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Los Angeles
열린 마당
제목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무엇으로 살 것인가?
작성자 rainbows79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무엇으로 살 것인가?
돈을 왜 벌어야 하는지?
돈을 번 후에 그 돈을 어떻게 사용 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기자가
말해 줍니다.
이렇게 이런 곳에 쓰세요!
우리가 온통 빨갱이 , 파랭이 색깔 타령만하고 한세상 끝내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에 기사 전문을 옮겨옵니다.
너무 길어서 중간에 읽다가 포기 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줄이려다가
기자가 너무 애써서 작성한 글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무엇을 잘라야 할지도 몰라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7월은 뜨겁지 않았다.
해발 1700m 고지대에 자리 잡았기 때문인지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고 낮에는 따뜻해 한국의 초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에서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는 데는 차로 50분쯤 걸렸다. 폐차 직전의 낡은 버스와 최신식 고급 자동차가 섞여 달리는 잘 닦인 도로, 그 길을 따라 대형 광고판이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심에 접근하며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느림보 주행을 하는 차량들 사이로 바나나와 신문을 파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은 왠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도착 이튿날인 지난 7월10일 오후 현지 코디네이터 힐러리 키무유를 나이로비 중심가에서 만났다. 그의 차를 타고 이 도시에서 네 번째로 큰 빈민촌이라는 ‘코로고초’로 향했다.
잘 닦인 길을 20분쯤 달리자 비포장도로가 나타나며 거리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코로고초 입구다.

키무유는 “밤에는 현지인들도 오길 꺼리는 지역이기 때문에 낮이라도 외국인은 절대 혼자 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낮의 빈민촌에서 치안 불안의 흔적을 발견하긴 쉽지 않았다. 행인들은 자기 길을 가느라 바빴고, 상인들은 한가해 보였다. 거리의 풍경에서 두드러진 것은 가난이었다.
비포장도로 좌우로 나무판자와 함석 지붕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상점 매대와 좌판에는 운동화, 식기, 과일, 그릇, 가방, 옷, 식료품, 보행기 등 온갖 물건들이 널려 있었지만 물건을 사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안쪽으로는 허술하게 지은 판잣집들이 시선 끝까지 뻗어 있었고, 아이들은 곳곳에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놀고 있었다. 

■ 코로고초에서 퍼지는 선율 
악취 사이로 매캐한 냄새가 짙어지는 길 끝에서 나타난 것은 세인트 존스 초등학교다.
코로고초에 있는 가톨릭계 초등학교로 유치원, 초등학교 과정에 700여명의 아이들이 다닌다. 학교 뒤에 있는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에서 올라오는 짙은 잿빛 연기가 학교 운동장을 덮고 있었다.
1975년 만들어져 이미 2001년 최대 수용량을 넘어선 단도라 쓰레기장은 나이로비 시내 거주자 300만명이 쏟아내는 쓰레기가 모이는 곳이다.
유엔환경계획 조사에 따르면 납과 카드뮴 수치가 심각할 정도로 높은 위험시설이지만 이곳 주민들에겐 쓸 만한 물건을 건져낼 수 있는 생활터전이다.


코로고초 빈민촌의 세인트 존스 초등학교 옆에는 쓰레기 하치장이 있다. 학교 너머로 보이는 쓰레기 하치장에서 종일 연기가 올라온다.
코로고초는 나이로비 중심부에서 약 11㎞ 떨어져 있다. 1.5㎢ 넓이의 땅에 30만명이 살고 있다.
여의도 면적 3분의 1보다 작은 크기의 땅에 여의도보다 8.8배 많은 사람이 사는 셈이다.
케냐 정부 소유의 버려진 땅이던 이곳에 이주민들이 하나둘 들어와 거주지로 변한 것은 1970년대다. 지금 주민들은 대부분 가로 세로 3m 크기의 판잣집에서 산다.
나이로비의 다른 빈민촌과 마찬가지로 코로고초 주민들은 가난과 범죄, 마약, 알코올 중독, 매춘, 질병 등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통계가 보여주는 코로고초의 삶은 가혹하다.
실직률은 30~40%, HIV 감염자는 14%로 추정된다. 13세 이하 어린이 3명 중 1명은 부모 중 한 명이 없거나 고아다.
아이들의 학교 결석률은 30%를 넘는다.
몸이 아프거나, 매월 4달러(약 4500원) 수준인 학교 수업료를 내지 못했거나, 다른 형제나 자매를 돌봐야 한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희망은 자란다. 수업을 마친 세인트 존스의 오후.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한 틈새로 북소리와 관악기 소리가 뒤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악기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작은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30여명의 청소년들이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전통 가락과 클래식 음악, 팝음악의 선율이 뒤섞여 색다른 화음을 빚어내고 있었다.

