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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附 和 雷 同 (부화뇌동)
작성자 rainbows79

附 和 雷 同 (부화뇌동)
• 부화뇌동
• 부ː화^뇌동 경박하다
• 附 붙을 부
• 和 화할 화
• 雷 우레 뇌(뢰)
• 同 한가지 동

「우레 소리에 맞춰 함께한다」는 뜻으로,자신(自 身)의 뚜렷한 소신 없이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意 味)함

예기(禮 記)의 곡례(曲 禮)
유래
「다른 사람의 말을 자기 말처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意 見)에 동조하지 마라. 옛 성현을 모범(模 範)으로 삼고 선왕(先 王)의 가르침에 따라 이야기하라.」

이것은 손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禮 節)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또 논어(論 語) <자로(子 路)>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공자(孔 子)가 말하기를, 군자(君 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 않는다(子 曰 君 子 和 而 不 同 小 人 同 而 不 和).」
군자(君 子)는 남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남과 조화(調 和)를 이루면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遂 行)하므로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소인은 이익(利 益)을 좇으므로 이익(利 益)을 같이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행동(行 動)하지만 남과는 조화(調 和)를 이루지 못한다. 우레가 한번 쳤다 하면 천지만물(天 地 萬 物)은 이에 호응하듯이 연달아 덜컥 거린다.
이처럼 자신의 줏대와 기준을 망각한 채 이해(理 解)관계(關 係)에 따라서 혹은 무조건 남의 주장(主 張)에 따르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 야당에 주려고 옛 성현들이 준비해둔 말입니다.

필사즉생필생즉사 (必死則生必生則死)
必 반드시 필
死 죽을 사
則 곧 즉
生 살 생

죽기로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도망치면 반드시 죽는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충신의 覺悟(각오)를 吐露(토로)하는
말입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합니까?
이순신 장군입니다.

잘 보시면 임진왜란 당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좌충우돌, 동충서돌 , 우왕좌왕 , 갈팡질팡 정신을 못차립니다.
옛 속담에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했는데 그러지 못하니
보수 당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임란 때의 조정대신들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입니다.

“조선조 선조대, 200여 년간 평화를 누려온 조선의 조정은 국방을 소홀히 한 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져 당파싸움에 휘말려 있었다.

네 지금의 여당과 야당입니다.

그 즈음,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풍신수길은 불만을 품은 군사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고 명나라와 조선을 침략할 생각을 굳힌다.

지금의 헐벗고 폭정에 시달리는 북한이고 북한 사람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는 김정은입니다.
남한과 미국에 대해 공갈과 협박을 합니다.


이때 조선은 육군을 증강하여 육지에서 왜군을 무찌르자는 수군무용론이 팽배한다.
이 문제로 조선 조정이 탁상공론을 벌이고 있을 때 풍신수길은 명나라를 칠 테니 조선의 길을 내어 달라고 요구하지만 조선 조정은 이를 묵살한다.
마침내 1592년 임진년 4월, 풍신수길은 병선 700척을 은밀히 조선의 부산포로 보내고 7년간의 임진왜란은 시작된다.”

수군무용론은 대한민국 군대의 무용론입니다.
육군만이 그동안 군부를 장악하고 국방장관이 되야하고 오늘 날과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한 수군 병사가 왜군의 침범을 김성일 통신사 부사에게 알리지만, 김 부사는 흔히 있는 일이라며 이를 묵살한다.
이때 황윤길 통신사 정사가 나타나자 그 병사는 황 정사에게 왜군의 침범 사실을 알리지만, 김 부사는 다시 한 번 그의 말을 묵살한다.

선조는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 정사와 김성일 부사에게 풍신수길의 인품에 대해 묻는다. 이에 황 정사는 그가 몸집은 작으나 눈이 매와 같아 담력이 대단한 인물이라 답한다.
반면에 김 부사는 그가 원숭이를 닮아 큰일을 저지를 인물이 못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선조는 김성일 부사의 말을 믿고 웃어넘긴다.

그동안 군부독재 정권의 행태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집권해야 만이 북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킨다, 걱정마라
다른 것은 몰라도 안보하면 수구보수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이제 집권한지 백일도 안 된 진보정권 탓이다?

