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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반도를 둘러싼 전운이 감돈다?
작성자 rainbows79

육체적인 통증은 멎었는데 마음의 통증은 전혀 가라앉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기증까지 어질어질 자판기 두드릴 기운도 없지만 무언가
말 하고 싶다 그래서 기운이 닿는데 까지만 되지도 않는 누덜누덜 해진
부채를 펼치고 나름의 소설을 써 볼까나 합니다.
먼저 한반도를 둘러싼 전운이 감돈다입니다.

그 누가 있어 앞날을 정확히 예측이 가능할까?
우리 모두가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먼 문외한 들인데?
그래도 불안하니까 이러 저러한 생각을 하고 나름의 예측과 역사에서 배운 교훈
모든 인지 능력을 총 동원해서 온갖 신경을 집중하게 되는 것은 생존 본능이 아닌가?
본인이 짐작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무줄이 너무 팽팽해졌다 입니다.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동물의 세계에서 보면 그 무리들의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좋은 영역에는 먹거리가 풍부하고 좋은 자리를 두고의 싸움은 목숨을 걸고 진행이 됩니다.

이 영역에서 밀려난 무리는 먹거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도둑질로 연명하지만 발각되는
그 순간은 죽음입니다.
다른 종이 아니고 같은 종입니다.
사자 , 늑대 , 하이에나 같은 종끼리의 피 비린네 나는 싸움입니다.
물론 종이 달라도 먹거리를 두고의 싸움은 처절하기만 합니다.

쉬엄 쉬엄 천천히 하겠습니다.
인간과 짐승이 무엇이 다른지를 각자가 생각도 해보시고....

먼저 질문하나 미국에 백인 우월주의가 있습니까?
다르게는 인종차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분명히 존재합니다.
백인 중에 인권을 말하고 흑백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백인들도 예외없이
그러하다가 30년 넘게 미국 이민 생활 후에 얻은 확신입니다.
간단히 증명해 드리면 여러분들의 자녀 중에 고교 졸업 후에도 백인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는 자녀가 몇이나 됩니까?
결혼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아직도 셋방 사는 느낌?이 드는 것 도 무관치 않습니다.


먼저 미국의 트럼프의 어메리카 퍼스트의 원조인 토머스 우드로 윌슨을 모른다면 미국을 말 할수 없습니다.
(영어: Thomas Woodrow Wilson, 문화어: 우드로우 윌슨, 1856년 12월 28일 ~ 1924년 2월 3일)은 1913년부터 1921년까지 미국의 28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미국 남부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정치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총장을 역임하기 전까지 교수이자 학자로써 다채로운 연구를 하였다. 

1910년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 소속으로 뉴저지 주 주지사직에 출마하였고, 당선되어 1911년부터 1913년까지 34대 주지사를 역임하였다. 1912년 대선에 출마한 그는, 공화당의 분열로 40%밖에 안되는 득표율로 당대로는 가장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당선되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진보주의의 선봉장으로서 민주당이 1912년에 상 하원을 모두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현대 행정학의 창시자, 제28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과 더불어 연속 2기를 집권한 (당시로서는) 두번째 민주당 대통령이다.