‘게토 클래식’ 교육 현장이다.
세인트 존스가 2008년 시작한 실험으로, 빈민촌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가르쳐 미래를 꿈꾸고 열어가게 하는 것이다.
게토 클래식의 주요 대상은 10~12세 아이들이지만 연령 제한은 없다.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고 비용도 들지 않는다. 10대가 중심이 되어 있긴 하지만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 단원 120여명 중 20대 이상인 ‘시니어’ 멤버도 50명이나 된다.
매주 일요일 집중 연습을 하고 평일에는 음악이론과 실기 수업을 한다. 

■ 게토 클래식이 만드는 꿈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엘리자베스 조로게(45)가 아이들과 함께 헐떡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코로고초 내 다른 학교들을 돌며 오케스트라 단원인 아이들을 승합차로 막 실어나른 참이었다.
“날마다 이러는 건 아니에요.
오늘은 연습장소 공지가 잘못돼 다른 곳에서 대기하던 아이들이 있어서 연습시간에 늦지 않게 데리고 온 거예요.” 

조로게는 게토 클래식의 산파다.
나이로비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부터 음악을 배웠다. 이후 캐나다와 영국에서 생화학과 약학을 공부했다.
직업 음악가는 되지 못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은 적은 없다.
2003년 케냐로 돌아온 그는 클래식 음악 뉴스레터와 클래식 음악 잡지를 만들었다. 2007년부터는 통신 대기업 사파리콤이 운영하는 지역 라디오 방송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는 어느 날 마타투(나이로비 서민들이 주로 타는 소형 승합차량)에서 라디오로 음악을 듣는다는 청취자의 전화를 받고 다시금 생각을 굳혔다.
클래식 음악은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누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그의 마음속엔 이미 백인들만이 음악학교에 가고 나이로비 오케스트라에 흑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받았던 충격과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세인트 존스 커뮤니티센터를 운영하던 신부의 클래식 음악 교육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기회였다.

“무조건 해보겠다고 했어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라디오를 통해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센터의 지원으로 2008년부터 게토 클래식이 시작됐어요.”
처음에 모인 아이들은 14명에 불과했다.
연습에 필요한 악기가 턱없이 부족해 수업은 2주에 한 번만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학생이나 부모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한마디로 “악기를 연주한다고 밥 먹여주느냐”는 무력감과 회의였다.

그 시간에 쓰레기 더미를 뒤져 쓸 만한 물건을 찾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음악을 익히는 데 필요한 집중력과 끈기라면 코로고초를 가득 채운 무력감과 패배주의를 걷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많은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부모들을 설득했다. 

“음악을 배운다는 건 거리를 방황하거나 범죄에 빠지는 대신 다른 할 일이 생긴다는 거예요. 악기를 익히려면 늘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해요.
인생이 그런 것처럼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죠. 음악이 학교 밖 아이들의 환경을 곧바로 바꿔 놓을 순 없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향한 문을 열어줄 수는 있어요.” 
센터의 지원으로 첫발은 뗐지만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1, 2주에 한 번씩 겨우 악기를 빌려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수업시간에 악기를 ‘만져보는’ 것 말고는 제대로 연습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더디지만 꾸준한 연습 덕분에 학교에서 소박한 연주회를 갖게 됐고 조금씩 알려지면서 지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게토 클래식이 한 차례 도약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은 2013년이다.
케냐 최대의 통신사업자 사파리콤이 후원하기로 하면서다.
사파리콤은 국제 재즈 페스티벌을 조직해 티켓 판매 수익금을 게토 클래식 프로그램에 기부했다. 덕분에 빌릴 수밖에 없던 악기를 보유하면서 학생들은 마음놓고 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 상황이 더 어려운 아이들에게 집세와 식료품, 수업료까지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5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던 그해 11월26일,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는 나이로비 대학 캠퍼스에서 교황과 20만명의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사 음악을 연주했다.
이후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는 뉴욕타임스, ABC 방송 등 외국 언론에 소개됐다. 
사파리콤이 2013년 설립한 사파리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은 중산층 이상이 다수지만 현재 이곳에서 연주하는 18명의 단원은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를 통해 발탁됐다.

