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역사적 인물 중에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분을 생각 할 때마다 가슴이 찡해옵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도 좋아하셨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김대중’과 ‘마지막’을 입력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마지막 연설 동영상이 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9일 뒤인 2009년 6월11일 6·15 기념식에서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호소했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민주주의가 기로에 몰리던 시점에 터져나온 김 대통령의 피맺힌 ‘유언’을 사람들은 가슴 한편에 불씨로 간직했다가 지난겨울 촛불로 피워올렸다.
김 대통령 서거 8주기(8월18일)를 앞두고 목포와 광주, 서울 등지에서 열린 추모행사는 전보다 볼륨이 커졌고, 참가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고인의 일생 과업인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다만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2편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추모열기가 활발한 반면, 김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14일 김 대통령의 셋째 아들 김홍걸(54)을 고인의 자택이 있는 서울 동교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김홍걸은 지난해 초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뒤 총선과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도왔고, 국민통합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이다.
김홍걸은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에게 김대중 정신과 철학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며 “아버지의 유업인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기회가 주어진다면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관련해 “평생 음해와 오해에 시달렸던 아버지라면 우선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하실 것”이라며 적폐청산과 개혁 작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언론개혁이 시급하다고 했다.
2시간 반의 인터뷰에서 김홍걸이 기억해낸 고인은 ‘호기심이 왕성하고, 책읽기와 사색을 즐기며 끊임없이 대안을 내놓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정치인이자, ‘안타깝게도 자상한 가장이 될 기회가 없던’ 바쁜 아버지였다.
■“촛불혁명, 보셨다면 매우 기뻐했을 것”
- 지난 6일 목포에서 8주기 추모 ‘김대중 평화캠프’가 열렸다. 정권교체 이후 첫 추모행사였는데 가보니 어땠나.
“고인의 업적이 지난 9년간 훼손돼 많이들 안타까워했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밝아진 느낌이다. 사람들 표정에서 기대감과 희망이 엿보였다.”
- 이희호 여사와 가족들의 근황이 궁금하다.
“어머니는 동교동 자택에 계시는데 연로하셔서 바깥출입은 큰 행사 외엔 잘 안 하신다. 큰형님(김홍일)은 파킨슨병이 악화돼 10년 넘게 거동을 못하고 있다.
1980년 신군부에 연행됐을 때 고문을 심하게 당한 후유증이다. 둘째 형님(김홍업)은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김대중대통령기념사업회 일을 거들고 있다.”
- 김 대통령이 2009년 6·15 기념식에서 한 연설이 두고두고 회자됐고, 촛불혁명에도 영향을 준 것 같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때 벌어진 촛불집회를 보고 아버지가 ‘이제 국민이 정치권을 이끌어가는 직접민주주의 시대가 됐다’고 하시더라.
그게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촛불혁명일 것이다.
평생 국민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던 아버지가 직접 보셨다면 굉장히 기뻐했을 것 같다.”
- 노 대통령 다큐멘터리는 2편이 나왔는데 김 대통령 다큐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은 아무래도 젊은 지지자들이 많아 추모가 적극적인 것 같다. 아버지를 모셨던 분들이 고인의 철학과 발자취를 되새기는 작업에 좀 더 적극 나섰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현실정치보다 그런 일에 힘을 써주셨으면 좋겠다.”
- 김 대통령의 영상기록도 유신 이전 것은 제대로 없는 것 같다.
“당시엔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었고, 1971년 대선 이후에는 제도권 정치에서 추방돼 있었으니 제대로 챙길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국가정보원에 자료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문서자료는 김대중도서관이 꾸준히 수집하고 있지만, 정보기관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자서전을 보면 김 대통령이 1980년 사형선고를 받자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일본 총리에게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서한을 보낸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일본에는 보수·진보 구분 없이 아버지에게 매료된 정치인들이 꽤 있었다.