2. 정치학자, 대통령이 되다[편집]
버지니아주 스탠튼에서 조지프 윌슨과 자넷 우드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 윌슨은 스코틀랜드계 장로교 목사였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바랬으나 윌슨은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에게서 정치를 배운뒤 정치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신성모독류 甲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정치의 길로 가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데이비슨 대학에 입학했다가 1년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편입해서 1879년 졸업했다. 이후 버지니아 대학으로 가서 1년간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886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명예 박사학위가 아닌 자기가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은 윌슨이 유일하다고 한다. 흠좀무.이후 정치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02년 만장일치로 46세의 나이로 모교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다.[1] 그리고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미국 정치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정치학자로서 정치 현안에 자주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윌슨을 미국 민주당이 영입해 1910년 뉴저지주 주지사로 지명받아 주지사로 재직했다.
윌슨의 정치적 입장은 대체로 진보적 자유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은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마셜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민주당을 상대해야할 공화당은 윌리엄 태프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립하는 바람에 적전 분열이 일어났고 윌슨은 공화당의 분열을 틈타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어느 나라의 보통사람이 떠오른다... 이 대립은 조지 부시 대 빌 클린턴에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3. 대통령으로서[편집]
3.1. 국내 문제[편집]
대통령 취임 후, 윌슨은 국내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1기 임기 동안 그는 끊임없이 하원의원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노력이 효과를 봐서 네 개의 주요한 법안이 통과했다.첫째는 "언더우드 관세법안 Underwood Tariff"으로, 보호무역 정책으로 높았던 미국의 관세를 낮추고 대신 수정 헌법 16조에 근거하여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두번째 법안은 1913년 12월 23일에 서명된 "연방준비법 Federal Reserve Act"으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1914년에는 연방무역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었다.
이 세 법은 모두 연방정부의 힘을 강화하는 바탕이 되었다.또한 1914년에는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이 통과되어 파업과 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하고, 노사분규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복구불능의 파괴행위가 예견될 때는 금지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하지만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공화당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해 중남미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중남미 국가들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윌슨은 중남미를 통제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를 침공하여 베라크루즈를 무력 점령하여 당시 멕시코의 우에르타 정권을 몰락시켜 버렸고[2] 히스파니올라 섬의 두 나라를 보호국화했다.

3.2. 국제 문제[편집]
재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먼로 독트린의 전통에 입각해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무차별 상선 공격으로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이 발생해 미국내에 반독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서 결정타로 독일 제국이 멕시코에게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을 제안한 치머만 전보가 폭로된 것으로 결국 윌슨은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16년 재선을 위한 유세에서는 전쟁불참을 내세워서 당선됐는데 취임 1달 만에 모든게 뒤집은 것이다.[3]
진보적 성향의 윌슨이었지만 전쟁 중에는 국가가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확신으로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이 모인 극우단체들을 이용해 반전운동가들이나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어두운 측면도 있었다.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는데 분명히 '독일의 경제 악화로 인한 사회혼란, 이로 인한 전쟁 재발 우려'를 들었다.
그는 경제적인 압박이 사회혼란과 전쟁 재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오늘날 우드로 윌슨이 정치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로, 당대에는 과대망상 취급받으며 씹혔다.[4]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대통령으로서의 수완이 너무 없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잃어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바램이 담긴 베르사유 조약 중 국제연맹 창설 딱 하나만 살릴 수 있었다.

지독한 레임덕에 시달리던 와중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카톨릭 독재'라 혐오하는 등 개인적인 카톨릭과 군주제 혐오 때문에 동맹국들과의 협상 조건으로 황제의 퇴위와 민주 정부 수립을 내걸었기 때문에 결국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군주정이 붕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장기적으론 어떨지 몰라도 단기적으론 대혼란을 초래했고 그 결과가 발칸반도의 피바다와 나치의 집권이었다.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1919년 6월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은 소위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그중 "민족 자결의 원칙(혹은 민족자결주의)"은 전세계 식민지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렸으나, 그것은 패전한 동맹국 측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독립시킨 식민지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승전국인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놓을리가 없었으므로 그 주인의 지배에서 대부분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측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에게 거하게 낚인 셈.(…) 그리고 국제연합기구를 만들자는 주장에 의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지만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도 못했다. 더욱이 일본 측에서 인종차별 철폐 제안을 내놓자 윌슨은 미국으로 이민자가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반대하기도 했다.이 사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윌슨의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것이 애당초 백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그것이다.
한편으로는 윌슨이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의회로부터 승인받기 위해서 인종차별철폐 제안을 반대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의회에 이민제한 정책을 흔들수 있는 소지를 없앴으니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은 허락해달라는 일종의 거래를 위한 카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그래도 의회가 지지해주지 않자 윌슨은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8천 마일에 달하는 유세를 하지만,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 방문하던 중 뇌경색을 일으켜 10월 3일 반신불수가 돼버리고 말았다.
공화당의 상원은 윌슨이 떠나고 나서야 독일과의 별도의 단독 평화조약을 비준했다.