왜군의 배들이 경상도의 해변 마을을 침범하면서 조총을 쏘아대자 백성들은 혼란에 빠진다. 병사가 해변 마을 사또에게 조총의 존재를 알리자, 사또는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를 명하며 조선의 전선을 불태울 것을 지시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보수들입니다.
조총은 북한의 핵폭탄입니다.
싸워볼 생각도 못하고 목을 길게 내리고 명만 바라봅니다.
명나라 지금의 미국입니다.
미국에 평화를 구걸합니다.
그것으로 모자라 왕에게 구호만 외치라고 미국에 (명) 도움을 안 청한다고 난리굿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달아날 궁리만하고 헛소리 일색이고 (조총을 쏘아대자 백성들은 혼란에 빠진다) 미사일 발사한 것도 아니고 쏜다고 하니까 난리난리 이런 난리가 없습니다.
자중지란 상태에서 뚜렷한 대안도 없이 그저 미국에 빨리 구조요청(싸드배치) 안한다고
자중지란에 빠집니다.
다행히도 그때와 다른 것 임금이 선조가 아니고 자기만 살겠다고 한강다리 폭파하고 백성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이승만 아니고 문민 대통령입니다.

어느 분이 영국과 프랑스인의 국민성을 비교합니다.
위기상황에서의 대처 프랑스인은 호들갑이 전부입니다.
벼랑 끝에서 (위기 상황에서) 같이 비명을 지른다면요?
다 죽습니다, 그들만 바라보는 백성들은요?
그 영어 교과서에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어떤 자가 성경을 세익스피어가 지었다고 박박 우기고 다른 친구는 아니라고 싸우다가 다른 3자에 물어보자 해서 찾아갔더니 세익스피어가 지은게 맞다고 합니다.

돌아이는 돌아가고 친구에 묻습니다.
왜 그렇게 엉뚱한 대답을 했느냐고 친구왈 돌아이에게 이겨먹어 뭐하게
그냥 저렇게 살다 죽게 둬라 한마디로 귀막고 개무시해라입니다.
쓸데없이 시간낭비고 정력낭비라는 말입니다.
개무시 당하는 것도 모르고 가라보수들은 악다구리 전부입니다.

왜군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원균의 수군을 몰아붙인다.
이순신 장군은 왜선 수백 척이 몰려와 부산성과 동래성이 함락되고 원균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는 원균을 돕기 위해 배들을 이동시키는 와중에, 탈영한 수군 병사를 벌한다.
이순신은 그를 크게 꾸짖으며 뱃머리에 묶고 배와 생사를 함께할 것을 명한다.
필사즉생필생즉사 (必死則生必生則死)를 말하십니다.

한편으로 이순신은 탈영 병사 옆에서 왜군의 조총에 맞서 활을 쏘며 병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병사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사람을 엄하게 꾸짖음으로써 백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의 예를 보여주는 동시에 병사를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저 보수 쓰레기들을 일벌백계할 방법이 없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순신은 적진을 뚫고 원균을 구출한다. 그러나 원균은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는 동시에 왜군의 코를 베어 승리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 한다.
이어 이순신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후퇴하고 왜군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이순신의 전함을 따라오며 공격을 퍼붓는다.
지금의 보수들 해방 후에 온갖 요직을 차지하고 거꾸로 독립군의 후손들은 개무시를 당합니다.

그때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정희, 백선엽은 구국의 영웅으로 등장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습니다.

이때 거북선이 나타나 적선을 파괴하고 이순신의 함대는 대승을 거둔다.
분노한 민초들 이름없는 군인들 맨몸으로 폭탄을 들고 적의 탱크 밑으로 들어가
산화하고 학생의 신분으로 자원입대한 수많은 민초들이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월남과 다른 점입니다.
같은 점은 패망전 월남처럼 자신의 안위와 부정축재에 여념이 없고 자기 살기에 바쁜
지금의 대한민국의 4분5열된 위정자들입니다.

풍신수길은 패전에 대노하여 이순신과 가족의 제거를 명한다.
반면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어명을 어기고 남의 공을 가로챘다는 혐의로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원균은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폭풍우 속에 무리하게 함대를 기동했고,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은 큰 타격을 입는다.
육지로 달아난 원균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선의 바다는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다.
이에 이항복을 위시한 조정의 대신들은 이순신의 재기용을 선조에게 권유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다시 불러들인다.

