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 “청와대에 들어간 전대협 인사들” 색깔론 제기전 의원은 “이런 인사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때맞춰 반미운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다”고 원색적인 ‘색깔론’을 이어갔다.
그는 “전대협에서 이야기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헌법재판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판결의 주요 이유였다.
북한식의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것이다”며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입장정리도 안 된 분들이 청와대 내에서 일하니 인사참사가 나는 것이다.
안보와 경제를 하나도 못 챙긴다”고 비난했다. 전 의원은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도 전대협 사고와 다르지 않다.
북한의 대변인이지, 이게 대통령 보좌하는 사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냐”고 하기도 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오후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열린 대통령 비서실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의 ‘색깔론’애 대해 유감의 입장을 표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차분히 질의를 듣던 임 실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임 실장은 “의원님 말씀에 매우 모욕감을 느낀다.
그게 질의인가. 매우 유감이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5·6공화국 때 군인들이 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전 의원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살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의원님이 거론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의원님이 말씀하신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임 실장은 “국민의 대표답지 않게 질의를 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나”며 “충분히 국회에 국회를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서 인내하고 답변해왔다.
더 답변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국정감사장은 여야 의원들의 고성이 오가며 한동안 진행되지 못했다.
정우택 운영위원장(자유한국당)의 요구로 임종석 비서실장은 “오늘 위원회 운영에 누가 된 데 대해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 입장을 보여 국정감사는 재개됐다.
6일 우병우 전 수석 재판서 안종범 전 수석 증언 지난해 10월 청 참모진 “비선실세 인정하자” 건의에 박 전 대통령 “꼭 인정해야 하나요” 반문10월20일 회의에서 “재단 불법행위 엄벌” 엄포 뒤 닷새 만에 최순실 존재 인정하는 대국민 담화
朴, 최순실 비선 인정 거부한 이유···"비참해지기 싫다“
홍보·경제수석 "비선실세 인정해야 한다" 조언에도"崔 존재 인정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 가고 싶지 않다"태블릿PC 보도 전까지 '비선도 실세도 없다'로 정리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말씀 자료 최종본에 '제 주변에는 비선이니 실세니 하는 사람 존재하지 않습니다'는 문장을 남기는 것으로 정리됐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 이영훈) 심리로 열린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당시 상황에 대해 말했다.
대기업이 큰돈을 선뜻 냈다는 미르·K스포츠재단의 이름이 알려지고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보도가 나오던 때였다.
아직 최씨의 태블릿PC 보도는 나오지 않았던 시기다.
2013~2014년 검찰의 대선개입 사건 수사·재판을 방해한 혐의로 수사를 받던 변창훈(48) 서울고검 검사가 6일 오후 투신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 국정원에 법률보좌관으로 파견된 변 검사는 당시 국정원 최대 현안이었던 ‘댓글 등 대선개입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 대응하기 위해 꾸린 ‘현안 티에프(TF)'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앞서 지난달 31일에는 같은 수사·재판 방해 혐의로 검찰의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국정원 소속 정아무개 변호사가 강원도 춘천시의 한 주차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 바 있다.
열린 마음으로 들을 터이니 보수는 부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보수를 신봉하고 그 이념이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제발 대답을 회피하지 말고 자신들의 주장만 펼치고 사라지지 말고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제발 대답을 바랍니다.
왜 대한민국 국민들은 보수의 이념을 신봉해야 하는지 왜 그것이
진보의 신념보다 더 이 세상을 밝게 만드는지 북한의 공산주의와
남한의 보수주의 체재가 우월한 이유를 과거의 사례를 들어서
나에게 납득이 되도록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습니까?
민주주의[democracy, 民主主義 ]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사전을 보면 귀족제나 군주제 또는 독재체제에 대응하는 뜻이다.
이렇게 나오는데 남을 북의 귀족제나 군주제 또는 독재체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보수를 말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굳건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한 안보를 말하는데
분명히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함이 주어입니다.
안보가 주어가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안보를 위해서 있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절대적 가치인
민주주의,
귀족제나 군주제 또는 독재체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 안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절대로 안보를 위해서 민주주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까?
한국에서는 어떠합니까?
위에서 보셨듯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정말로 불행하게도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귀족과 , 군주 또는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하나의 장식품으로만 사용됩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주객이 전도됐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물론 주인은 민주주의고 객은 안보입니다.