4. 아내의 직무 대행과 사망[편집]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대통령이 집무 불능 상태가 되었으니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것이 옳겠지만, 윌슨의 부인인 이디스 윌슨이 이를 숨기고 윌슨의 남은 임기동안 모든 국정을 처리했다(…).권력욕 참 대단하다 아메리칸 비선실세 물론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윌슨이 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일체의 정치적 활동이 거의 제한되었을 뿐이다. 역사상 세번째로 8년 임기를 꽉 채운 토머스 R. 마셜 부통령도 부통령 임기를 체우고 싶었는지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이 사실은 윌슨의 생전에는 숨겨졌다. 윌슨의 행정부 2기 후반부, 윌슨의 소망은 반은 이루어지고 반은 이뤄지지 않았다. 1919년 금주법, 즉 '볼스테드 법(Volstead Act)'이 윌슨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1920년 8월 여성의 투표권이 수정헌법 19조로 통과되었다. 또 12월에는 유럽 평화에 기여해 노벨평화상도 수상할 수 있었다.윌슨은 3년이나 넘게 살다가, 1924년 2월 3일 워싱턴 D.C의 자택에서 자던 중에 사망했다. 이시스의 국정 처리도 윌슨 사후에야 밝혀졌고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있던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 승계 원칙에 대한 규정을 확실하게 한 미국 수정헌법 제25조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5. 의외로 정치적으로 철저히 인종차별주의자[편집]
진보주의와 행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평가에 이면에는 현대에 이르러 파시즘적인 면모가 많이 발굴되고 있다. 바로 인종 증오를 통해 상하원에 정치적 세력을 불린 배경인데, 그 정치적 세력이 다름아닌 Ku Klux Klan(KKK)단이다.
KKK단의 2차 부흥을 이끈 인물로서 정치적 원동력은 강력한 인종차별, 인종배척주의라는 점에서 나치의 원동력과 비슷하다고 비판 받기도 한다.

1차 KKK가 단순히 흑인들을 적대한 것에 비해 더욱 과격해져서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소수집단을 모두 적대시하는 세력은 우드로 윌슨의 주 지지자이자, 상원과 하원의 표 밭이었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경계는 2차 대전 이후에 생긴 최신 경향이다.

6. 평가[편집]
진보적인 자유주의 성향을 띄고 있었던 윌슨은 국내 정치에선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외교정책에는 이후 미국의 전형적인 외교정책이라 할 수 있는 군사력을 동원한 패권주의로 일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결과론적인 해석이고 이러한 패권주의는 그의 대척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주장한 것이다.

윌슨은 미국의 글래드스턴으로 불릴 정도로 전쟁에 반대했고, 전후에도 국제연합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는 등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의 디즈레일리?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등 여러 부정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1차대전에 참전하여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한 것이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고 국내 정책에서 진보적인 개혁을 실시한 업적 등이 높이 평가된다.여담이지만,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우드로 윌슨을 싫어했다.
이유는 베르사유 조약 때문. 당시 영국 재무부 대표로 협상에 참여했던 케인즈는 독일에게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과 징벌이 또다른 비극과 전쟁을 불러 일으킬것이며 조약의 위험성을 윌슨에게 경고했다(그리고 진짜로 그의 예견대로 전후 독일 경제는 파탄났으며,

이는 히틀러가 집권하게 되는 촉발제가 된다). 케인즈는 윌슨을 '세계 최고의 협잡꾼'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그 이외에도 사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기존의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집단안보체제를 만들었는 데, 이게 도의적/도덕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상당히 현실적인 제약점들[5]이 있다는 것.

