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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군의 3박4일 인간 사냥
작성자 rainbows79

【서울=뉴시스】 =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은 9일(현지시간) 북핵 문제에 대해 외교적 해결책도 모색하지만, 군사적 대응에 대한 준비도 강조했다고 더 힐, 폴리티코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그는  T.R 페렌바크의 저서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을 언급하며 한국 전쟁 중 미군이 작전에 실패한 역사를 지적했다.

보도 내용만 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T.R 페렌바크의 저서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을 다음에서 검색했더니 2가지가 나옵니다.

전쟁이 나면 미군 입장에서는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만 남는데?
나 진보야! 뭬라 빨갱이라고 빵야!
나 보수야! 뭬라 수리가 필요하다고 빵야!

나 태극기 집회 한번도 안빠지고 참석하고 성조기까정!
웃기지마 너 성조기안에 총있지 빵야 어! 피가 빨갱이네!
빨갱이 맞네!

미군의 3박4일 인간 사냥

1950년 7월 26일 낮 충북 영동군 황간면 임계리와 주곡리 마을에 미군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미군은 제1기갑사단 제7기갑연대 제2대대 H중대(중화기 중대) 군인들이었다.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들이 4번 국도를 따라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하였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경부선 열차의 철로로 올라섰다. 그 때 미군의 무전 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하였으며 지상의 군인들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철로 위에서만 최소 100여 명이 사망했다.

정구식의 중언이다.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
다시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였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져 야비규환이었죠.
미군 폭격기는 약 20여 분간 폭격을 해댔어요.
나중에는 폭격기에서 기총소사도 했고요."

양해찬의 증언이다.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다가 폭격을 당했어요. 어머니가 나를 맨 밑에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내 여동생을 얹고 당신 몸으로 우리를 감쌌어요.
폭격 후 일어서니 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여동생은 한쪽 눈이 피범벅이 돼 있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여동생 눈알이 빠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구요.
동생은 눈이 아파 견딜 수 없으니까, 안 보이니까 그것이 뭣인지도 모르고 그냥 떼내 버렸어요. 어머니와 동생을 껴안고 주변을 보니 우리 집에 피난와 있다 함께 온 고종사촌 아주머니가 만삭이었는데 즉사해 있더라구요. 할머니,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철로 위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철로 밑의 굴다리에 숨었다. 그러나 굴다리에 은신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총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핏물을 그냥 떠마시면서 버텨야만 했다.

이게 바로 1950년 7월 26일부터 3박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 이다.

피난민은 작전에 귀찮은 존재

왜 미군은 그런 '인간 사냥'을 했던 걸까? 먼저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T.R. 페렌바크의 『실록 한국전쟁』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1950년 7월 20일 아침, 대전 주변 방어선이 끊임없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농부의 흰 옷으로 변장한 수백 명의 인민군은 시중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일단 시중에 들어서면 그들은 농민의 옷을 벗어 던지고 미군에게 총격을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처에 저격병이 깔렸다.
미군 장교들은 본부요원과 보조부대 병력을 동원해 그들의 소탕을 시도해 보았지만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어느덧 긴 하루해도 저물었다.
딘 사단장은 시내에서 철수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딘의 지프는 길 위에 멈춰 서서 불을 뿜는 트럭들 사이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렸다.
운전병은 전속력을 냈고, 한 구역을 다 간 곳에서 교차로 하나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단의 부관 클라크 중위가 고함을 질렀다. '지나왔다!' 간신히 대전을 빠져 나온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군 진지에 닿으려는 노력을 35일이나 거듭하다 한국인들에게 의해 인민군에게 밀고되어 포로가 되었다.

7월 20일 야간에 대전을 철수, 영동을 지키던 미 제24단의 각 부대는 7월 22일 정오, 진지를 제1기갑사단에게 인계했다.
대전에서 100여 리 떨어진 영동 방어를 미 제24가단으로부터 인수받은 미 제1기갑사단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런 배경에 주목하여 당시 미군들이 느꼈을 극도의 공포심을 인간 사냥의 이유로 지적하는 시각이 있다.
당시 미군들의 북한군에 대한 피해의식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데다 미군이 농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 의해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겁에 질려 이성을 잃은 나머지 저지른 짓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은용은 그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군들은 노근리 앞 철로 위에다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피난민들의 짐 검색을 실시하고, 또 폭격 후에는 철로 밑 터널 속에 그들의 위생병을 보내 부상자들을 치료까지 해주면서 피난민들이 변장한 인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했었다.
무기라고는 한 점도 갖지 않았던 피난민들, 노인과 부녀자, 유아가 절반을 훨씬 넘었던 이들로 인해서 미군들이 겁을 먹을 이유도, 이성을 잃을 까닭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생각끝에 도달한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7월 26일 미 8군사령관이 주요 지휘관에게 보낸 메시지에 주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말라.
" 그 날 10시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조건 사격은 많이 일어났다. 제 1기갑사단 1950년 8월 29일자 일지에는 사단장이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왜 미군 지휘부는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피난민을 작전에 방해되는 귀찮은 존재로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노근리 학살은 워낙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범죄라 이쪽에 무게가 실린다. 단지 귀찮다고 아무런 죄도없는 민간인을 죽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노근리 사건을 넘어서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이 보인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다.

