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예측불능의 행태(unpredictable behavior)를 알고 난 이후엔 솔직히 말해서 한국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되었다.>
趙甲濟
부시 정부 8년간 백악관 안보 보좌관과 국무 장관으로서 北核 문제 등 한반도 사태를 다뤘던 콘돌리사 라이스씨가 2011년에 출간한 회고록 '최고의 명예'(No Higher Honor. 미국 크라운 출판사)는 흥미진진한 넌 픽션이다. 유명한 러시아 전문학자인 라이스씨는 아버지 부시 정부 시절에도 국가안보위원회(NSC)에서 일한 적이 있고, 스탠포드 대학교수로 돌아가 독일 통일 과정을 다룬 '독일은 통일되고, 유럽은 바뀌었다'는 名著(필립 젤리코와 共著)를 남겼다. 회고록은 학자 출신 관료가 쓴 책답게 치밀하고 일화가 많으며 날카롭다. 8년간 만난 여러 나라 지도자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그는 金大中, 盧武鉉 두 대통령을 상대하였는데, 好評(호평)이 아니다.
라이스는 김대중 대통령을 '부드러운 매너를 가진 老정치가'라고 표현하면서,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idealist)'라고 평했다.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정치인에게 하는 경우, 讚辭(찬사)라기보단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란 뜻이 될 수도 있다.
2001년 3월7일 김대중 대통령은 워싱턴에 가서 취임한 지 두 週가 지난 부시 대통령과 처음 회담하게 된다.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미리 관계자 회의를 통하여 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입장을 정리한다. 햇볕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 前任(전임) 클린턴 정부와는 다른 접근법을 택한다는 방침을 정하여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5시 未婚인 라이스 장관이 임시 거주하던 아파트로 전화가 걸려왔다. 부시 대통령이었다.
"워싱턴 포스터 봤어요?"
"대통령 각하, 아직 못 봤습니다."
"바깥에 나가서 신문을 갖고 들어오세요."
배달된 신문을 갖고 들어왔다.
"20 페이지를 펼치세요."
부시의 목소리는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포스트엔 콜린 파월 국무장관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다.
파월 장관은 기자에게 '미국은 한국측에 클린턴 정부의 對北접근 노선을 따를 것이라고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사화되어 있었다.
"내가 처리할까요, 귀관이 처리하겠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라이스는 즉시 콜린 파월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문을 보십시오."
파월은 문제를 곧 알아차렸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자신의 말을 과장하였다면서 수습하겠다고 했다.
<이라크 內戰이 김정일을 살렸다>
라이스는 김대중-부시 회담에 대하여 이런 평을 하였다.
<회담 분위기는 정중하였으나, 북한을 다루는 방향에 대하여는 저 세상 만큼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경우에도 북한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는 (클린턴 정부가 북한과 합의한)제네바 협약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하여는 아무 효과가 없고, 남한이 북한정권을 지탱해주고 있다고 믿었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의 暴政(폭정)에 화가 나 있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이런 데 반응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대중 訪美는 미국과 아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 균열하는 식으로 끝났다.>
라이스의 회고록 '최고의 명예'를 통하여 미국의 對北정책 변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의 對北전략이 2005년부터 '대화모드'로 바뀐다. 부시는 북한정권을 '악의 축'이라 부르고,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는 "나는 김정일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되집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3년 초엔 江澤民(강택민) 중국 주석에게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하여 필요하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압박하였다.
라이스도 회고록에서 북한정권을 '흡혈귀'에 비유하였다. 부통령 딕 체니도 강경파였다. 부시 대통령은 그러나 미군이 2003년 후반기부터 이라크 內戰이란 수렁에 빠지면서 北核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할 여력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맨 첨 궤도 수정을 示唆(시사)한 이도 부시였다. 고위 전략회의에서 부시는 라이스 장관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의 생존을 허용한다면 김정일은 핵무기를 포기할까?"
라이스는 "독재자는 시험해보지 않고선 알 수가 없다"고 답하였다. 다른 참모가 그렇게 되면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라는 목표를 포기하는 게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부시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아니다. 수단을 달리한 레짐 체인지이다. 개방하면 그는 절대로 생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부시 정부는, 북한의 핵 포기와 한국전 終戰선언 및 美北 수교를 교환하는 협상을 타진하기로 한다. 2006년 4월 胡錦濤(호금도) 중국 주석이 워싱턴을 방문하였을 때 부시는자신의 메시지를 김정일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렇게 하여 6자 회담과는 별도로 美北 직접 대화가 시작된다. 주한미국 대사를 지낸 크리스 힐이 미국 측 대표로 등장한다. 2년 여 계속된 美北 직접 대화는 그러나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무시당한 김대중-노무현>
이 기간에 북한정권은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동결된 북한자금의 해제, 테러지원국 해제 등의 양보를 받아낸다. 부시 행정부는 군사적 해결책을 포기하는 순간 중국의 협조도 받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다니다가 임기를 마치고 만 것이다. 외교 협상이 장기화되면 원래 목표(이 경우는 북핵폐기 및 정권 교체)를 상실하고 타협 자체가 목표로 되기 쉽다는 것이 새삼 입증된 셈이다.
