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에서 이동한 것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수도사단 기갑연대 3대대 화기소대에 배치되었다. 1961년 5월 말경에 화지리...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 모르지만, 그 곳은 결국 강원도 춘천시 북쪽의 시골이었다. 더 북쪽이 DMZ로써 남-북대결의 최전선이었다. 이곳에서 밤과 낮으로 잠을 못자면서 정말 軍생활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기상하자 마자 아침을 먹기 前에 '플라시틱'의 모래주머니를 지고 인왕산 높이의 高地(고지)에 올라야 했고, 대낮에는 어디 가서 삽질도 하고 개울에 가서 큰 돌덩이를 날라야 했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나같은 이등병은 오밤 중에 한시간 이상 보초를 서야 했다. 내 차례를 겨우 마치고 다음을 깨우면 얼른 일어나지를 않고 애를 먹였다. 새벽에 다시 잠을 청하다 아예 잠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몇달 후에 우리 연대병력이 군사분계선 바로 앞으로 이동하였다. 내 화기소대에는 나말고 몇명의 대학생들이 있었는데, 사단에서 동계운동 경기가 있는데 '스케이트'를 탈줄 아는 사병을 부르길래 여기에 응해서 집에 가서 '스케이트'를 메고 歸隊(귀대)를 했더니 우리 부대가 더 북쪽인 남방분계선 접경으로 배치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그 곳을 찾아갔다. 체육대회고 뭐고 다 사라지고 그곳에 도착해 보니, 좌로는 그 유명한 백마고지가 멀리 보였고, 우리들 바로 앞 오른쪽에는 낙타고지가 낙타등 같이 평야에 우뚝 서 있었다. 6-25 동란이 휴전에 들어간지도 7-8년이 경과했는데도 백마고지는 그때 까지 산등성이가 하얗게 남아있었고, 옛날에 평양으로 까지 뻗어졌다는 철원평야가 넓은 시야에 들어오며 휴전선의 2 km 무인지대에는 숲과 풀더미가 그 가운데를 갈라놓고 있었다.
우리들 20 여명의 소대 병력은 OP (Observation Post)란 방카를 설치하고 낮에는 자고 밤에는 북한땅의 동정을 살폈다. 그 작으막한 공동묘지 야산의 남쪽으로 초가집 막사에서 생활하며 북의 병력 움직임을 밤에 관찰하고 보초서고 일부는 대낮에 야산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모아드렸다. 나보고 나무를 해오라고 분대장이 명령을 내려서 山野(야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큼직한 보따리 만큼 들고 나타났더니 같이 갔던 시골친구들이 모두들 웃어제꼈다. 이 사람들은 머리위 까지 올라오도록 잔나무를 잘라가지고 모두들 한짐씩 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내가 언제 산에서 나무를 했봤다는 건가? 이런 동료들 속에 섞였으니 조롱을 면할 수가 없었던 거라.
어느날 나무하러 갔었는데, 부분대장이 들고 있던 M1소총을 내게 맡기면서 저기 노루 한마리가 있으니 쏘라는 것이다. 받아들고 그 쪽을 노려봐도 노루는 않보이고 파른 풀만 노랗게 보였다. 거기 어디에 노루가 있냐고 묻자, 손가락으로 그 쪽을 가리켰다. 그것이 무슨 바위가 아닌가 했었다. 약 150m 앞에 과연 노루의 형상이 나타났다. 내가 정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웬걸! 노루가 능선 넘어로 사라지고 말았다. 분대장이 나를 나무랬다. 사격에 자신이 있는 나인데 실수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돼서 그 곳으로 달려갔다. 능선 넘어 4-5m에 노루 한마리가 누워서 피를 흘리고 있지를 않은가?
외삼춘 한테 내 어릴 때 들은 말이 있어서 갈대를 하나 꺽어서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피를 대롱으로 삼고 피를 빨았다. 두어번 이렇게 했는데 갑자기 목안이 막혀왔다. 내가 겁이나서 하던 짓을 멈추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중지시켰다. 야생동물의 피는 워낙 빨리 응고하기 때문에 잘못해서 氣道(기도)가 막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런 후로 일주일이 넘게 목안이 답답했었다.