지금의 가라보수들은 더 이상은 국론분열과 당쟁을 멈추고 나라가 망한 후에는
더 이상의 부정축재도 못하고 권세도 못 누리니 그만하라!
제 2의 월남 타운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이순신은 남아 있는 배 12척과 병사 425명으로 왜군과의 일전에 임한다. 물살이 빠른 울돌목에 쇠사슬을 치고 왜군들을 유인하여 침몰시키는 전략으로 대승을 거둔다.
왜군은 울돌목에서의 패전을 앙갚음하기 위해 이순신의 아들 면을 살해한다. 이순신은 깊은 시름에 잠긴다. 다음 날,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선을 격파하기 위하여 학익진을 펼치고 거북선을 동원해 왜군을 모조리 섬멸한다. 격전 중에 소년 병사를 구하려다 적의 총탄을 맞은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숨을 거둔다.

이렇게 죽지는 못하더라도 가문에 똥칠한 자로 기록되고 싶지 않다면,
사나이로 태어나서 어차피 죽을 목숨 가늘고 길게 사는것 보다는
자손들에게 떳떳한 한 세상을 살다가 갔노라고 자손들에게 돈 몇푼 남겨주는 것보다 얼마나 멋진가!

2017-08-12 09:15:28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4   bibliatell [ 2017-08-14 13:28:30 ] 

정말 좋은 역사적 사실들을 알게 해 주어 탱큐. 마누라가 김해 김씨인데, 좀 그렇고, 장인이 안의 사람. 학생 때 산골 산골지나 함양을 한 번 간 적이 있었는데 이런 대단한 역사적 사실들이 있을 줄이야. ㅎㅎ

3   rainbows79 [ 2017-08-12 13:30:53 ]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 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몸을 던졌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입간판은 피바위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그 혈흔(血痕)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피바위 위로는 족히 수십 m쯤 되는 가파른 벼랑이 산성으로 이어졌다.

420년 전 이맘때 숱한 아녀자들까지 비장한 죽음으로 내몬 왜군의 수괴는 가토 기요마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력제로 바치겠다며 조선 호랑이를 마구 사냥해 ‘호랑이 가토’로 불린 그는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학살자로 더 악명을 떨쳤다. 사명대사가 가토와의 대담에서 “조선 제일의 보배는 그대(가토)의 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조선의 원성을 샀던 인물이다.

가토는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이 승리하자, 곧바로 일본군 우군의 선봉을 맡아 육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왜군 총대장 고바야가와 히데아키는 좌군(4만9000여 명)과 우군(6만4000여 명)의 2개 군으로 재편성해 호남정벌 작전을 펼쳤다. 좌군은 진주와 구례를 거쳐 수군과 합세해 남원성을 공략한 뒤 전주성으로 가고, 우군은 밀양과 합천 등을 경유해 거창, 안의(안음) 등을 공략한 뒤 전주성에서 좌군과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우군 중 약 3만 명의 주력부대를 이끈 가토는 의병장 곽재우가 지키고 있는 화왕산성(창녕)을 포기하고, 대신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황석산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성을 지킨 백성과 도망간 순왜(順倭)

1597년 8월 15일, 가토가 이끄는 왜군이 겹겹이 포위한 황석산성은 전쟁의 살기(殺氣)가 성 안팎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모처럼의 풍년이 들어 성 안에는 곡식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왜군은 전쟁을 치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이 성을 탈취해야 했다.


왜군은 철포대를 배치하고, 둘레가 약 3km에 달하는 산성 주위 여러 산봉우리에 화포를 갖춘 진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왜군이 철포와 화포를 아무리 쏘아대도 성안의 조선 관군 500명과 백성 수천 명은 결사적으로 성을 방어했다(7000명이라는 주장도 있음). 예상 외의 저항에 부닥치자 당황한 왜군은 심리전을 펼쳤다. 왜군의 통사(通事·통역관)가 성 안 사람들에게 들리게 조선말로 소리쳤다.

“개산(介山)아. 네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아라.”

개산은 김해 사람이었다. 김해는 임진왜란 이후 일찌감치 왜군의 수중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순왜(順倭·왜군에 협력하는 자)가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개산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초부터 왜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일을 도왔다.(‘난중잡록’)

왜군이 김해 출신 성안 사람들을 겨냥한 심리전을 펼친다고 판단한 김해부사 겸 출전장(出戰將) 백사림은 본보기로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무장(武將)이기도 한 백사림은 자신의 관할 지역인 김해 사람들을 이끌고 황석산성에 합류해 동문과 북문을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100명의 개산을 죽인다 한들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하고 비웃었다. 다음날인 8월 16일, 통사가 또 와서 최후 통첩을 했다.