그리고 더한 것은 심지어 자기가 제안해놓고 미국 의회 비준을 못 받아서 미국은 여기서 빠지기까지 했다(...) 이것을 따라간 결과 독일의 성장 또는 무력도발을 방치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뮌헨 조약을 봐도 알겠지만, 침략국들이 막상 침략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대응이나 대처방법이 부족했다. 즉,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에게는 국제정치문제를 너무 이상적으로 접근해 다시금 세계 대전이 일어나도록 한 허술한 국제질서를 만든 원흉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그가 제시한 집단안보체제는 아직 건재하긴 하고 그것으로 운영되는 것이 유엔 안보리와 유엔 군이다. 이들도 집단안보체제의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7. 인물됨과 일화[편집]
여러 기록을 가진 대통령이기도 한데 사상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자, 앞에서 봤듯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것이 아닌 부인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의회에 보내는 첫번째 메시지를 직접 의회에 나가 읽음으로써 존 애덤스 이래 사라졌던 관습을 다시 부활시킨 인물이기도 했다.[6]친구가 없었던 걸로 유명하다. 애초에 부인에게 대통령직 대행을 맡긴 이유도 부인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였다고... 참고로 극심한 애처가였는데 임기 중에 아내가 죽자 상실감을 견디기 위해 1915년 12월에 이디스와 재혼했다. 응?[7]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학위를 준 사람이 당시 프린스턴 학장이었던 윌슨이었다. 당시 윌슨은 이승만을 아껴서 심지어 가족 파티에도 초대하여 사람들에게 장차 한국을 이끌어나갈 청년이라고 소개하였다고 한다.
졸업 논문의 제목은 "전시 중립론 -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이었고, 이때 이승만의 평점은 C+... 는 대학교 학부 시절 때. 늦은 나이에 영어 배우는 것도 힘들긴 했지만 발목을 잡았던 게 문돌이들의 최대의 적 수학... 수학은 C 받으면 잘 받았던 거라 하니...다만 이 부분은 한국의 대학들처럼 학점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오늘날의 미국 대학들과는 달리 당시 미국 대학들은 학점에 매우 깐깐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은 하버드나 스탠퍼드와 같은 최우수 대학들도 학부생의 90% 이상이 B- 이상의 학점을 받지만, 1950년대 이전만 해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C 학점을 주로 받았고 B는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됐고 A는 정말 최고로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받아 5% 이내의 상위 학생들이 받는 학점이었다. 그렇기에 이승만이 C+의 학점으로도 미국 최고 명문대들의 대학원 입학이 가능했고 졸업까지 할 수 있었던 것.행정학상 최초의 논문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 1887)'를 발표하여 행정학 교과서 및 수험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사실상 현대 행정학계에서는 이 사람을 행정학의 시초로 본다. 이 논문에서는 정치와 행정을 분리시킬 것을 주문하여 오늘과 같은 행정부의 위상을 성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프린스턴 대학 교수까지 지낸 엘리트 학자이고 외모로만 보면 상당히 냉철하고 쌀쌀맞은 인물로 보이지만 의외로 깨는 면이 많고 익살스러운 인물이었다. 가족들과 가장 즐겼던 놀이가 '셔레이드(Charade)'라고 해서 바디랭퀴즈 몸짓으로 단어를 알아맞추는 놀이였는데 그는 가족들과 이 놀이를 할 때면 '도도한 귀족 미망인'이나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영국인'을 너무 리얼하게 흉내내서 가족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가장 잘 흉내냈던 것이 술 취한 사람의 휘청거리는 모습[8]의 흉내를 잘 내서 지인들을 많이 웃겼다고.근데 왜 친구가 없었을까...또한 노래나 춤에 대한 개인적 취향도 우울하거나 엄숙한 노래보다는 매우 경쾌하고 통통 튀는 종류의 밝은 음악을 선호했다고 한다.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예 위트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사석에서 윌슨을 만나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해서는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과 독일에 대한 전후처리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독일에 대한 혹독한 처분을 주장한 클레망소가 "당신은 강철 심장(heart of steel)을 가진 사람이오!"[9]라고 비야낭대자 윌슨은 이렇게 받아쳤다.

