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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래합시다 노래 사랑했다고....... 말해요......
작성자 rainbows79

어제 오늘 돼지들이 꿀꿀 거리고 게시판에는 똥으로 도배라!
게다가 양아치 헛소리에 지치신 여러분들!
노래나 감상하시고 귀 청소 하세요

김민기씨의 친구를 익사 사고로 떠나 보내고 만든 노래라 들었습니다.
젊은 친구를 사고로 곁에서 떠나 보내도 이리 슬픈데 우리 세월호
친구를 보내고 자식을 보낸 이들의 심정은 어떠할런지 감히 짐작도 못
합니다.

유튜브로 가사 보시며 노래 들으시면 더 좋으실 듯

노래 가사입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 김민기 <친구> 1971년



얼마전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곡의 노래를 들었다. 마침 주차장에 차를 새우고 내리려는 찰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 낮고 울림큰 목소리에 한참을 그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때는 늦가을,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 몇개를 주황색

가로등이 무심히 비추고 있었고, 엷은 밤안개가 어둠을 따듯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 노래는 김민기의 <친구> 라는 곡이었다.



김민기. 가수겸 작곡가, 연출가. 1951년생. 서울대 미대 회화과 69학번. 1971년 독집 앨범 <김민기 1집 - 부제 : 친구/길> 발표.

대표곡 아침이슬, 친구, 늙은군인의 노래, 상록수, 봉우리, 작은연못 등. 뮤지컬 개똥이, 지하철 1호선등. 현재 극단 '학전' 대표

이런 건조한 프로필 대신 비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에게 '70년대 저항문화/청년문화의 상징' '한국 포크음악의 대부' '한국의 밥딜런'

같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어떤 표현도 김민기와 그의 음악을 제대로 담아내기엔 부족할듯 보인다.



김민기는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한다. 그의 대표곡인 '친구'등은 이미 그가 고등학교 시절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만큼 이미 고등학교 시절 음악에 대한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런 김민기가 미술이라는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

하지 않다. 1970년말 김영세와 함께 듀엣 도비두(도깨비두마리의 약자)를 결성하고 1971년 기념비적 음반 '김민기1집'을 발표한다.

(적어도 그가 직접적으로 기획하고 만든 유일한 음반일것이다). 당시 김민기는 대중적인 포크음악을 시도했고, 소위 '저항가요'로서의

음악을 시도한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암울했던 시대상황과 억압된 젊은이들의 문화속에서 그의 '진솔하고 솔찍한 내면의 소리'

는 청년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아침이슬'등으로 대표되는 노래들은 당시 대학가를 비롯한 시위자리에서 불리우고

이로 인해 김민기는 '저항가수'라는 의도되지 않은 평가를 받게된다. 이로인해 그의 음반은 십수년간 금지음반으로 지정되고 강제로 군에

징집되고 복귀한 뒤 직업적 음악가로 활동하게 된다. (나는 김민기가 미술을 계속했다면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후 작곡활동외에도 김지하등과 교류하며 '금관의 예수', '공장의 불빛'등의 음악극을 만들기도 하고 '개똥이', 한국 창작 뮤지컬의

기념비적 작품인 '지하철 1호선'을 만들기도 한다. 이후 공연기획자겸 연출가로 그 영역을 확대하며, 양희은, 김광석, 윤도현등 많은

후배가수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나는 김민기를 잘 모른다. 그의 전성기(?)였던 70~80년대를 유년시절에 보냈고,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너무나 선명한 주제의식을

갖춘 노래'들이나 '뛰어난 가창력과 연주기법을 선보인 노래들'과 '소위 고급문화라는 간판이 붙은 클래식이나 째즈'음악을 주로 들었을

뿐이다. 가끔 통기타로 그의 대표곡 몇곡을 연주하며 노래를 흥얼거려본 적이 있었지만, 그의 음악을 제대로 느껴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얼마전 퇴근길에 그의 노래 '친구'를 들으며 김민기의 음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깊은 사색과 고뇌가 담긴 시어들이 아름다운 통기타 선율을 따라 전해진다. 그 한없이 낮고 울림큰 목소리로 한올 한올 풀어내는

그 소리에 깊이 공감할수 있는건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30여년을 한결같이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여운과 감동을 끌어낼수 있는 것이 '김민기의 노래'가 가진 가장 큰 힘일것이며, 김민기의 음악과 그 고민이 지금도

계속되어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김민기의 노래 <친구>를 듣다|작성자 배추

2017-06-16 14:15:57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5   rainbows79 [ 2017-06-16 14:48:18 ] 

naesjic님 방의경 - 하양나비 이케 검색하셔서 노래 들어보세요
김인순씨의 노래와 다른 약간 허스키한 읇조리는 듯한 묘한 느낌?