전쟁은 그리 한가하지도 않고 보수와 진보의 구분?
피부색이 노란지 하얀지 그것이 문제로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펀치볼 전투는 도솔산 전투,

가칠봉 전투와 함께 한국전쟁 시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일 뿐만아니라, 이 언저리에는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크리스마스 고지, 유엔고지, 모택동 고지, 김일성 고지 등과 같이 비극적인 방어선의 이름들이 아직도 아련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특히 '피의 능선'과 그 북쪽에 11km에 걸쳐 늘어져 있던 '단장의 능선'은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1년, 이 땅에서 벌어진 가장 처절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5일까지 피의 능선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뺏으려고 일진 일퇴의 지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때의 상황을 미국의 역사학자

페렌바크(T. R. Ferenbach)는 그의 저서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국군과 미군 제24사단은 전선을 따라서 늘어서 있는 몇 백개의 고지 중에서 이 보잘 것 없는 둥근 고지 세 개를 차지하기 위해 4천명이 넘는 아군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전투에 참전한 병사들이야 당연히 '목숨으로 지켜낸 땅'이라고 말 할 테지만, 피아간에 그렇게 혹독한 댓가를 치러가면서까지 삤고 뺏기는 게임을 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그의 입장에서는 한국전쟁은 분명 '남의 나라 전쟁'이었으니까.

미국과 미군을 천사로 알고있는 보수 빨갱이들이 알아야 할 부분!

중공군과 인민군도 4천명 이상의 전사자와 1만명 이상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손실을 입은 이 전선을 누군가가 레마르크가 쓴《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제1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의 서부전선을 '피의 능선'으로 묘사한 것을 인용해 '피의 능선'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 전선의 이름은 피의 능선이 되었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가장 치열했던 전투라고 꼽는 전선이었다.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에 걸쳐 일어난 불과 한 달간의 전투만으로 무려 20만발의 포탄이 소모되었고 1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그 치열했던 전쟁이 끝난지 60여년이 지났다.

전쟁은 과연 끝났는가? 

펀치볼에는 북한이 남침용으로 파 놓은 제4땅굴이 있고, 군사분계선 내에 있는 가칠봉의 을지전망대에서는 북녘을 아득히 바라 볼 수도 있다. 중무장한 초병의 얼굴은 너무나 앳되고, 하늘은 너무나 푸르다.
 전쟁이 일어난 1950. 6. 25일도 하늘은 이토록 평안했을까?

하룻밤의 폭풍우로 엄청난 사람이 죽고 사라졌는데도 이튿날 하늘은 너무나 청명했을 때의 그 기분 같은 것.
저들을 부모의 품으로 돌려 보내지 못하는 이상 전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출처]올해도 펀치볼의 감자꽃은 어김없이 피어나고|작성자Vagabond

2017-10-09 16:32:14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coffee [ 2017-10-09 18:33:40 ] 

왕이저우 베이징대 부원장 인터뷰 왕이저우(王逸舟) 베이징(北京)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최근 이 대학 국제관계학원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지식인과 외교관들은 우리(중국)도 (북핵 문제에) 매우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국의 입장과 지식인들의 입장은 다르다”고 말했다.

‘어느 쪽 입장에 동의하느냐’고 묻자 “나는 당연히 학자”라며 웃었다. 왕 부원장은 “북한의 핵개발은 우리에게 위험일 뿐 아니라 (북핵 문제로 인해) 한국 경제가 붕괴하거나 전쟁이 발생하면 중국에 매우 큰 손실이기 때문에 중국은 (북핵 문제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커다란 이해관계가 있고 매우 큰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어떤 측면에서 책임이 있나.

“역사 경제 안보 각 측면에 책임이 있다. 중국은 북한의 가장 큰 이웃 국가, 동맹국, 형님이다. 이란이나 이라크에서 위기가 발생한다면 중국에 그렇게 큰 책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다르다. (북한과 중국은) 과거 동맹관계였고 현재도 동맹을 폐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에 대한 현재 중국 정부 입장에 동의하나.



“중국 정부는 미국이 전쟁을 통해 해결하는 걸 원하지 않고 협상 테이블에서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더라도 개선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북-미 간 어떤 결정에도 중국이 참여해야 한다. 북-미끼리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큰 책임과 이익이 있기 때문에 북한 관련 어떤 결정(과정)에서도 빠질 수 없다.”

중국이 지금보다 북핵 문제 해결에 더 깊은 책임의식을 갖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관련기사 [단독]베이징대 부원장 “中, 북핵에 큰 책임… 대북압박 높여야”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인정하고 한미와 소통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자칭궈(賈慶國) 베이징대 국제정치학원장의 주장은 어떻게 보나.

“대부분 지지한다. 중국이 폐쇄된 사회라면 북한의 목소리를 이해하는 견해가 비교적 많을 것이지만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갈수록 자 원장의 견해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많아질 것이다. 중국이 대북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과거 약했던 제재 강도가 갈수록 커지고 제재의 방향도 엄중해지고 있다. 대북 석유 공급 중단도 하나의 (대북 제재) 옵션이다.”

―다른 부분도 있나.

“만약 북한에 중대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하면 (한미뿐 아니라) 러시아 일본 유엔 등 여러 관련국과 소통과 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중이 함께 일하면 대규모 전쟁 가능성이 비교적 작아지고 미중이 전방위 긴장관계면 한반도 전쟁 가능성이 현실화될 것이다. 이 점에서 대국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자 원장과 주즈화(朱志華) 저장(浙江)성 당대국제문제연구회 부회장과의 논쟁은 어떻게 평가하나.

“(중국 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토론이 공개화됐다. 사드 문제에 대한 토론은 훨씬 다양화돼 있다. 과거에 비해 큰 변화다. 이런 논쟁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한국의 독자들이 중국 전체 사회가 갈수록 다원화되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전쟁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건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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