"그래도 전 도둑놈 심보(heart of steal)는 없습니다."[10] 이 일화에서 보듯 그와 관련한 일화들은 말장난과 관련한 것들이 꽤 보인다.동시대를 산 유명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정치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지만 1916년 재선거 무렵에는 윌슨을 지지했는데 윌슨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들은 윌슨이 크게 헤맸다고 했습니다. 뭐, 제 생각도 그렇구요.
그렇지만 전 그가 헤매도 항상 앞으로 나아가면서 헤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윌슨이 백인우월주의자여서[11] KKK단을 미화한 영화 <국가의 탄생>을 보고 박수를 친 적이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http://www.pbs.org/wnet/jimcrow/stories_events_birth.html 미국 비영리 공영방송인 PBS의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내용.윌슨이 죽었을 때 당시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가 죽어서 천국에 갔을 때 모세를 만났다. 모세가 윌슨을 보고 "자네가 바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인가? 안됐구만. 자네가 제안한 14개조 평화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들었네."라고 말했는데 윌슨은 "뭐 그렇죠.

하지만 모세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셔서 인간들이 십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이라고 받아쳤다고. 이 이야기는 당연히 떠돌던 이야기지만 인간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훼손한 것을 보면 자신의 평화원칙에 대한 폄훼는 견딜만 한 것으로 여긴 윌슨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이야기다. 실제로 윌슨은 자신의 평화원칙을 십계명에 견주기도 했다. 신성모독류 甲[12]땅콩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대통령에 당선되자 조선에서는 윌슨의 땅콩농장에서 땅콩을 수입하기도 했다.[13]여담이지만 심슨 가족의 바트 심슨이 자신의 담임선생님인 에드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우드로라는 가명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그 우드로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바로 이 분이다.

8. 오늘날의 우드로 윌슨[편집]
그 유명한 러시모어 산의 네 명의 대통령 얼굴에 그가 들어갈 뻔했다. 이걸 만들 당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은 쉽게 결정되었고 처음 이걸 만들 때 얼굴을 저 세 명만 새기려고 했지만 빈 바위가 남아 있어서 그 바위에 새겨질 주인공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슨이 경합을 벌였던 것. 그러나 루스벨트가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이고 본격적으로 미국을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대통령으로 높이 평가되는 바람에 루스벨트에게 밀렸다. 우리나라에서 '우드로 윌슨'하면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한국에 영향을 미친 민족자결주의는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창한 것도 역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개념 자체가 "주의"와 같은 사상 체계는 아니기 때문에 레닌이 먼저 제창한 것은 아니고 이미 민족주의로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윌슨의 시대때 떠돌던 민족자결주의의 근원은 당시의 국제 공산주의 연합이었고, 윌슨은 프로파간다를 교묘히 잘 이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여기에 영감을 받은 인물 중 한명은 호치민.[14] [15] 

9. 관련 어록[편집]
"보수주의자는 그냥 앉아서 생각만 하는, 주로 앉아만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보수주의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의심이 나면 할머니와 상의하는 것입니다."[16]
"트러스트들이 돈만 있다면, 정부를 사려고 할 것이다."#

"곧 평화란 승리가 없는 평화가 아니면 안 된다. 승리란 패자에게 군림하는 강압적인 평화를 뜻한다.
그것은 수치를 당하고 희생을 감수하고서만 받아들여질 것이리라. 또한 후에 분노와 고통의 상념을 남기게 되리라. 그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요, 모래밭에 놓여진 것에 불과하다. 평등한 자, 동지의 평화만이 오래 지속된다. 평화의 대원칙은 평등하며 공통적인 복지에 공동으로 참가하는 것이다."[17]

"평화를 사랑하는 이 위대한 국민을, 문명 자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도 할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으로 몰고 가기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정의는 평화보다 값진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해온 것들을 위하여 싸우려고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정부에 대한 발언권을 위해, 약소국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세계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고 적어도 자유롭게는 해줄 그런 보편적인 권리를 위하여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아메리카를 태어나게 했고, 행복하게 했고, 그토록 찬미했던 평화를 가져다 주었던 원칙을 지키기 위해 피와 힘을 바치는 영광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나니,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18]

