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Los Angeles
열린 마당
제목 소낙비
작성자 rainbows79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르쳤다

때 늦은 의원이 아무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의 시 - 암울한 시대의 방랑자




윤동주 / 시인


번개, 뇌성, 왁자기근 뚜다려
머ㅡㄴ 도회지(都會地)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벼룻짱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庭園)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湖水)되기 일수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내 경건(敬虔)한 마음을 모셔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



1937년 8월 9일



[출처] 윤동주 - 소낙비 [여름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시] [아름다운 시]|작성자 귀공자


정연복의 ‘


+ 소낙비



간밤에 퍼부은

한바탕의 소낙비에



오늘은 모처럼

시원한 아침이다.



오래 목말랐던 이파리들도

갈증이 꽤 풀린 듯



실바람 더불어

가벼이 몸을 흔든다.



잠시 내렸을 뿐인데도

온 땅에 생명을 가져오는



소낙비여 하늘에서 내려온

고마운 소낙비여.





+ 소낙비



불현듯 내리는

한바탕의 소낙비에



갑갑했던 숨통

탁 트인다.



사랑의 기쁨도

삶의 괴로움과 슬픔도



이따금 소낙비같이

찾아오기를!



생기 잃고

팍팍할 때가 많은



내 가슴 촉촉이

적시어 주기를!





+ 소낙비



온 땅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가뭄에



한줄기 비가

몹시도 아쉬웠는데



며칠 새 밤낮으로

오락가락 소낙비 내리니



숨통이 확 트인다

세상에 생기가 돋는다.



주룩주룩

고마운 소낙비야



땅만 적시지 말고

내 마음도 적셔 주렴



감정이 메말라 버린

내 가슴도 흠뻑 젖게 해주렴



내 생의 사랑의 가뭄

해갈시켜 주렴.





+ 소낙비



목 타는 한여름

소낙비 한줄기 내리면



시들했던 나무 이파리들

파릇한 생기로 되살아난다.



갑작스레 쏟아진 소낙비에

온몸 흠뻑 젖은 두 사람



같이 비를 맞음으로

마음의 거리가 더 좁혀진다.



가끔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통의 소낙비 속을 통과하면서



사랑의 영혼

한층 더 깊고 견고해진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도봉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먼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5월이 오면

- 조병5월이 오면꽃피는 산기슭그곳에서

손을 잡자인가도 보이지 않는

인적도 보이지 않는

인성도 들리지 않는

산기슭5월이 오면 

일년 한번그곳에서

손을 잡자대지에

하늘에가득한빛빛으로

목욕을 하며이

한달너와 같이 하는

이 무한이 무한 속에서 유한한 건

너와 나의 목숨뿐

5월이 오면먼

산기슭 그 곳에서 손을 잡자


행복 - 유치환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던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어머니 - 한하운


한하운어머니나를 낳으실 때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나를 낳으신 뒤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병들어 죽으실 때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흙으로 돌아가신말이 없는 어머니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고향

그리워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어린 때

그리워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인환(人還)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피-ㄹ 닐니리.



▲ 일러스트=권신아사월이면 보리가 패기 시작한다.

초록이 지천으로 팬 보리밭을 지날 적이면 보리피리가 불고 싶어진다.
보리의 싹이 나오기 전의 보릿대를 꺾어 불면 피-ㄹ- 소리가 났다.
보릿대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손톱으로 작은 구멍을 내 요령껏 불면 피-ㄹ 닐니리 소리가 나기도 했다.

청보리밭의 소리이자 고향의 소리
피-ㄹ 닐니리. 피-ㄹ 닐니리는 향수의 소리다.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1920~1975).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문둥이'였다.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36년 17세의 나이에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도청에 근무하며 양양한 미래를 시작하던 25세에 다시 악화되어 직장도 그만 두고 숨어들었다.
이때 이름도 하운(何雲, 어찌 내 인생이 떠도는 구름이 되었느냐)으로 바꾸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월남했다.
구걸을 하며 연명하다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1949년 《신천지》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외 12편이 실리면서,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죄수' '정처 없는 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방황하고 섰는 걸인'으로 소개되었다.

〈보리피리〉를 읽다보면 말 그대로 '천형(天刑)'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의 삶과 세월이 떠오른다.
보리피리를 불며 가는 '꽃 청산', '인환(인간의 세계)의 거리', '방랑의 기산하(많은 산과 들)'는, 그의 고향 함경도 함주에서부터 남쪽 끝 섬 소록도까지 이르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고향 들판에서 불었던 보리피리를 불며 그는 내내 그 멀고 먼 거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온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러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파랑새〉)라고 노래하며.
시는 행간을, 행간의 여백을 읽는 일이다.
이 시는 신문사에 갔다가 즉석에서 써준 즉흥시다.

한 편의 시에, 가곡이나 가요로 가장 많은 곡이 붙여진 시이기도 하다.
그의 삶이 그토록 불우하고 파란만장하지 않았더라면, '인환'이나 '기산하' 같은 한자어를 제외한다면 동시라 해도 무방할 이 단순한 시가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기운생동 창끝처럼 패는 새파란 보리가,
지는 꽃처럼 문드러지는 붉은 살끝을 거느리고 있기에,
피-ㄹ 닐니리 봄의 보리피리 소리가 한층 깊고 서럽다.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히 없을 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삶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구경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 자리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 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을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추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 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2017-07-28 17:05:24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rainbows79 [ 2017-07-29 03:05:24 ] 

드보라님! 노플로브레마 ㅎㅎ

1   deborah9 [ 2017-07-28 20:55:55 ] 

Thanks rainbow for the all the beautiful poets. We need this vatamins to our soul once in a wh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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