4   rainbows79 [ 2017-06-16 14:39:43 ] 

naesjic님 방의경 스토리...
70년대 통기타 문화의 산실이었던 명동 YWCA ‘청개구리’가 되살아난다.
첫 주자는 김민기, 양희은, 박인희와 함께 ‘아름다운 것들’, ‘하양나비’, ‘불나무’를 부르며 청개구리의 터를 닦았던 여대생 싱어송 라이터방의경이다.

지금부터 33년 전인 1970년 6월 29일, 서울 명동 YWCA에 ‘청개구리’가문을 열었다. 60평에 이르는 YWCA 직원식당을 젊은이들의 쉼터로 개조한것.그러나 그곳은 젊음의 해방구였다. 방의경,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포크 1세대가 노래하고 단돈 99원을 내고 입장한 젊은이들은 콜라 한잔을들고 바닥에 앉아 음악을 듣고 문학과 낭만, 젊음을 나눴다. 그래서 청개구리는 몇 달 뒤에 문을 연 명동의 음악감상실 ‘내쉬빌’과73년 가톨릭여학생 회관에 마련된 ‘해바라기’와 함께 한국 포크의 고향으로 통한다.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에 열려

30여년만에 다시 YWCA의 품으로 돌아온 청개구리의 부활에는 고집 하나로포크의 정신을 지켜온 김의철(51)이 음악 감독겸 리더를 맡았다. 7월20일오후 4시 청개구리 부활 콘서트를 명동 서울YWCA의 ‘그때 그 자리’에서열고,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마다 포크 콘서트를 이어가기로 했다. 청개구리 자리에 새로 들어선 서울 YWCA 지하 ‘마루’홀이 바로 포크의 무대다.김의철은 70년대 명동 가톨릭여학생회관에서 ‘해바라기’ 노래모임을 이끈 주인공. ‘저 하늘의 구름따라’, ‘마지막 교정’, ‘군중의 함성’은지금껏 살아남은 그의 창작곡들이다. 그는 74년 데뷔음반 ‘김의철 노래모음’을 발표했으나 저항적 내용의 수록 곡이 가위질 당하자 스스로 판을거두어 들였다.또 군사정권의 모진 감시와 구타를 이기지 못해 해바라기의 리더를 이정선에게 넘기고 세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후 철저하게 ‘지하’에서 칩거하다 독일과 미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뉴욕에서 기타학교 교수를 지내다 96년 귀국했다. 지금까지 양희은이 낸 모든 음반과 수백회 공연의 음악 감독을 맡아오고 있다.정미조와 더불어 이화여대 미대의 ‘노래 잘하는 쌍두마차’였던 방의경.

그녀가 부른 노래는 ‘아름다운 것들’을 빼고는 ‘불나무’ 등 거의 모든노래가 금지되었다.

‘가요음반의 여왕’으로 불리는 1집 외에 비밀리에 녹음해 두었던 저항성이 강한 시퍼런 빛의 ‘마른풀’, ‘검은 산’ 등 2집에 담으려 녹음했던 20여 곡의 마스터 음원은 난지도에 버려졌다는 사실이 확인돼 팬들에게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76년 미국으로 이민, 액세서리 디자이너로활동하다 최근 캘리포니아주 랭커스터에 거주하고 있다.


포크의 대부 김의철이 주도

청개구리 음악회의 입장료는 30여년전보다 무려 100배나 비싼 1만원. 앉거니 서거니 100여명 꽉 차도 출연료가 안 빠지는 공연이지만 그중 1%는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기금으로 낼 예정이다. 김의철은 “남은 생을 한국포크의 부활을 위해 바치겠다”며 “발표할 기회가 없는 가난한 아티스트와일반인들의 아름다운 창작곡이 태어나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노래운동을 지향하겠다”고 말했다.