당시에 전방부대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특식이란 것이 나왔었다. 주종에는 꽁치가 나왔고 또한 가끔 소고기가 배달되었다. 두가지를 따로 받았는지 지금 확실한 기억이 없지만 소고기의 경우에는 입에 정작 들어가는 것은 한 조각도 채 될지 말지 했다. 사단본부에서 연대, 대대, 중대의 손을 거쳐오면서 모두들 착복을 하고 나니까 결국 국물만 둥둥 떠도는 그런 시절에 노루 한마리는 대단했던 것이다.
나도 나무단을 지고 노루를 어떻게 지고 갈 건가를 염려하며 그 곳으로 갔더니 그 자리에는 내가 분명히 잡아 놓은 노루가 없지 않은가? 이게 무슨 일인가 놀래서 모두들 얼굴만 처다보는데, 우리 총소리를 듣고 누가 와서 그것을 가져 갔지 않겠나 하는 말을 누가 했다. 우리 남쪽 10여리 밖에는 군대건 민간이든 어느 누구도 없는 황량한 무인지대인데, 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생각하며 급히 초갓집 막사로 돌아왔다.
한 사팔뜨기 상병이 웃음이 함박만 해가지고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내가 화를 내면서 가져올 작정이면 우리에게 알려야 할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 친구 말이 내가 이것을 지고 오느라고 옷 한벌을 피로 물들이고 왔는데 무슨 불평이냐? 지금 세탁을 해서 걸어놓고 나오는 중이라는 거다. 하긴 고맙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느 전라돈가 충청돈가 하는 일등병 녀석이 장교의 당번을 하고 있었는데 이 者가 취사병이었다. 총을 싸서 잡은 사람은 난데, 나는 그 노루고기가 누구 입에 들어갔느지도 모르게 쓱싹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과연 그 노루 고기한 점을 먹었었나 한참 생각해야 할 정도다. 하여간 한국 사람들, 사기성에서 뉘한테 지지 않을 영악한 근성에는 혀를 내둘러도 침 한번 흐리지 않는다.
또 한번은 꿩 한 마리를 M1소총으로 잡았던 적이 있었다. 우리 남방한계선의 2 km 안에는 휴전이 성사되기 이전에는 가장 치열했던 전투지역이었다. 이곳이 뚤리면 평양과 원산으로 펼쳐지기 평야지대이다. 그런 이유로 좌측에는 백마고지가 멀리 뻩혀있고 우리 쪽의 평평한 땅에는 옛날 논들이 즐편하던 곳으로 그 때 휴전 후에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아서 풀밭의 자연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노루나 꿩이 무진장이라면 과장되겠지만 한번 날으면 수십마리가 날아오르는데, 무심코 지나던 사람은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곳곳에 지뢰가 파뭍혀 있다고 해서 노루가 다니는 외길로만 다녀야 했는데, 이런 갑작스런 굉음은 가슴을 떨어뜨리는 그런 폭발이었다.
가끔 어디서 온 사단장들이 엽총으로 사냥을 한다고 들었지만 내가 있을 때는 그런 행사가 없었다. 들려오는 말은 북한군이 밤에 와서 어느 분대원의 목을 잘라갔다는 소문이 들려온 적도 있었다. 이런 꿩과 노루가 수없이 야생을 하더라도 M1 소총으로 어쩌다 잡는 것은 거의 드문 일에 속한다. 또 독수리인지 솔개도 잡은 적이 있었고, 너구리도 올가미로 여러마리 잡아 먹었었다. 나는 도저히 너구리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남들이 먹길래 한 점 집어 먹었다가 구역질이 나서 뱉어냈더니 같이 먹던 분대원들이 성을 내면서 저기 꺼져달라고 인상을 쓰면서 열심히 그걸 먹더군. 야생동물의 고약한 냄새의 고기를 마다하고 먹어야 하는 쫄병들의 신세랄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