[1] 당시 재학생시절의 이승만에게 직접 박사학위를 수여했다.[2] 이때 미국의 강력함이 드러났는데 베라크루즈 전투와 멕시코 침공에서 멕시코는 총력전으로 저항하고 당시 중남미의 강국이었던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도 멕시코의 구원요청에 지원군을 파견해 같이 맞섰지만 미국은 이를 모두 격파해버리며 멕시코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남미 전체가 미국에게 이길수 없음이 드러났고 미국이 중남미의 맹주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외교에서도 멕시코가 불리했던것이 멕시코는 유럽 국가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럽은 미국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아 거절했다.

이후 중남미의 모든 국가들이 미국에게 도전하지 않았다.[3] 그러나 윌슨은 전쟁을 막기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연합국과 독일을 중재하려 노력하며 평화협상을 여러번 제안했다. 그는 그 유명한 '승리없는 평화'를 주장하며 모든 인류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보였다. 멕시코에 대한 독일의 개입이 여러번 드러나면서 참전여론이 강해지자, 카이저의 황화론 개드립까지 꺼내가며 참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짐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그런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다.[4] 그러나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안좋았다지만 독일의 처벌을 줄이는 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우드로 월슨의 소극적인 태도 하에서, 1대전의 주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독일에 청구된 어마무시한 배상금은 결국 2차 대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정치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영역에서일 뿐, 미국 밖의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다.[5] 무엇을 안보로 위협하는 세력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재가 마땅한가? 집단안보를 지키기 위해 각국은 그렇게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사실, 이 모두가 합의되기 어려운 사안이다. 그나마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합의라고 평가받는 한국전쟁 역시 소련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가능했다.[6] 
소위 연두교서로 현대 미국 정치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7]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들이 극심한 상실감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다른 배우자를 구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으로 유명한 도종환 시인도 아내와 사별한지 1년 만에 재혼한 바 있다.[8] 영어로는 고무 다리(rubber-legged)라고 쓴다.[9]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입은 피해가 막대한데 윌슨이 독일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니까 '동맹국한테 냉정한 것 아니냐'는 뜻으로 비꼰 것.

클레망소는 별명이 호랑이였을 정도로 괄괄한 인물이었고, 특히 독일 하면 죽을 때까지 치를 떨었던 인물이다. 유언도 "나의 시체를 독일을 향해 선 채로 매장하라"였을 정도.[10] steel과 steal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말장난 [11]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었을 때 흑인들은 지원하지 말라고 했다. 백인 동문들과 백인 학생들끼리만 평화롭게 지내는 게 나을 것 같다면서.[12] 클레망소의 버전도 있다. 

"모세는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겼다.
이제 윌슨이 우리에게 14개조를 주지만 그것이 지켜질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본문중에서도 나와있지만 1차 대전중 독일에게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를 대변하던 인물인 클레망소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다.[13] 60년 후의 어느 민주당 대통령도 땅콩농장 농장주.[14] 자세한 내용은 윌슨의 순간 (The Wilsonian Moment)-에레즈 마넬라 (Erez Manela),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1-2장 참고.[15] 물론 소련은 카라한 선언을 통해서 제정 러시아 시기에 청나라 및 군벌들과 맺었던 불평등한 비밀협정을 완전히 무효화했고, 강제로 확보했던 영역도 무상반환했다.

이 때 러시아가 건설한 철도도 무상반환하기로 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발생하면서 중소분쟁의 원인이 되긴하는데, 이 시기의 이런 선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1차대전에 승전국으로 참가한 중국과 일본 가운데서 일본의 입장만 반영된 결론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도출되면서 중국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소련의 지원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에 모두 영향을 끼쳤다. 이 때의 대결구도는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대 제국주의 구도였기 때문이다. 독립된 나라 대부분은 소련에 편입되거나(소련 자체가 그 목적으로 세워진 연합국가이므로) 몽골과 같은 위성국이 되었다.[16] 1912년 대선 때 연설 중에서 공화당(미국)을 비꼬며 한 말.