■ 음악의 힘 믿는 스물두 살 청년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브라이언 케퍼(22)다. 그는 현재 케냐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 주자를 맡고 있다.
케퍼는 초등학생이던 2009년 아버지가 직장을 잃으면서 집을 떠나야 했다. 아홉 남매의 장남인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근 교회를 거처로 삼은 그는 학교의 점심 급식 이외에 한 끼도 못 먹은 채 며칠을 보내기도 있다. 교회 바닥에서 잔 적도 있었다.
머리를 누일 장소가 있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던 그에게 음악이 구원이었다.
2010년 중학교 스카우트 소속이던 그는 국경일을 앞두고 케냐 군악대의 국가 연주를 들었다. 그는 드럼 소리에 매료됐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연주가 끝났을 때 드럼은 제 인생의 악기가 됐어요. 마법 같은 순간이었어요.” 음악과의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 연습을 앞두고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에밀리 오낭고(왼쪽)가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코로고초에서의 삶에는 문제가 정말 많지만 바이올린을 연습할 때는 모든 걸 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게토 클래식을 소개해준 것은 코로고초 세인트 존스 커뮤니티센터 맞은편에서 야채장사를 하던 그의 어머니였다.

“엄마가 제 이야기를 듣더니 학교에 가서 아이들이 연습하는 걸 들어보라고 하셨죠.”
그해 6월 그는 게토 클래식에 참여해 드럼을 배웠다.
6개월 뒤에는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보고 단원이 됐다.
드럼을 배우면서 그는 지휘도 독학으로 익혔다. 런던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 동영상이 있는 유튜브는 무한한 보고였다.
그를 눈여겨본 청소년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도움으로 케냐 음악원에서 지휘를 배울 수 있었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2015년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케냐 의회의 초청을 받아 국가를 연주했을 때다. 몇 달 뒤 그는 단원들을 이끌고 교황 앞에 설 수 있었다. 

케퍼는 2016년에는 독일에서 열린 구스타브 말러 지휘 콩쿠르에 참가했다. 2004년 시작된 이 대회의 첫 우승자가 바로 베네수엘라 빈민가 출신으로 지금은 세계적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구스타보 두다멜이다.
성시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2007년 우승자다.
케퍼는 2016년 콩쿠르 참가자 중 유일한 아프리카인이었다.
이 대회에는 전 세계에서 381명이 지원해 14명이 최종 참가자로 선발됐다.

지난여름 나이로비의 케냐타 대학을 졸업한 그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유학해 음악 공부를 이어갈 예정이다. 케퍼는 케냐 상류층 인사들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고 있다.
그는 “케냐의 변화를 바라는 큰 인물들이 경제적 후원을 해주고 있다”며 “한 개인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국가 발전 차원에서의 지원”이라고 말했다. 
베토벤의 삶을 닮고 싶다는 케퍼의 꿈은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이다.
그는 “베를린 필 지휘자가 돼 아프리카 북쪽에서 남쪽까지, 클래식 음악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고유 음악까지 포함하는 음악축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가난하지 않아요.

제 멘토 중 한 분은 함부로 ‘가난’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어요.
저는 음악을 통해 이전의 저보다 매일 나아지고 있거든요.
학교 담장 밖에는 쓰레기 더미가 가득하지만 함께 연주하는 아이들은 음악을 통해 코로고초라는 닫힌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어요.
이 안에만 있으면 볼 수 없는 세상을 보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꿈을 꾸고 있어요. 모두 음악의 힘인 거죠.”