청개구리 부활 콘서트에는 80년대 3대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 중 2명인 이성원, 김두수를 비롯해 최근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 ‘얼굴’ 가수 윤연선도 우정 출연한다. 포크 팬들이 만들어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던 6월 29일의 ‘바람새 윤연선 공연’의 주역들이 청개구리 부활 콘서트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저는 이분이 죽은 줄 알았어요. 노래가사도 그렇고 소식도 없고 해서...

기사에도 나오는 김의철은 지금 양희은팀의 음악감독이지요.
'하얀비'(김의철)를 이분이라 생각하며 찾는데 못찾고 있습니다.

귀국후 콘서트를 했지요. 대단했다 합니다.




통기타 소리가 요란했던 1970년대 명동에는 전설적인 남녀 포크가수가 있었다. 서울 미대의 김민기와 이름도 생소한 이화여대 미대의 방의경이 주인공이다. 방의경이 김민기와 더불어 70년대 청년 문화를 주도했던 주역임을 아는 대중은 별로 없다.

당시 그녀는 한대수, 김민기, 김의철과 같은 저항적인 창작 포크 곡을 불렀던 여대생 포크가수였다. 양희은이 부른 70년대의 대표적인 포크 곡 ‘아름다운 것들’과 김인순, 김세화가 부른 ‘하양나비’ 그리고 ‘불나무’는 대중이 기억하는 그녀의 작품들. 하지만 “데모하는 학생들이 즐겨 부른다”는 이유로 그녀의 노래들은 대부분 방송금지의 멍에를 썼다. 상업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방의경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녀는 서울 서대문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9년 9월 15일생. 부친은 서울 피스톤 자동차회사를 운영하며 한국 최초의 불자동차를 만든 발명가 방응준씨. 어머니는 고아원 아이들의 엄마로 불린 사회사업가 이정순씨다.
서너살 때부터 유행가를 앙증맞게 불렀던 방의경은 아버지 회사에서 최고 스타였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자연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보인 별난 아이였다. 창문을 열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한참 듣다가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비를 맞으며 노는 막내 딸의 기이한 모습에 놀란 어머니는 서울대병원 정신클리닉에 데려가기도 했다.

미동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보다는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이상한 아이였지만 합창단에 뽑혀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재능을 보였다. 이대부중에 진학해서는 자연과의 대화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이대부고 1학년부터 악보도 없이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그녀는 “대포를 만들라”는 군사 정권의 제안을 거부해 탄압 받는 부친의 고통을 보면서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접한 존 바에즈, 밥 딜런의 저항적인 포크 가락이 가슴에 와 닿았다. 고 2때 오빠의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 만졌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기타를 배웠다.

무대에 오른 것은 1968년 이화여대 장식미술과에 입학하면서부터. 교내 축제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방의경은 정미조와 더불어 이대 미대의 ‘노래 잘하는 쌍두마차’로 꼽혔고 학생대표로 월남 위문공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이백천과 작곡가 길옥윤이 OB맥주광고 CM송을 제의해 왔다. 이장희, 김도향과 함께 방의경은 장난삼아 1분 짜리 CM송 시험 녹음에 응했다.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학년 축제때, 작곡가 이봉조가 반주를 맡고 조영남이 심사위원을 했던 문리대 노래자랑대회. 대중적인 노래활동을 반대했던 아버지도 이 때 딸의 노래를 듣고 감격해 값비싼 야마하 기타 선물로 미안함을 씻었다고 한다. 반주를 맡았던 이봉조는 2옥타브를 넘나들며 맑은 음색으로 노래하는 방의경의 바이브레이션에 감탄하며 ‘하늘에서 내려준 맑은 음성’이라고 극찬했다.
이화여대 메이데이 때의 일이다. 이봉조는 과 대표로 노래를 한 방의경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웠다. 도중에 “잠깐 들렸다 가자”고 해 따라간 곳은 나이트클럽. 그 곳에는 이봉조 악단의 전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예인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은 방의경은 정중하게 집요한 이봉조의 픽업 제의를 거절했다. 곡가 길옥윤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 역시 곡을 쓸 때마다 “이 노래는 방의경 것”이라며 ‘제2의 패티 김’탄생을 꿈꿨지만 실패했다. 길옥윤이 그녀의 대타로 찾은 여가수가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혜은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9년 말 YWCA 멤버였던 방의경은 이백천이 주도한 청개구리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이 시절 김민기는 가깝게 지냈던 동료였다. 하지만 그녀는 김민기의 ‘귀하’라는 창작곡을 듣고 음악적 갈등을 겪었다. “김민기의 어둡고 슬픈 스타일보다는 밝고 맑게 세상을 보게 할 수 있는 곡을 쓰고 싶었다”는 방의경은 1970년 첫 창작곡 ‘겨울’을 시작으로 30여 곡이 넘는 곡을 창작했다. “곡을 만들게 될 때 가슴이 벌렁벌렁 뛰면서 전깃줄에 감전되듯 저절로 가사와 곡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녀는 하루에 몇 곡을 쓸 만큼 창작의 물꼬가 트였다. 1970년 초 이백천과 길옥윤이 주도한 ‘음악으로 세상을 정화하는 학생들’이라는 캠퍼스 쿠르세이더(학생 십자군)에 참여한 방의경은 김민기, 송창식 등 모든 통기타 가수들과 함께 KBS TV에 나가 한차례 합동공연을 했다.

