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taciturnity가 말없음이고, talkativeness는 수다스러움으로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訥辯(눌변)을 slowness of speech라고 하고, 達辯(달변)를 eloquence of talking......앞의 두 단어는 말量(양)의 多少(다소)를 두고 하는 표현이고, 뒤의 두 의미는 말의 속도나 流暢(유창)한 fluency를 다룬다.
이 4개를 섞어보면, 寡默과 訥辯, 그리고 多辯과 達辯은 서로 내통하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말이 없다가 보니까 어쩌다가 입을 열면 더듬는 어줍음이 있을것 같고, 말을 많이 하다가 보니까 남들 보기에 靑山流水(청산유수)와 같다고 한다.
말더듬이가 청산유수를 볼때 多辯(다변)으로 보느냐, 아니면 達辯(달변)으로 보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수다쟁이가 반벙어리를 訥辯(눌변)으로 봐줄 수 있을까 하는 問題(문제)를 提起(제기)할 수 있다. 또한 沈默 愛好家(치묵 애호가)가 어떤 때와 장소에서 어쩌다 한마디 했다 하자. 그러면 사람들이 그의 말이 조리있고 유창했다고 입방아를 찔 수도 있다. 반대로 웅변가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들었다 하자. 사람들이 그 달변가를 수다쟁이라고 수근거리게 된다.
나무나 풀도 '말이 아닌 말'을 한다. 하물며 動物(동물)에게서랴? 水中(수중)의 고래나 돌핀도 音波(음파)로 수중통신을 하며, 地上(지상)의 생명들은 공기로 소리를 실어보낸다. 왜 이런 통신이 필요한가는 그들의 집단생활에서 서로가 돕고 살아야 되는 생존경쟁의 필요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동물 중에서도 群棲(군서)하지 않는 동물은 성대가 발달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고, 서로 뭉쳐야 하는 인간은 동물세계에서는 가장 弱骨(약골)이었기 때문에 孟獸(맹수)들이 먹을 수 없는 뼈나 깨서 그 안의 骨髓(골수)를 먹다가 보니까 두뇌가 체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만물의 영장의 위치에 도달했던 바다.
다시 말해서 音聲(음성)으로 협조를 구하고 共同(공동)생활을 영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意思傳達(의사전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집단생활에 요구되는 사항이 되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 보다 말을 잘한다. 소위 "수다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여자들은 더 많이 聲帶(성대)를 사용해야 하나? 여자는 어깨가 작고 그 대신 궁뎅이가 큰데 비해서 남자는 어깨와 팔다리가 근육으로 가득하고 반면에 骨盤(골반)이 빈약하다.
그리고 여자의 성대는 작아서 높은 音(음)을 내고 남자는 성대가 튀어나와서 굵은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져 있다. 남자는 맹수와 큰 소리로 위협하며 싸워야 했고, 멀리서 서로 소리지르며 응원과 협조를 구해야 했고, 또 먼 거리에 신호를 보내고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자들은 작고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을 안고 끼고 끊임없이 작은 소리를 자주 했어야 했다. 어린 것들을 위험에서 보호해야 했었고 철이 들도록 항시 주의사항을 알려야 했다. 이런 철부지들을 몰고 다니려면 말의 質(질)은 문제가 않되었고 分量(문량)과 횟수가 요구됐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남자들은 대체로 寡默(과묵)한 기질을 타고나게 되고, 여자들은 죽을 때 까지 잔소리를 끊임없이 多辯(다변)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젊어서는 아이들에게, 늙어지면 남편에게...
언젠가 성경공부를 가졌던 자리에서,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말해보자는 주인장의 제안이 나왔다.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나는 말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잠언에 있는 이 구절을 아주 좋아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害(해가)가 따라오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지혜있는 者(자)로 인정해준다"고. 구태어 말로써 禍(화)를 부를 필요가 있는가? 오직 Benefit of Doubt을 노림으로써 남을 까리까리하게 높힘 받는 잇점이 있다는 거다.
내가 교회생활 30여년을 하면서, 이같은 한국남자들을 자주 보았다. 입이 있으나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할까, 아니면 어떤 깨우침의 경지에서 말을 삼가하겠다는 것인지, 하여간에 말을 않하거나 못하는 사람이 매우 많더라.
내가 이곳에 이민와 살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말의 豊年(풍년)을 즐기는 지를 놓칠 수가 없다. 그런 연고로 더욱 더 우리사람들의 말수 적은 것에 신경을 쓰게된다. 더구나 지금 '인터넽'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이메일에 반응하지 않는 우리들의 습성을 어찌 봐주어야 할지. 전부터 편지질은 해서 않된다고 했지 아마.
미국사람들은 처음이나 오래나 자잘구레한 말로써 말이 상당히 많다. 왜 이럴까? 침묵함은 상대를 불편하게 해준다는, 즉 남을 아낀다는 기독교의 '사랑정신'에서 나온 관습으로 보인다. 희랍시대서 부터 로마에 이르는 서양문화에서는 Dialogue(대화), 연설, 토론이 발달했던 것을 우리가 배웠다. 따라서 그 후예들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해서 한국은 침묵의 문화가 발달해왔다. 즉 喜怒愛樂(희로애락)을 밖으로 나타내지 말라고 公子(공자)가 말했다고. 우리 모두가 君子(군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말이 적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오직 感情(감정) 만을 다루는 교훈이다. 이에 비하여, 理性的 判斷(이성적 판단)의 西洋(서양)의 것은 어떻게 처리하라는 말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람들의 모임에 가보면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오직 '좋고않좋고' 하는 감정의 핏대만 분분할 뿐, 그 내용과 사고의 '옳고그름'에는 별 관심을 쓰지 않는다. 그래 자리를 파한 다음에는 "실은 그게 아닌데, 뭐 어쩌구..."라면서 말들이 많다. 따지면 손해보고 돌림을 받게 됨을 겁내서 그런지?
회의라는 데서는 절대로 먼저 發說(발설)을 하지 않는 것이 德(덕)으로 간주가 되고, 結議(결의)된 어떤 것도 후에는 지키지 않으려는 無法主義(무법주의) 良心痲痺(양심마비)가 횡행하고 있다. 따라서 말 잘하는 목사님은 환영을 받고, 과묵하신 장로님은 평생장로를 해도 문제가 없다. 미국 교회에서는 장로직을 맡았다가, 평신도로 돌아왔다가, 다시 집사를 해도 전혀 상관 안하더군. 한국사람들 처럼 감투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로들은 寡默(과묵)한 것으로 만사를 해결하시더군. 말없는 "어부지리"에 익숙하다 보니 교회는 늘 분란이 그칠 날이 없다. 寡默(과묵)이던 沈默(침묵)이던, 多辯(달변)이던 拙辯(졸변)이던 "좋은 내용의 말을 적당한 때에 잘 할 줄 알아야" 한국 사회공동체에 필요한 절대적 安危(안위)와 건전한 發展(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문론 개인들 사이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됨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