게토 클래식 초창기 멤버인 사이먼 카리유키(29)는 현재 오케스트라 학생들에게 색소폰을 가르치고 있다.
그를 포함해 9명의 형제자매들 틈에서 자란 그의 꿈은 갱단 두목이 되는 것이었다. “2009년 프로그램에 합류했어요. 처음엔 지루하고 힘들어서 여러 번 그만뒀죠.
1년을 그렇게 보내다 결국 마음을 잡고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음악을 하면서 알게 됐죠. 갱단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삶도 존재한다는 것을요.” 

■ 저마다 피워내는 삶의 희망  
케냐는 1960년대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토착어인 스와힐리어와 영어가 공용어다. 학교 수업은 영어로 진행한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들은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 올해 열 살인 조셉은 아직 영어가 서툴렀다.
간단한 질문에는 영어로 답했지만 종종 스와힐리어를 섞어서 말했다.
조셉은 2년 전 게토 클래식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처음 받은 악기는 플루트였다.
그런데 갈수록 악기 욕심이 생긴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건 색소폰이다.

세인트 존스에서 만난 조셉의 아버지 라반 라이롱고(36)는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음악을 처음 배웠을 때부터 연주를 잘했어요.
열정도 있고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대화의 90% 이상을 스와힐리어로 말했다. 라반은 조셉, 조셉의 남동생, 석 달 전 태어난 막내, 그리고 아내와 함께 판잣집의 방 하나를 빌려서 살고 있다.
방 하나에 침대가 두 개라고 했다. 그는 특별한 직업이 없다.
세인트 존스에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해주며 약간의 돈을 받는 게 전부다.
야채 행상을 나가던 아내는 얼마 전부터 몸이 아파 일을 쉬고 있다.
그가 사는 집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여주고 싶지만 위험해서 안돼요. 외국인이 왔다 갔다는 소문이 나면 밤에 도둑이 들 수 있어요. 분명히 외국인이 돈을 줬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빈민촌에서의 삶이 최악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곳의 장점 가운데 하는 물가가 싸다는 것”이라며 “20실링(약 200원)으로도 쌀을 살 수가 있어서 굶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거예요.
그래서 미래를 아이들에게 걸고 있어요. 조셉이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요.
게토 클래식이 이곳을 많이 바꿔놨습니다. 음악을 하면 수업료도 낼 수 있고 다른 일도 할 수 있어요.” 

피아노와 드럼을 연주하는 스펜서(15)는 말수가 거의 없었다. 어머니, 누나,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고 아버지는 언제 죽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과묵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승부욕이 강한 그는 이튿날 케냐 서부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여한다고 했다. “(게토 클래식에서) 10명이 가요. 우리가 이길 거예요.” 

세인트 존스에서 유치원 과정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마그릿 두오고(46)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키우고 있다.
그는 코로고초에서 남편을 만나 10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러나 16년 전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다. 왜 사라졌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코로고초에서는 흔한 일이다.
“혼자인 엄마들이 많아요.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많고.” 
21살 쌍둥이인 두 아들은 집에 있다.
일을 해야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두오고에게는 중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채리티(15)가 희망이다.
채리티는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그는 2015년 세인트 존스 교회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음악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코로고초에서 차로 20분쯤 가야 하는 여자 중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음악은 내 삶의 전부예요.
슬프다가도 음악을 연주하면 행복한 느낌이 들어요.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는 드럼 같은 타악기가 중요해요.
다른 단원들이 따라야 할 비트를 정해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집에는 악기가 없으니까 연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반드시 세인트 존스로 가요.”

채리티는 엄마와 에이브러햄 링컨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링컨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배웠어요.
제 삶의 모토는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아빠 얼굴은 본 적 없어요. 엄마는 강해요.
저도 엄마처럼 강한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반드시 성공해서 내가 받은 것을 되돌려 줄 거예요.