그 해 가을, 선데이서울 심근수 기자의 요청으로 10여명의 대학가 노래 친구들이 대연각 호텔 옆에 새롭게 문을 연 음악 감상실 ‘내쉬빌’에 모여 단체 인터뷰를 했다. 내쉬빌 주인은 경기고 출신으로 정보국장의 아들이었던 이수일, 기업체 사장 아들 김무영(작고), 가난했지만 음악적 기둥이었던 김유복 등 3명이었다. 최고의 음향시설로 한국 포크의 메카를 꿈꿨던 이들은 상업적인 가수들을 배제하고 진지하게 창작곡으로 노래하는 사람들을 우대했던 한국 포크음악의 숨겨진 개척자들이다. 내쉬빌의 역사는 이들 3인방의 요청을 받아들인 방의경의 개인 리사이틀 무대로 시작되었다.
내쉬빌은 전국에서 무작정 상경 팀들이 모여들며 대학가 포크 싱어 송라이터들의 둥지로 자리잡았다. 어느 날 인기가수 조영남이 무대에 서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내쉬빌은 인기를 위해 활동한 대중 가수들을 거부했던 자존심이 있었다. 방의경은 이곳의 '두목'으로 불리었고 '방의경 아워'가 있는 날이면 관객을 선별해 입장시킬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평론가 이백천은 내쉬빌에 대적하기 위해 음악 감상실 르시랑스를 열었다. 그녀는 "배고픈 음악후배들을 위해 가끔 르시랑스에서 개런티를 받고 노래했다"고 기억한다.
이후 방의경은 청개구리 첫 공연과 김민기의 첫 개인 연주회에 찬조 출연하며 활발한 노래 활동을 펼쳤다. 1971년 말 기독교 방송 PD 김진성과 평론가 최경식이 제작한 김민기의 독집음반을 접한 내쉬빌 세 주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자극을 받은 이들은 내쉬빌의 음악을 남기기 위해 음반을 제작하자고 했다. 멤버들을 만날 때마다 각각 녹음을 했다. 당시 방의경은 기타 세션을 자청한 미8군 기타리스트 그레그와 함께 '불나무'를 녹음했다. 내쉬빌 주인들은 수원 시민회관에서 '우리들'이라는 3일간의 역사적인 포크 공연을 기획했다. 방의경은 첫날 공연에 참여했다.
500장 한정 본으로 발매된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노래-유니버샬,1972'은 이때의 음원이 담겨진 소중한 음반이다. 두 차례에 걸쳐 재발매된 이 음반은 김민기의 독집 음반과 더불어 한국 포크 사에 중요한 명반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방의경은 72년 4월 청개구리에서 개인 리사이틀을 필두로 맷돌공연에도 특별게스트로 몇 차례 참여했다. 이후 김진성 PD의 6개월 간 설득 끝에 기독교방송 '세븐틴'의 DJ로 나섰다. 이때 게스트로 나온 보성고 3학년 김의철과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이후 두 사람은 의남매를 맺어 인생과 음악적 인연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4개월 남짓 짧았던 DJ생활을 그만두고 머리를 식힐 겸 시골로 여행을 다녀오자 성음제작소 나현구 사장이 음반 제작을 청해왔다.

