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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대자본주의는 워찌탄생혔나?
작성자 shanghaip

현대자본주의는 워찌탄생혔나?

딱딱흔 기초 겡제 교꽈서에서 볼수읎는 실전 자본주의 계론...
퍼왔씅께 잘들 공부들 혀보드라고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경제사를 살펴보면 기업과 정신과 경영자의 역량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항상 미국을 예로 들게 된다. 거대한 조직인 기업을 이끌어가는 역량이 부각되고 경영자라는 말이 생기에 된 곳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직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즉 어떤 기업이 이윤을 위해 나아갈 때 그 방향과 수단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마도 창업주와 경영자의 철학일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현대 자본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여러 기업들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미국의 주요한 기업의 경영자가 유태인들이고, 미국경제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이다. 글로벌 CEO의 성공공식에 다루어진 경영자 중에서도 델 컴퓨터의 마이클 델, 월트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너스, 인텔의 앤디 그로브,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등 많은 이들이 유태인 출신이다. 많은 기업인 금융계의 거물, 심지어 오락 엔터테인먼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영역을 매우 넓다. 이렇게 부각되어지는 모습 때문에 이제까지 많은 유태인들은 나치의 학살과 같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미국 국민총생산의 8~10%를 차지하는 기업을 소유하거나 경영하고 있고, 최고 경영자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영향력 있는 리더 Best50에 8명이나 유태인일 정도로 그들이 활약은 눈에 띄게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유태인들의 환경적응과 문화적 특성을 고찰해 보아 급변하는 세계환경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들 문화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보고자 한다면 고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자본주의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때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전세계적으로 당시 유럽을 제패하였던 금융재벌 로스차일드의 모습을 보며 위험을 감수하고 불확실하고 불리한 상황가운데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가는 유태인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독특한 사업 확장.

모든 사람이 평등한 자유의 나라임을 주창하는 미국이지만 금융의 중심지의 이름에 벽(wall)이라는 말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유태인일 철저히 배척하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가운데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과거 4천년의 유랑 생활을 통해 정착과 점령의 본능이 그들 가운데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오늘날 유태인들은 월 스트리트의 금융 사업에서 도대체 어느 정도의 역량을 행사하는가 살펴보면 시티그룹의 샌포드 와일스와 같이 특히 기업매수 사업 분야의 금융사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융권에서 이 같은 유태인의 강세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으로 경제의 중심이 옮겨지기 이전인 18C부터 250여 년 동안 유럽 금융계를 손에 쥐고 있던 유대계 은행가 집안인 로스차일드를 만날 수 있다. ‘팍스 브리타니카’를 구가하던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19세기에 로스차일드 가문 세력도 절정을 이루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아는 것은 국제 금융 및 문화계의 굵직한 계보 가운데 하나를 파악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금융가문 로스차일드의 시작은 마이어 로스차일드부터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유대교 랍비양성학교에 다니다가 11살 때 부모가 천연두로 죽자 학교를 그만두고 소년가장으로 경제생활에 들어갔다. 1764년부터 동전과 메달을 거래하는 일을 시작하며 골동품도 거래하던 그는 1792년 금융업에 손을 대면서 그의 거래가 커지게 되고 단골 고객과 외상이 생기게 되는데 고객에게 외상을 주는 것이 발전하여 이제는 돈을 빌려주는 일까지 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의도적으로 독일의 권세가들에게 접근해 결국 헤센카젤공국의 지배자인 하나우공 빌헬름의 신임을 얻어 궁정 어용상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로스차일드가는 부를 축적하게 되고 1795년부터 고액 납세자의 대열에 끼게 된다.
그는 한 국가내의 사업 규모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고 새로운 사업을 확장해 간다. 영국의 산업혁명 물결을 타고 유럽에서 옷감 장사가 성행할 때, 이 사업이 큰 이윤이 남는다는 것을 알고 옷감장사를 시작한다. 18세기를 넘어서며 사업의 시작점인 프랑크푸르트를 넘어 독일, 더 나아가 영국 런던으로 뻗어 나가게 되었고, 사업 확장의 방식은 바로 자신의 자녀들을 사업에 투입시키는 것이었다.
지금의 그 시장과 사업의 규모에 만족하지 않고 전 유럽을 대상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시킨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 가장 사업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방식을 잘 이해하고 있는 훈련된 자신의 다섯 아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스트리아 빈, 영국 런던, 이탈리아 나폴리, 프랑스 파리로 보내었다. 로스차일드가의 아들들은 그곳에서 ‘로스차일드 은행’을 개설하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전쟁자금 조달, 파리의 왕정복고 운동 지지, 이렇게 각자 그곳에서 그 나라의 체제에 뿌리 깊이 밀착하여 상권을 확대함과 동시에 국경을 초월한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했다.

Ⅲ. 가능성을 보고 위험을 감수함.