‘고노담화’의 주역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외무상은 야당 총재로 방일한 아버지를 스승처럼 대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이 1973년 아버지를 도쿄에서 납치해 죽이려다 오히려 국제적인 거물 정치인으로 만들어준 셈이다.
전후(戰後) 일본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삶을 산 정치인이 드물기도 했다. 이런 이력이 대일외교에 작용해 1998년 한·일 정상회담이 역대 가장 성공한 회담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 일본에는 세습 정치인들이 많아 ‘사형수가 대통령이 된’ 인간 드라마가 호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지는 않았다.
상대와 관계를 좋게 이끌면서도 원칙은 양보하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좌우명으로 하셨다.
아버지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외교가 국운을 좌우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 취임 초기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했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2년 방한해서는 김 대통령에게 설복돼 대북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미국과 의견이 다르면 ‘반미’라거나 ‘동맹을 뒤흔든다’고 하지만 사실 한·미관계가 가장 나빴던 시기는 박정희 정권 말기와 김영삼 정권 아닌가.
부시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는 아버지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개성공단도 미국이 회의적이었지만 꾸준히 설득해 이뤄냈고, 미사일방어(MD) 체계 편입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관계 악화는 방지했다.”
■서태지를 좋아했던 김 대통령
- 김 대통령의 회고를 보면 가수 서태지의 노래를 좋아해 차에서 듣곤 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나이가 드셨어도 계속 새로운 것, 새 트렌드를 익히고 적응하려 하셨다.”
- 집에서의 모습은 어땠나.
“정치를 활발하게 하실 때는 뵙기 어려웠다. 가택연금을 당해서도 거의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공부하셨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올 때를 대비해 꾸준히 준비하신 거다.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모의회담을 하는데 김정일 위원장 역이 난감한 질문들을 쏟아냈는데도 막힘없이 답변하셨다더라. 임기응변이 아니라 ‘대통령이 돼 북한 지도자와 만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걸 수십년간 머릿속에서 연습하셨기 때문이다.”
- 김 대통령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나.
“대부분 자서전에 쓰셨는데…. 아버지는 천성이 모질지 못해 공격이나 탄압을 받아도 원한을 갖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총살당할 뻔했는데 그러면 보통은 극우 반공주의자가 되잖나.
아버지는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셨다. 정치할 때도 정적을 근거 없이 비방하는 대신 한발 앞선 대안을 내놓고 합리적으로 비판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저 사람에게 정권을 뺏길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거다.”
-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신앙심이나 인내심, 관용의 정신이 커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1982년 말 (전두환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아버지가 가족들과 함께 10년 만에 미국에 건너갔다. 1
0년 전 아버지를 돕던 이들 중 변절해 전두환 정권에 협력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챙기셨다.
납치사건에 가담했던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하셨다.”
- 아들로서 아버지의 어떤 모습이 가장 인상에 남았나.
“아무래도 죽음의 고비에 처했을 때다. 1973년 도쿄에서 납치당했을 때, 1980년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다.
피랍 5일째 동교동 집에 정치인, 기자, 친척들이 모여 있었는데 저녁 8~9시쯤 갑자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아버지가 문 앞에 덩그러니 서 계셨다.”
- 김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인연이 있나.
“아버지가 노 대통령 서거 얼마 후 문재인 대통령 등 노 대통령 측근들과 당신 측근들을 한데 불러 식사하면서 당부하셨다.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은 다 잊고 야권이 통합해 정권교체를 이루라’고. 그 말씀 하시고 두 달쯤 뒤 돌아가셨다.
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정신적 충격이 컸고, 장례식 날 더운 곳에 오래 앉아 계셔 몸이 많이 상했다.”
- 문재인 정부 100일을 평가한다면.
“아직 평가는 이른 것 같다. 다만, 당부하자면 지지율 하락을 각오하고 적폐청산과 개혁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개혁 작업이 본격화되면 불만과 반발이 터져나오고 현재 수준(70~80%대)의 지지율도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20%포인트쯤 빠져도 50~60%대라 낮은 지지율이 아니다.”