그녀의 유일한 독집음반 <방의경 내노래 모음-유니버샬,1972년>은 포크 팬이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음반이다. 어두운 사회현실을 너무도 맑고 아름다운 은유적인 노랫말로 표현한 11곡은 피끓는 젊은 영혼들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노래들은 단 한번일지라도 노래를 듣고 나면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발휘했다. 이 당시 미8군 가수 장미리는 그녀의 노래에 매료된 동생 장은아를 데리고 방의경의 집으로 찾아가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녀의 노래 '불나무'는 암에 걸린 줄 알았던 환자에게 생명의 불씨를 지펴준 사연으로 포크 팬들 사이엔 유명하다.

박정철 회현동 R레코드 사장은 "방의경 독집 음반은 6년 전 음반 애호가들 사이에 존재유무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던 귀한 음반"이라고 전한다. 이 음반은 현재 200만원을 호가하며 가요 음반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방의경은 "독집은 녹음도 마음에 들지 않고 재킷 사진도 레코드사에서 일방적으로 선정해 큰 애착이 없다"고 밝힌다. 독집 음반은 발매 즉시 방송과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시중 음반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그녀의 모든 음반은 칼로 그어져 폐기되었다. " '아름다운 것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노래가 금지됐어요. 데모하다 죽은 학생들의 삶이 슬퍼 지은 '하양나비'도 그렇고 '불나무'도 사전에 없는 말이라며 금지 곡이 되었어요" 어느 날 그녀의 이대 선배인 KBS 라디오 PD가 "펑크 낸 가수의 대타로 노래를 불러달라"며 연락이 왔다. 성질이 난 그녀는 남산의 ‘그곳’을 은유한 '검은 산'을 불러, 그 여파로 프로그램이 통째로 심의에 걸려 취소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감시의 눈길을 받았던 그녀는 홍보협회에 취직해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헬로 코리아'프로그램 제작을 맡았다.
1974년엔 TBC '5?쳄? 다이얼'의 DJ를 다시 맡았지만 억울한 이유로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DJ를 그만둔 어느 날, 이대부고 동창의 형이었던 장충동 스튜디오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2집 녹음에 들어갔다. 자정을 넘어 통금이 되자 문을 잠그고 비밀리에 밤샘 녹음을 했다. 이때 녹음한 ‘하양나비’, ‘마른 풀’, ‘검은 산’등 30여 곡은 시대의 아픔에 분노하고 슬픔을 어루만진 방의경 음악의 진수였지만 마스터 음원이 분실되어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귀한 우리 문화를 경시하고 미국화 되어 가는 사회 분위기가 싫어 1976년 결혼 후 이민을 떠났다. "미국 땅에서 문화대결을 해보자"는 의욕으로 떠났지만 이민 초기 뉴욕에서 액세서리 물품 보따리 장사를 하며 숱한 고생과 좌절을 겪었다. 1980년 초에는 LA로 건너갔다. 세계적인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그녀가 만든 벨트를 차고 TV에 출연할 정도로 성공을 했지만 84년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1994년 장신구 사업관계로 18년 만에 귀국해 후배 양희은과 함께 KBS 2TV '심야에의 초대'에 출연했다.
방의경은 2002년 초 인터넷 사이트 '윈드버드'에 자신의 게시판이 생겼다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그해 11월 다시 귀국한 것은 잊어버렸던 노래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를 잊지 못하는 많은 팬들을 확인하곤 감동했다.
그녀는 꽃피우기도 전에 가슴속에 묻어둔 자기 음악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군사정권에 의해 생매장되고 거세된 그녀의 모든 노래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새롭게 환생하는 그 날이

3   rainbows79 [ 2017-06-16 14:26:37 ]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naesjic?님 방가 방가 오랫만! 방가

2   naesjic [ 2017-06-16 14:22:30 ] 

양희은과는 친구?? 선배? 라고 하는것 같더만요.

1   naesjic [ 2017-06-16 14:20:35 ] 

저두 아침이슬 상록수 아주 좋아함.
가끔 흥얼거릴 정도. 가사는 못외움.
부르는것 보단 듣는걸 좋아함.
가사보단 멜로디에 더 익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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