“성을 비워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난중잡록’)

그날 밤 왜군은 총 야간 공격을 펼쳤다. 성안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왜군과 맞섰다. 병사들은 활과 칼을 쓰며 왜군에게 대항했고, 무기가 없는 백성들은 낫과 죽창을 들었다. 부녀자들은 냇가의 돌을 실어 나르고 끓는 물을 이용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들과 맞섰다. 황석산성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성벽 주변에는 성내 계곡의 냇가에서 행주치마로 운반해온 듯한 주먹만 한 크기의 몽돌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부녀자들이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던진 난석(蘭石)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정예화된 왜군의 병력과 막강한 화력 앞에서 중과부족이었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김필동이 김해 사람 20여 명을 인솔해 몰래 동문을 열고 성을 빠져나가 왜적에게 투항해 버렸다. 성문을 지키던 백사림도 밧줄을 이용해 자신의 가족들을 먼저 탈출시킨 뒤, 왜군 복장으로 변복을 한 채 탈출했다(왜적에게 붙은 김해부의 아전과 백성들의 꼬임에 넘어가 백사림이 성을 넘어 도망쳤다는 기록도 있다).

산성내 조선 관군의 총지휘관인 백사림이 달아나자 군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성은 결국 무너졌다.

“당초 백사림은 ‘내가 비록 죽을지언정 성중(城中)에 앉아 있겠다’고 백성들에게 약속했었다. 백성들은 그 약속을 금석(金石)처럼 믿고 성중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온 성중 사람들이 그 기미도 모르고 모조리 왜적의 손에 함몰되게 하였으므로, 사로잡힌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선조실록’)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투는 이튿날인 8월 17일까지 이어졌다. 백사림이 달아난 것도 모른 채 성의 남문을 지키던 수성장(守城將) 곽준(안음현감)은 끝까지 성안 사람들과 함께했다. 성내로 침입한 왜군들이 사람들을 마구 도륙했다. 곽준의 아들과 사위들이 울면서 빨리 피신책을 세울 것을 청했다. 곽준은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운단 말인가”하고 웃으며 말했다. 곽준은 왜군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해 무기고와 식량 창고를 불태우도록 한 뒤, 호상(胡床)에 태연하게 걸터앉아 왜군의 칼을 받았다. 왜군은 곽준의 목을 베어 수급을 챙겼다. 곽준의 두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가 아버지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여버렸다. 가까스로 성을 빠져나온 곽준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마저 왜적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말았다.(‘선조수정실록’)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을 보수하다가 병을 얻어 벼슬을 내려놓은 조종도(전 함양군수) 역시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종도는 “성이 위태롭고 소임이 교체됐으니 떠나도 된다”고 사람들이 권했지만 듣지 않고 성내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평상시 벗에게 죽기로 약속해도 배반해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국가를 위해 성을 지키자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적병이 이미 움직였는데 새 군수는 도착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곧장 떠날 수 있겠는가.”(‘대소헌행장’)

조종도는 성안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들을 설득해 함께 성을 지켰다. 그는 성으로 들어가기 전 ‘공동산 밖에서 사는 것도 즐겁지만(공동山外生猶喜), 장순과 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이네(巡遠城中死亦榮)’라는 시를 남겼고, 그 시처럼 황석산성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그의 부인과 아들도 절명했다.(‘징비록’)

피신을 권유받던 군무장 유명개(거창좌수) 또한 “구차히 살아서 무엇을 하리. 너희들은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라”고 한 뒤 순절했다. 그의 부인은 자결했다. 두 아들은 이미 북문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유명개는 황석산성을 보수할 때 많은 재산을 희사하고 가노까지 동원하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인물이다.

남편의 명예를 위해 순절한 여성도 있었다. 거창현감 한형이 군병을 모집하는 일로 밖에 나가 있던 참에 아내 이 씨는 성 안에 있다가 적의 공격을 받았다. 이 씨는 남편이 군병 모집을 핑계로 도망쳤다는 오해를 살까봐, 성 밖으로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었다. 결국 이 씨는 성이 함락되자 그의 딸 한 씨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시비(侍婢) 한 사람도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선조실록’)

황석산성 전투는 이처럼 조선 지도층의 강건한 선비정신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보여준 숭고한 역사로 평가된다.