로스차일드가의 세번째 아들로 런던으로 진출하였던 네이션 로스차일드는 아버지의 걱정거리였다. 23세 네이션은 체계적이지도, 정확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늘 질책하셨지만 오히려 짜여지지 않은 틀이 없는 자유로움이 그가 멀리 내다보고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그의 위기는 옷감무역에 금지령이 내려진 1806년에 나타난다. 몰래 옷감을 거래하던 네이션 로스차일드는 1810년 그 사실이 드러나 모든 무역행위를 감시 당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무역의 비중을 줄이게 된다. 이것이 로스차일드가 본격적으로 금융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네이션은 무역 사업이 벽에 부딪쳤을 때 과감히 기존의 사업을 서서히 축소시키고 새로운 사업에 매진하여 가능성이 있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 보이는 옷감무역에서 금융업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두 개의 사업은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 오랫동안 선박을 통해 물건을 나르던 무역사업의 경험은 일국의 화폐가치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화폐를 이동시키고 환전해주는 금융업을 함에 도움이 되었다. 1811년 7월 런던의 금융업에 종사하겠다고 공표한 그는 그 공표가 있은 후 20년 만에 가장 중요한 은행가 가문을 이루게 된다.
1814.년 1월 11일, 영국 정부가 네이션에게 프랑스로 진격하는 부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라고 했을 때 그의 위상을 크게 높아졌고, 그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영국군에 군자금을 제공해 주게 된다. 웰링턴 장군을 도왔던 워털루 전쟁은 이 가문의 성공을 이야기 하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지만 사실 이 전쟁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파산할 위험에 처한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자금을 대여하고 이익을 누리던 형제들에게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여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금과 돈은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이때 네이션은 본능적으로 대책을 마련하여 적절한 시점에 주식과 채권을 매각과 매입하여 전쟁으로 인한 손해를 모두 복구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로스차일드가는 셋째 아들 네이션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전무후무한 가장 중요한 은행가 가문이 된 것이다.


Ⅳ. 국가의 정보력을 뛰어넘는 세계적 정보력.

프랑크푸르트를 본점으로 구축된 로스차일드의 금융 네트워크는 당시로선 유럽 어느 왕실의 정보망보다 정확했다. 비록 인편과 원시적인 우편에 의존했지만 히브리 문자의 이디시(Yiddish)어를 사용한 커뮤니케이션망은 워털루전쟁의 결과를 영국 왕보다 먼저 감지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유태인으로서 자신들만의 문자를 사용하여 철저한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정보가 생명인 금융업계에서 지속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전역을 무대로 가장 빠른 정보입수-전달 체계를 구축하던 로스차일드상회는 가문의 운명이 달린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자체 능력으로 런던상회에서 24시간 정도 일찍 알 수 있었다. 이 정보력을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국채를 몇 시간 일찍 무더기로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무려 1억3500만프랑의 이익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한편 다섯 아들은 모두 유럽의 중심국가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는다. 작위를 받으며 5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그 뒤 형제에게는 ‘5발의 화살’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당시 세계 어떤 국가나 권력자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력을 가졌던 로스차일드는 제국주의와 함께 19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좌우하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 일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성장가능성 있는 시장을 선택하는 데 도 한 발 앞섰다. 네이션의 런던 로스차일드 은행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1억 파운드를 각국 왕실에 빌려주었고, 1875년엔 영국의 수에즈운하 매수에도 융자했다. 1차대전 직후 시오니즘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 건국의 자본과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다섯째 아들 제임스의 파리가문에서만 7천만 프랑을 건국자금으로 지원했다. 로스차일드 가는 유럽 자본주의 열강의 정치·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유럽의 식민지였던 미국과 남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전세계 금융계는 물론, 산업계도 지배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세계사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로스차일드의 전성기는 지났다. 하지만 ‘전설의 가문’으로 돌리기엔 아직도 너무 엄청난 유산을 갖고 있다. 5개의 거점 가운데 현재까지 번성하고 있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집안이다. 은행, 뮤추얼펀드, 자산관리 같은 금융업종에서 여전히 유럽 각지 회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영국(NM Rothschild Ltd, Rothschild Trust Guernsey Ltd 등)과 스위스(Rothschild Bank AG), 프랑스(Edmond de Rothschild) 등이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금융사다.
그밖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은행업 이외의 부분을 살펴보면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런던의 로스차일드은행은 잉글랜드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2017-10-07 12:57:32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shanghaip [ 2017-10-07 13:58:49 ] 

이재용이가 지돈도 아닌걸 가지고 깔짝이다가 종부기들이 쌩때 부리고 땡깡 치믄서 박근햬 잡아넣는데...줄 잘못서서 들러리 역활 흔거지라...
리재용이아 주인공이 아니라 보조운전사쯤되는 극단의 딴따라 보조...
딴따라 극단의 주인공은 유태인 종부기 뭉죄인, 유태인 자보주위자 빡근해...인제 공식이 보이능강?

1   zenilvana [ 2017-10-07 13:30:58 ] 

백과사전을 끼고 살그라! 그렇다고 뭐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내가 이미 "돈이 돈을 번다"고 설명했다.

현대자본주의든지 수정자본주의든지, 현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깔고 진행되는 바라 자본을 많이 축적한 자들의 자손들이 대대로 부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야,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들의 자본을 국민에게 되돌리는 조세제도가 있다. 알기 쉽게 삼성의 이재용이가 손 않대고 코를 풀려다 지금 지도 감옥가고 박근혜도 조만간 같이 갈 모양인 사례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걸 무슨 자본주의라 불러야 하는고? 범죄자본주의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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