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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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
열린 마당
제목 한국에서 말하는 우정이라는 것은
작성자 zenilvana

오늘의 주인공으로 말하면 대학교 1학년때 처음 알게된 초면의 같은 동네, 같은 학과 신입생이었다. 등교하다 가끔 만났고, 경제학과 강의실에서 마주치다 보니 자연히 친구가 되었던 거다. 알아주는 K고교출신에다 그의 형님은 서울법대를, 그의 동생은 서울공대를 다니는 XX성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비록 내 S고교생이 아니더라도 친해지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의 홀어머니는 XX성씨 가문의 이씨왕조의 외척으로써 당시에도 과거의 영광(?)을 차곡차곡 장농 안에 간직하며 살고있더군.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고 사회지위가 바뀌다 보니 가정형편은 그리 수월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변 전에 한국은행의 높은 자리를 하였다고... 이 집에도 6.25의 후유증이 몰려들었던 결과라고 생각해야 하겠지.

이 친구가 어느날 저녁에, 내 방문을 화들짝 열고는 나를 내려다 보면서 "너 군에 갈 생각없냐"고 물었다. 나는 두말없이 그를 따라나섰던 바, 우리 둘은 철원의 북쪽 화지리란 곳에서 1년 반의 군복무를 마치게 되었다. 수도사단, 일명 맹호부대로 배치됐던 우리는 그는 연대본부에서 사무병으로, 나는 군사분계선의 접경에 설치된 OP(Observation Post), 즉 북의 군사동향을 살피는 관망소에서 어려운 군생활을 했었지.

그와 내가 이처럼 다르게 배치된 데는 그 이조 말에 당당했던 그 외척가문의 세력이 그 때, 그리고 거기까지 뻗였던 뒷사정이 숨겨있었다. 당시에 XX아무개 장군이 1군사령관을 했을 때였고, 나는 별볼일 없는 평민(?) 출신이었으니 당연히 최전방에서 온갓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제대할 때는 같은 날에 같은 시내뻐스를 타고 같은 고향집으로, 또 같은 해에 같이 사회인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고... 이러한 막역하다 할까, 하는 그런 친구사이였다.

그가 한국은행에 입행하더니 얼마 않돼서 하와이의 East-West Center라는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더라. 그리고는 성균관대학 경제학교수로, 그 후에 장기신용은행의 연구실장으로, 전전 역임하다가 얼마 전에 은퇴한 것으로 안다.

한 25여년 전에 학술연구차 왔다면서 '프린스톤'대학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내 살던 곳이 그 인근이라서 초대해서 하룻밤을 자게 하였다. 옛친구를 내가 소홀히 할 이유가 없다. Lobster를 여러 마리를 내어놓고 저녁대접을 했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었고, 그가 원하는 책방으로 안내했고... 재미교포들이 고향친구들에게 늘 하는대로 마땅한 응분의 수고를 해주었다.

당시에 그의 형님은 외자유치와 무역에 따른 법적분쟁에서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그 형의 부인은 유명한 또다른 Y외척의 딸과 결혼했고, 그분이 자기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더군. 최고급의 극진한 대접받았다고...그 이유는 내 친구에게 Lobsters를 진탕 먹게 해주었기 때문이란다.

사촌이 뉴저지 북쪽에 산다고 해서 그 친구를 2시간 넘게 달려서 뉴욕주의 경계선까지 바래다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N.J. I-95 Exit 8번에 거의 다 와서 연료가 떨어지는, 소위 '엥꼬의 불쌍사가 발생했었다. 이미 자정이 넘었는데 그 지경이 됐으니 당황할 수 밖에. 거의 한시간 가까이 이리 뛰고 저리 치닫던 끝에 어떤 허름한 밴(봉고車)가 우리 앞에 서는게 아닌가? Diesel 기름을 정도껏 넣어주길래 고맙다고 얼마를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Good Samaritan이란 '비영리 기독교단체'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서 돈을 받지 않는다고...

몇년 후에 내가 한국을 방문하는 길에 대학동창들과 노닥거리던 저녁식사 후에, 거기 모였던 동창들이 거의 모두가 은행의 이사나 모 기업체의 중역으로 운전기사가 모는 자가용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았다. 일변 부럽게, 또 일변 아니꼽게 바라보는 중에, 내 친구가 자기 차에 오르라는 거다. 보아하니 '포니 II'에 해당하는 그렇고 그런 차였다. 당시에 내 어머님께서 화곡동에서 혼자 사셨는데, 그곳까지 데려다 주는 줄 알고 나는 별 생각없이 그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지하철 입구 이쪽에서 출발하더니 한바퀴 돌아서 저쪽 입구에다 차를 세우는 거라. 내가 의아해하며 그 친구에게 물었다.

"여기에는 왜 세우냐?"

"너, 화곡동으로 간다며?"

"......"

"저쪽은 화곡동의 하행선이고, 여기가 화곡동으로 가는 상행선의 입구야."

내가 머뭇거렸다. 너무나 뜻밖이다. 이 사람의 사고방식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저 놀랠 수 밖에... 내가 그에게 베푼 성의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군소리가 필요없었다. 설혹 내가 옛날 일을 꺼집어내서 "네가 내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해본들, 그런 얘기가 통하겠오이까? 한국사람들 중에는 이같이 꽉막힌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에 빈 손으로 와서 고생하면서 조국에서 온 사람들의 야박한 인생철학을 당하고 살아온 내가 그저 말없이 그에게 하직을 고할 수 밖에...... 이런 식(式)의 실망스런 대접에 백배사례를 했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 그러질 못한게 한이 된다. 준대로 거둔다고 하더라 마는 그 땅에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던지. 그 곳에서는 친구건, 동창이건, 심지어 구쾌의원이건, 대통령 해먹는 넘들이건, You name it... 그런 세상판이 아닌가? 그들 모두가 그러고 사니까 아주 당연히 그래 햇어야 하겠지. 그런데 임마도 교회에 다닌다더군. 그래봐도 집사님이라네!

이 친구한테 한가지 고맙게 여기는 것이 있다. 내가 군을 다녀와서도 여자를 모르고 살았다. 내 총각성을 종삼에서 해결하는 첫 길을 인도해주셨던 거다. 금마한테는 그 제가 두번째라나? 좋은 점만 보고 살라고 합디다. 그는 참으로 고마운 은인이었다고 말해야 하겠지비. After all.

禪涅槃

2018-02-05 07: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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