8월 17일 왜군은 산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천 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다. 성안에 남아 있던 곡물들은 모두 왜군들에게 약탈당했다. 가토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주인장(朱印狀)’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밤에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김해상관의 목을 베고(곽준을 백사림으로 오인), 성 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1597년 8월 17일 작성)

숭고한 희생의 중심이었던 백성들


황석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황암사(앞)와 의총(뒤). 오른쪽 사진은 성이 함락되자 수많은 여인들이 벼랑 위에서 스스로 떨어져 피로 얼룩졌던 ‘피바위’. 함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함양군 제공
조선 관군과 백성이 거의 몰살됐다는 뜻이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도망쳐 나온 백사림은 이후 투옥돼 심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로도 산성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가 10여년간 끊이지 않았다.

황석산성 전투 결과를 당대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죽음이 뻔한 상황에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백사림이 몰래 도망간 것은 잘한 일’이라고 비호하거나 ‘곽준이 성을 지킨 것은 헛된 죽음’이라고 곽준의 죽음을 폄훼하는 세력도 있었다.(‘대암집’)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공직자인 백사림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420년 전의 백사림은 살아남았지만, 42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오욕(汚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자는 황석산성에 이어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의 황암사를 찾았다. 황암사는 정유재란이 끝난 지 100여 년 후인 1714년 숙종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사(義士)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직접 제관(祭官)들을 파견해 제향을 올렸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불태워 없애버렸는데, 2001년 지역 민간인들이 힘을 합해 재건했다. 사당 뒤에는 당시 사망한 3500여 명의 백성들을 기리는 호국의총도 새로 조성됐다.




매년 황석산성이 함락되던 날을 추념하는 제사 때만 공개되는 사당문을 안의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열고 들어가 보았다. 사당은 중앙에 3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 각각 3위와 4위의 신위가 배치돼 있었다. 놀랍게도 사당 중앙의 신위 3위 중 한가운데는 ‘황석산성순국선열제위’라는 이름의 신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좌우로 조선의 선비정신을 실천한 곽준(왼쪽)과 조종도(오른쪽)의 신위가 모셔졌다. 민초와 관리 구분없이 황석산성에서 산화한 모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배치였다. 다른 배향 시설에는 좀체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였다. 사당 한쪽 곁에 새겨진 충혼비 비문이 잊혀지지 않는다. 2001년 황암사를 중건하면서 시인 구상(작고)이 남긴 글이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싸움에서 이런 충의와 충용과 충절에 빛나는 호국의 충혼을 찾을 것인가.”

함양=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812/85793126/1#csidx3a85c501f0feed5b09ee8e1ecebe06d

2   rainbows79 [ 2017-08-12 10:40:17 ] 

그 당시에 같이 근무했던 나의 전우들은 부화뇌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방송이 나오면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피식 웃기만 했지만
그저 오고가는 눈빛으로 서로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지금의 위정자들처럼 좌불안석 안했고 지금의 여러분들은 더 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저 오고가는 눈빛으로 서로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1   rainbows79 [ 2017-08-12 10:28:48 ] 

오늘도 불철주야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의 안위를 지켜내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국군장병 여러분 본인도 젊은 시절에 최전방 철원에서
철책근무를 했었고 5.18 광주 항쟁 당시에 북이 남침하겠노라고 대남 방송으로
밤낮으로 떠들어 댔습니다.
사랑해마지 않는 나의 자랑스러운 후배 여러분들 윗물 탓은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백년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위정자들이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오로지 여러분들의 어깨에
달려있음을 단 한시도 잊지 마시고 일당백은 아닐지라도 최후의 순간이 오면
최소한 빨갱이 10명은 보내고 가시기 바랍니다.
두 다리가 잘리고 한 팔이 떨어져 나가도 마지막으로 방아쇠를 당길 힘만
남아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자랑스런 후배들을 죽어서도 기억 할 것입니다.
스스로 돕지 않는다면 하늘도 돕지 못함을 명심 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본인이 과거에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각오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만 조국의 미래는 당신들의
어깨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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