라이스 회고록을 읽으면 北核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중국만 고려하였지 한국과 일본 정부의 의견은 거의 무시하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親北정책을 쓰는 바람에 부시 정부로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미국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무시하고 김정일만 상대한 느낌이다. 북한 핵개발의 피해당사자인 한국이 미국보다 더 강경하게 나가야 미국도 편해질 터인데, 사사건건 북한정권을 싸고도니 6자회담에서 스스로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때보다는 國力이 턱도 없이 약하였던 시절 李承晩 대통령은 공산세력과 미국 정부를 동시에 압박하는 목숨을 건 외교로써 한국의 생명줄인 韓美상호방위조약을 만들어냈다. 김일성을 애써 무시하고 스탈린과 상대하려 하였던 이 巨人과 김정일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미국 지도부의 경멸을 산 김대중, 노무현씨를 비교하면 國格이 반드시 國力과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라이스 회고록엔 미국이 중국을 압박, 6자회담으로 끌어들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2003년 3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6자 회담을 중국에 제의하였을 때 江澤民(강택민) 주석은 거절하였다. 화가 난 부시 대통령이 전화를 걸었다. 江 주석이 과거 여러 번 말하였던 대로 미국이 북한에 보다 신축성 있는 접근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부시는 말을 끊고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나는 강경파로부터 군사력을 사용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중국이 북한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노무현에 대한 最惡의 인물評>
이 통화 직후 중국은 6자회담에 동의하였다. 6자회담은 그러나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하였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유엔 안보리가 對北제재안을 통과시킨 직후 라이스 국무장관은 韓中日(한중일)을 방문한다.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라이스는 盧武鉉 대통령에 대하여 酷評(혹평)을 하였다. 필자는, 최고위 외교관이 동맹국의 국가원수를 이렇게 표현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그는 盧 대통령을 '(생각을)읽기 힘든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때로는 反美성향을 보여주는 말들을 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한 예로서 '그 전 訪韓 때 노 대통령은 나에게 강의를 하였는데, 남한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동맹국인 미국과 敵(북한)의 동맹국인 중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먼저 韓美동맹을 해체하고 중립을 선언해야 한다. 말도 되지 않는 균형자론 강의를 들어야 했던 학자 출신 라이스의 울분이 회고록에서 묻어나온다.
그는 <다음 해엔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erratic nature)을 집약한 사건이 있었다>고 썼다. 미국인이 상대방에게 'erratic nature'라고 말한다면 주먹다짐이 일어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 APEC 정상회담에 참석, 부시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기자들 앞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美北관계를 정상화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2005년 9월19일의 6자회담 합의에 들어 있는 내용이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충실하게 그 말을 되풀이하였다. 갑자기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질문하였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인지 모르겠는데, 부시 대통령께선 지금 한국전쟁 종전 선언을 언급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시 대통령, 그렇게 말하였습니까?"
부시 대통령은 盧 대통령의 참견에 다소 놀랐지만 앞의 설명을 반복하였다.
"김정일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무기와 핵개발 계획을 포기해야만 미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盧 대통령이 또 요구하였다.
"김정일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예측불능’ ‘괴상한’>
라이스는 '모두가 당혹스러워하였다'고 적었다. 충격을 받은 통역자가 통역을 멈추고 있으니, 盧(노) 대통령은 그녀를 보고 계속하라고 밀어붙였다. 부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좀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더 이상 분명하게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한국전쟁을 끝낼 것을 학수고대합니다. 김정일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그의 핵무기를 없애야만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한국 측 통역이 끝나자마자 부시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생큐, 서!"라고 말하면서 노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노 대통령은 웃으면서 대통령에게 감사하였다. 라이스는 '그는 그 순간이 얼마나 괴상하였는지(bizarre) 모르는 듯하였다'고 썼다. 라이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예측불능의 행태(unpredictable behavior)를 알고 난 이후엔 솔직히 말해서 한국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되었다.>
그는 국무장관으로서 처음 2년간은 潘基文(반기문) 외무장관을 통하여 盧 대통령을 '통역하였다'(interpret)고 썼다. 노 대통령의 言動(언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潘 장관이 해설을 해주었다는 뜻인 것 같다. 潘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옮긴 뒤엔 송민순 장관을 상대하였는데, '그는 능력이 있고, 폭 넓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노 대통령의 비정통적인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라이스는 그러나 <(사실은 한국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북한의 도발이 한국의 입장을 강경하게 만들었다. 對北(대북)제재에 대하여 韓美(한미) 간 균열의 여지가 없었다>는 취지의 논평을 붙였다. 김정일의 도발로 노무현 정권이 왼쪽으로 갈래야 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시드니 頂上(정상)회담은 노무현-김정일 회담(10월4일)을 앞두고 이뤄졌다. 그때 노무현 정권은 한국전쟁 終戰(종전)선언이란 이벤트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해 12월 大選(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꺾기 위한 카드였다는 의심도 샀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유리한 논평을 끌어내려고 무리를 한 것 같다.
노 대통령은 그해 10월4일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10.4 선언에 합의하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미국은 '검증 가능한 핵 포기' 이후에만 終戰선언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노무현 정권은 그 조건에 대한 언급 없이, 즉 핵 포기와 상관없이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는 오해를 줄 만한 합의를 해준 것이다. 미국이 기존 입장을 견지, 종전선언 구상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였다.
2015-05-26 11: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