- 김 대통령이라면 특히 어떤 부문의 개혁을 당부했을 것 같은가.
“언론이 바로 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이번에 공영방송 문제도 불거졌고, 삼성과 언론사 간부들 간 문자 내용이 공개되면서 언론과 재벌 간의 유착도 드러났다. 적폐청산을 하려면 언론이 제대로 보도해 국민 지지를 받아야 하니 언론개혁이 중요하다.”
- 자서전을 봐도 언론에 대한 야속함이 표출돼 있더라.
“언론이 상대 후보를 미화하지 않고 편견 없이 보도했더라면 1992년, 아니면 1987년 선거에서 아버지가 당선됐을지 모른다.
부당하게 공격받은 일이 워낙 많아 한이 남았던 것 같다.”
■“남북관계에 필요하다면 역할 하겠다”
- 김 대통령 재임 시에 비해 한반도 긴장이 더 높아진 것 같다.
“남북대화의 여건은 나서서 만들어야지,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간 영영 못하게 된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남북관계에서 실패를 두려워해 시도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막판까지 의제가 합의되지 않았다.
북측 실무진이 나중에 ‘김 대통령은 정말 대단한 분’이라며 놀라더라.
성과가 없으면 정치적으로 곤란해질 수 있는데도 배짱 좋게 올라오셔서 감탄했다는 거다.
그런 태도라야 남북관계가 풀린다. 남북 문제에서 미국과 보수언론, 북한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못한다.”
- 김 대통령이라면 이미 북한은 물론 미국, 중국에 특사를 보내지 않았을까.
“정상회담 채널 외에도 특사를 보내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의 협조를 얻어내려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이 분야가 전공이나 다름없었지만 문 대통령은 보좌진의 어깨가 더 무거울 것 같다.”
- 북한이 유족에게 각별한 태도를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김홍걸 위원장이 남북관계에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쎄. 대북 경험이나 경력 있는 분들이 많으니. 다만, 아버지가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고 나도 6년 전 어머니를 모시고 김 위원장 조문을 다녀왔다.
북한은 유훈통치 국가여서 김정은 위원장의 아버지와 조부가 했던 일들은 꼭 받들어야 하는 사회다.
그런 면에서 내 역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하려고 생각한다.”
김홍걸은 2011년 12월 사망한 김정일 위원장 조문을 위해 이희호 여사, 작은형 김홍업, 현대아산 관계자 등과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과도 만났다.
“당시엔 앳돼 보였는데 몇달 뒤에 TV연설을 보니 외모나 목소리가 무게감 있게 바뀌었더라.”
- 김 대통령의 측근들 중 상당수가 국민의당에 가 있지만 김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언론에서 자꾸 ‘동교동계’라는 표현을 쓰는데 ‘동교동계’는 아버지가 20년 전 당선되면서 해체했다. ‘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할 때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않았던 구 민주당계’가 맞다.
호남 출신이고 아버지를 모신 적이 있어야만 ‘김대중 정신을 계승했다’는 것도 잘못이다. 고인의 정신과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
내가 국민의당으로 간 분들을 비판했던 이유가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다면서 정치적인 이익, 정치생명 연장에 더 관심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선 때 안철수 후보가 햇볕정책을 포기하는 듯한 발언을 해도 그분들 중 누구도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 어느 인터뷰에서 고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분이 워낙 하신 일이 많으니 다 이을 순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유업을 계승해 사람들이 김대중 정신과 철학을 잊지 않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홍걸은 한마디 더 보탰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정치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된 지금도 자유한국당이나 보수언론은 북한카드로 상대를 협박하고 있다.
북한과 관련된 것은 여전히 ‘금기’이고, 이대로라면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도 억압된다. 유럽이나 정치 선진국처럼 제약이 없어야 정치수준이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