는 아버지의-이름의 상대화는 증상에 관한 한 궁극적으로 두 가지 상보적인 결과를 함축한다. p393



-상징적 구조가 오로지 근본 환상들을 헤게모니화하는 어떤 특수한 우연적인 주인기표를 통해서만 보편적이라면, 자신의 이데올로기화된 근본 환상 밑에 있는 실재적 결여와의 조우는 주체로 하여금 보편적인 것 속의 결여를 떠맡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역으로, 결여의 재상징화는 정의상 언제나 특수한 것의 층위에서 실행된다. 더 정확히, 이것은 보편성이 있으려면 특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체가 깨닫는 특별한 계기에 다름 아닌 한에서, 바로 여기서 특수한 것은 개체적인 것이 된다. p397



-주체는 그 자신의 이름이 된다, 그 자신의 증환을 발달시킨다, 그리고 그러면서 헤게모니적 타자와 공존한다. 이 해결책은 지배적 보편자의 무의미와 일정한 타협을, 보편자가 개별자에게 의존한다는 자각의 점진적인 감소를 불가피하게 함축한다. 그와 같은 재소외는 정신분석 치료를 통해 근본 환상의 새로운 횡단을 정기적으로 겪음으로써만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p398



-주체는 운동을 명명한다. 주체는 (자신의 개체적 주인기표/증환을 통해 재상징화되는) 새로운 상징계를 촉진하고, 그것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투쟁한다. p398



-라캉의 첫 주체 이론에서 정신증에 대한 가장 간명한 정의는 거울단계에 붙잡혀 있고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타자로 인지하는 데 실패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라캉은 광기를 인간 주체성의 기본 구조에 포함시킨다. 정신증은 더 이상 기질적 결함이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된다. p44-45



-잠재적 실재는 상징계에 선행한다, 하지만 그것은 상징계에 의해서만 현행화될 수 있다. 아이의 필요의 실재적 대상은 오로지 아이가 대상의 결여와 직면한 이후에야, 대상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야 그 자체로서 지각될 수 있다. 주체-대상 관계는 분명 결여의 생산성에 기반하고 있다. p141



-가령 구강 리비도가 “개체의 본존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리비도는 또한 불가피하게 상징적 질서의 영향을 받는다. “정확히 사랑에 대한 요구를 만족이 대체하는 변증법 속으로 리비도가 진입하는 한에서,” 리비도는 필요로 환원될 수 없다. 달리 말해, 그것은 “에로스화된 활동”(세미나4)(155)이 되었다. 요약해보자, 라캉은 리비도가 필요의 에로스화에 다름 아니라고, 사랑에 대한 요구가 본능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남긴 지울 수 없는 자국이라고 믿는다. p155

[출처] 592. 주체성과 타자성, "라캉에 대한 몇몇 고찰(2/2)"|작성자 홍
아!~~~~ 니캉 , 네캉 돌 아이의 헛 소리라 무시기 소리를 이케 길게 마 헛소리 고마해라 마이 무것다 아이가 이케 줄임ㅁㅁ면 될 것을이면

5   coffee [ 2017-06-16 11:07:02 ] 

아니!
무슨 주심이 관중들 다 모였는데 심판은 안보고 ?
선수들을 한방에 보내버린데 그래?
관중들은 우짜라고?
내돈 돌리도.........,,,,,.....

4   rainbows79 [ 2017-06-16 10:58:43 ] 

떙!
dakshang님의 펀치 한방에 rainbows79 와 sangha1 둘다
knock down 의식불명 입니다.

3   dakshang [ 2017-06-16 10:28:49 ] 

I will Countdown to #1, one and two and three and 45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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