네 살 때 코로고초에 온 에밀리 오낭고(25)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동경해 왔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게토 클래식에 참여해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엔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더 많은 곡을 알고 실력도 좋아서 부끄러웠어요.
그렇지만 여기 말고 다른 데서는 배울 수 없으니까 그만둘 수 없었죠.
이곳에서의 삶에는 문제가 정말 많지만 바이올린을 연습할 때는 모든 걸 잊을 수 있어요. 어디 출신인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다 잊고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 듭니다.”

그에게는 네 명의 자매와 남동생이 하나 있다.
부모까지 합해 8명의 가족이 방 하나에 산다. 가족 중 수출용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그의 어머니만 직업이 있다.
혼기가 됐지만 그는 떠밀리듯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제 주변에는 저보다 어린데도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이 많아요.
이곳 남자들은 여자가 아이를 가지면 떠나버려요. 돈보다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돈은 없어도 서로 헌신하면서 만드는 안정적인 관계가 가족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음악을 통해 서로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깨달을 수 있었어요.” 

■ 음악은 세계로 열린 창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는 빈민촌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게토 클래식이 케냐에서는 물론 외국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보태고 있다.
유수의 음악가들이 찾아와 열었던 마스터 클래스도 여러 차례다. 2011년 그래미상 가스펠 부문 수상자인 커크 웨일럼은 이 오케스트라만을 위한 곡을 작곡했으며 색소폰 연주자 브랜퍼드 마샬리스는 관악기의 리드를 기부했다.
학생들은 스카이프가 지원하는 원격 화상통화 방식으로 레슨도 받고 있다. 바이올린 수업은 독일과 아르메니아에 있는 음악교사들이 진행한다. 독일의 현악사중주단 살루트 살롱도 게토 클래식 오케스트라를 돕는다. 


라반 라이롱고는 아들 조셉(왼쪽)이 음악가가 되기를 바란다.
그는 “게토 클래식이 코로고초를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지난 7월13일 열렸던 정기 연주회도 각국에서 날아온 ‘객원 연주자’들이 함께했다. 플루트를 연주하는 아노키 칼라일이 그 중 한 명이다. 영국 워윅 대학교에 다니는 그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케냐 출신이다.

외삼촌의 소개로 게토 클래식의 연주를 유튜브에서 보고 찾아오게 됐다는 그는 “내가 경험할 가장 특별한 콘서트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보였다.
케냐 제일의 부호로 알려진 콤크래프트그룹 회장 마누 찬다리아의 손녀 니랄리 찬다리아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정기 연주회를 위해 함께 연습에 참여했다.
공연 전 오케스트라 연습을 이끈 이는 폴란드에서 온 음악가 ‘지멕(JIMEK)’이다.

음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그는 2012년 4월 온라인으로 진행된 비욘세의 ‘엔드 오브 타임 리믹스 경쟁’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2015년 ‘힙합 히스토리’로 세계적 유명 인사가 됐다.
‘힙합 히스토리’는 힙합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30개 곡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 것이다. 그는 “뉴욕 유엔아동기금(UNICEF)에서 일하는 친구의 소개로 게토 오케스트라를 알게 돼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최종 리허설을 준비하던 12일 오후 지멕이 오케스트라 단원들 앞에 섰다. 그는 지난 몇 주 동안 단원들과 ‘힙합 히스토리’를 연습해 왔다. 
“지금부터는 악보는 그만 보고 음악을 만들어야 해요.
클래식 악기는 액센트, 크레센도, 디미누엔도를 섬세하게 처리해야 아름다운 색채의 팔레트를 만들 수 있어요. 미묘한 차이들을 결합하면 무한한 조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지루한 철학 이야기는 그만하고 연주를 시작해볼까요?”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힙합의 선율과 리듬이 클래식 악기의 정교하고 풍부한 질감을 타고 흘러나왔다. 단원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연주에 집중했다. 오낭고는 부지런히 바이올린의 활을 그어 내렸다. 채리티의 두 손은 드럼을 내리쳤다. 

교실 밖에는 여전히 쓰레기 하치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악취가 감돌고 있었다.
가난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 곁에 있고 불확실한 미래는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믿는다. 이젠 어떤 절망과 무기력감도 자신들을 막아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경향신문>

2017-11-12 07:42:45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전자신문
주간운세
시민권 취득 예상문제
운전면허 예상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