[17] 1917년 1월 21일, 미국의 상원에서 한 '승리없는 평화' 연설중 일부다. 그는 유럽에 평화를 호소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전쟁에 쏟아부은 연합국과 독일에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치머만 전보, 러시아 혁명 3단콤보로 그는 3달 뒤 역시 명연설로 기억되는 제 1차 세계 대전 참전연설을 해야했다.[18] 제 1차 세계 대전 참전연설중 일부.

여기서 윌슨은 미국을 여성으로 표현했다. 윌슨은 연설 이후 우레같은 갈채를 받았는데, 윌슨은 이에 대해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젊은이들에 대한 죽음의 메시지인데, 그걸 환호하다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드는군."

2018-01-28 14:57:38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9   rainbows79 [ 2018-01-29 01:03:02 ] 

이 글을 쓴 진짜 이유
미국에서 본 한반도의 현실이고 이곳에서 오래 생활한 미주 교포로서
짐작컨대 북의 외교팀도 이 곳의 모든 게시 글을 보지 않을까?
참고하라고 미국의 의도를 잘 못 파악한 댓가는 너무 엄중하니까!
여기 틀딱 들에게는 많이 어려울 내용이지만 어차피 내 글 작성의도와는
무관하니까.
순간의 선택이 평생이 아니고 많은 생명의 목숨을 좌우하니까
바른 선택을 하는데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해서 그러지.....

8   rainbows79 [ 2018-01-28 19:29:20 ] 

결론입니다.
미국이 전쟁을 개시한다면 중간 선거 이전인 4~8월 사이가 유력하고
제한적인 폭격으로 끝날지 전면전으로 확대가 될지는 장담 불가하지만
북의 김정은은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어떻게든지 대화무드나 평화
무드로 끌고 가서 다른 타개책을 모색하겠지만 미국이 이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에 문 정권이 반대한다면 ?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 될 것이고 정권 자체가 흔들리지 않을까?

두 가지로 예상합니다.
모두가 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 않는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는 별로 가능성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극적으로 미의 핵 포기 제안과 사찰을 받아들이거나 그도 아니면?
화약을 지고 불 섶에 뛰어드는 무모함?
나는 전자에 그 가능성을 더 두고 싶습니다.

7   SanghaiP [ 2018-01-28 16:17:07 ] 

그랴..랭보는 항상 나이 혀놓은 읍적에 감탄만 흐고 핑생을 남에게 의존흐고 탓만 흐고 살았쓰니 AI가 놀랍긋지... 종부기 주사파나 북한 아이들흐고 사고 방식이 비슷흐니 니같은늠들 보믄 놀라울그도 읎다만...
AI한국도 한끝흔다... 너같이 성겡책만 뒤적이니 그런 AI에 도전을 못흐긋지만...종교적인 이유로...

6   rainbows79 [ 2018-01-28 15:46:36 ] 

그래 참고는 하겠네..
가끔 여기에 옮겨오는 미쿡 신문기사 내가 번역한 것 아님세
번역기에 놓고 돌리면 1초면 해결되네 처음 나왔을때는 어색했는데
갈수록 질이 좋아지네 손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세상이 많이 좋아졌네 ...
지성보다는 감성이 중요한 시절이 왔단 말이지 내말은 ..
판 검사가 법조문 달달 외울 피료도 없지 사건 개요만 컴터에 넣으면
판결문 까지도 해결 가능 하겠지만 인간이 간섭해야 할 부분 감성이네
알아듣겠나?
수학은 말하면 숨차고......

5   zenilvana [ 2018-01-28 15:31:37 ] 

정신병자에게 한마디 충고를 했던 내 잘못이 있었다. 그래 계속 감기에 걸려서 죽을 병으로 진전해보고 나서 다시 말하자. 미친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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