주객이 전도 된 정도가 아니고
주인은 없어지고 객이 주인 노릇하고 본래의
주인인 민주주의는 객인 안보의 시녀나 노예로서 질질 끌려 다닙니다.
주인인 민주주의가 내가 주인이요 하고 외치면 어찌됩니까?
군인들이 지키라는 안보는 안 지키고 주인을 총과 칼로서 서슴없이 난자합니다.
도대체가 보수를 신봉하는 자들은 왜 이에 대해서 질문하면 자신들의
말만하고 상대의 말은 단 한마디도 못하게 하는지?
그 수괴들은 하수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인지.
오늘 언론 기관들의 보도를 보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습니다.
텍사스의 한 시골 마을에서 어느 미치광이가 교회에서 예배 중이던
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합니다.
미국의 보수가 총기 규제에 대해서 의회에서 총기업자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니 무조건 그들의 주장이 맞다?
텍사스 교회에서 미치광이의 손에 죽은 주민들에게 어떠한
말로서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 또 다른 한사람 모든 사람들의 생명은 귀하디 귀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 그저 한순간 애도한다
총기를 규제해야한다 이렇게 틀에 박힌 말잔치 잔치 전부입니까?
미국의 총기협회의 이익과 재선을 바라는 미국 보수의원들의
재선이 사람들의 목숨보다 몇 천배 중요하다고 믿는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증오해 마지 않습니다.
도대체가 무엇을 위한 이념이란 말인지!
이 짓거리가 보수의 신념이라면 나는 이에 맞서 죽기로 싸울 것입니다.
공자의 생애
공자(孔子)는 기원전 551년 오늘날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지방인 노(魯)나라의 작은 마을 추읍(陬邑)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난 지 10여 년 뒤이고,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시기에 해당한다.
공자는 은(殷)나라 왕족의 몰락한 후예의 집안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였던 숙량흘(叔梁紇)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안징재(顔徵在)였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이구산(尼丘山)에 남몰래 치성을 드려 공자를 낳았고 공자의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태어날 때 그의 집안은 불우하였다. 더구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였던 모양이다.
당시 공자의 집안은 몰락하여 겨우 벼슬을 할 수 있는 계급인 사(士)에 속해 있었다.
사 계급은 위로는 귀족과 대부, 아래로는 서민의 중간에 있어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공자는 18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를 모시느라 여러 비천한 일들을 해야만 했고, 공부도 15세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공자는 배우는 데 있어서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열정과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고 할 정도로 배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지녔고, 자기처럼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도 가졌다.
공자는 일정한 스승의 지도 없이 여러 인물들에게 두루 배웠으며, 나중에는 주(周)나라로 가서 노자(老子)를 찾아뵙고 예(禮)에 대해 묻기도 했다.
나중에 벼슬도 하였지만, 공자의 일생을 통틀어 보면 젊은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남을 가르치는 데 보낸 직업적인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꿈꾸던 세상은 예(禮)와 덕(德)과 문(文)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공자는 그러한 이상을 실현한 주(周)나라를 동경하였고,
당시의 권세 있는 대부(大夫)들이 제후(諸侯)들을 무시하고
권력을 농단하는 사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공자가 정치에 관여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공자가 살던 춘추(春秋) 시대는
국가 간 혹은 나라 안에서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여 온갖 명목의 전쟁과 난리가 연이어 일어나 민중들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시대였다.
기본적으로 인(仁)의 실천, 곧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했던 공자로서는 그러한 현실을 목도하고도 책이나 읽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공자는 당시 정치가들에게 자기의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설파하고자 수레를 타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기도 하였고, 직접 벼슬을 맡아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벽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엔 너무나 두터웠고, 많은 좌절을 겪고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인 도덕정치철학은 시대를 넘어 후대에 계승되어 한(漢)나라에서 국정 이념으로 채택된 이래, 동양 역사상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위대한 교육자이자 뛰어난 정치철학자로서의 일생을 보낸 공자도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행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아들 리(鯉)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顔淵)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으며, 여러 나라를 떠도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노년에는 이런 모든 것을 잊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같은 책을 엮고, 《역경(易經)》에 재미를 붙여 책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공부하는 한편, 고향에서 이상이 큰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다가 기원전 479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가들에게 자기의 덕치주의(徳治主義)를 설파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기도 하였고, 직접 벼슬을 맡아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벽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엔 너무나 두터웠고, 많은 좌절과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인 도덕정치철학은 시대를 넘어 후대에 계승되어 한(漢)나라에서 국정이념으로 채택된 이래 동양의 역사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