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초여름의 어느날에 나는 충무로에서 명동 쪽 어디를 걷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그 근처 어디를 어정거리던 참에 우연찮게 박성준이의 동생인 효준이와 마주쳤다. 그가 체포되어서 중앙정보부의 심문을 받고 있었던 과정과 재판 중에 있었던 통혁당간첩사건이 연일 신문기사로 등장하던 시절이어서 동생에게 어떻게 진행되는 가를 묻게 되었다.
자기 형이 너무 아는게 많은 것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정보부 요원들과 검사들을 교육하겠다고 덤벼드니 그 사람들이 좋아하겠는가? 동생의 눈으로 볼때는 그러 했다. 자기 생각에는 그들이 몰고가는 논조에 고분고분 했으면 인간적으로 동정을 살 수 있다는 거였다.
검찰이 물고 늘어지는 혐의는 경제복지회라는 써클을 시작해서 독서회라는 명목으로 북한의 불온서적을 돌려가며 읽었다는 죄목이었다. 그 불온서적이란 것이 나중에 판명된 것은 '칼 맑크스'의 Das Kapital(1867년)이란 것이었다. 박성준이는 서울대 상과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다. 소위 '자본론'이란 것은 경제학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론이다. 1776년에 출간된 Adam Smith의 國富論(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을 경제학의 입문서라고 한다면 그 90년 후의 資本論(자본론)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지적하지 않은 수 없는 상황으로 변모하고 있었던 바다.
산업혁명 시기에 Adam Smith가 국가의 富를 이루는 근본요수는 '노동의 분업'에 근거한다. 이로써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그것은 자유경쟁의 시장에 판매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공업의 제한된 생산량을 기계의 대량으로 더 싸게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증기기관에 힘입어 산업화 되던 당시는 영국을 부강한 국가로 뻗어나가는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 교역의 상대국들은 국제시장에서 밀리게 되고 급기야는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독일을 비롯하여 열강들이 너도 나도 산업화로 치닫았을 뿐만아니라, 그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혹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 많은 시간과 더 적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국제경쟁의 대열에 질세라, 경제경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은 "이웃 거지 말들기"(Begger Thy Neighbour)라고 부르고, 모두들 자기 국민들 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착취하여야 하는 논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帝國主義(제국주의)... 일본이 1867년의 '명치왕정복고'을 성공시키고 대략 43년 후인 1910년에 조선합병이 이루어진 그런 국제정치를 말한다. 그 사이 사이에 여런 전쟁들, 크리미아 반도전쟁, 1-2차 세계대전, 그 후의 冷戰(냉전), 그리고 6-25 동란이 있었다.
노동을 분업화 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생산공정을 가능케하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의 임금을 가로채는 사유재산제도는 불공평한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노동이란 무었인가를 규명하다 보니 '잉여노동'이란 개념을 도입했고, 그 가치창조의 부당이익이 결국 자본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글에서 이미 설명한대로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선물거래'라는 장기적 이익의 확보를 위한 투기가 개입하게 되고, 그로써 '가짜자본'이 등장하게 된다. 그 '가짜의 자본이동이 자유경제에 불황과 호황의 반복을 가져온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망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단결해서 자본가들에게 더 이상 착취당하지 말라. 이것이 '자본론'의 골짜다. 이와같은 종말적 예언을 막기 위하여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사회주의정책을 채택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했고, 자연환경과 복지사회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런 종류의 이론이 이들 군사정권의 법조인들에게 먹혔겠는가? 박정권은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기로 팔을 걷고 나서던 당시에는 북조선은 경제적으로 앞서고 있었고, 호시탐탐 남한을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어서 대남간첩들을 교육해서 남으로 밀파하면서 세포조직을 구성해 나갔던 것이다. 박정권으로서는 북조선 Phobia 즉 북한공포증에 시달리던 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金鐘泰(김종태)가 통일혁명당이란 단체를 내세워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일부는 북한으로 보내서 공산당에 입당시켰고, 요로 요로의 지식인들을 포섭하였던 바다.
그 통에 걸려든 사람이 신영복(申榮福, 호 쇠귀, 1941년 8월 23일 출생)이란 육군사관학교 교관이었다. 결국 종신형을 언도받고, 20년을 복역하고, 1988년에 출소하고, 사회저명인사로 활략하다가 2016년 1월 15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김종태에게 어떤 경로로 포섭됐었는가를 그의 꼬붕 김질락이란 간첩이 사형되기 전에 한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에서 신영복씨가 포섭된 내용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 조갑제 TV
http://blog.koreadaily.com/post/post.html?med_usrid=zenilvana&pos_no=1049784
그는 경남고교 출신에 서울상대 경제학과 졸업생으로 나와 같은 나이 또래였고, 학년으로는 1년 선배가 된다 마는 박성준이에게는 오히려 1년 손아래가 된다. 부산의 해동고교생으로서 그 학교에서 처음 서울대학을 입학했던 고아로서는 고교를 어디서 나왔던 간에 무조건 선배가 되었던 것이다. 신영복란 사람은 재학시절에 팔방미인으로 불리던 재주꾼으로 학생들 간에는 이미 잘 알려진 존재였던지라, 박성준이로서는 이래 저래 선배로 깍드시 모셔야 할 입장이었겠지.
이 사람이 김종태와 청맥지니, 학사주점이니..., 하는 학원 내의 활동에 간여하고 있었던 바라 경제학의 핵심인 자본론을 읽을 욕심이 생겼을 것이고, 그것을 어떤 경로로 구입해서 '독서회' 회원들에게 읽혔던 모양이었다. 그 밖의 어떤 북한서적을 읽었는지 모르나 박성준이의 말로는 "손자병법의 知彼知己(지피지기)에 따른다면 당연히 북한에 관한 책도 읽어야 한다"는 쪼였다. 검사의 논고와 판결에 뭐로 쓰여있는지는 모르나 불온서적을 읽은 동기가 의심스럽다는 거였다.
박정희정부 측에서 볼때, 이거 이상하지 않은가? 禁止(금지)된 책을 김종태란 간첩을 통하여 공산사상의 근본에 해당하는 '자본론'을 읽는다...? 이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武裝(무장)무장하자는 것이 아닌가? 또 한가지를 더해서, 당시에 중-남미의 카토릭 신부들, 특히 페루의 Gustavo Gutierrez 가 "해방신학 (Theology of Liberation) 책을 세상에 내어놓음으로 해서 1950-1960 대에 '라틴 아메리카'의 구교에서 문제 삼았던 사회불평등과 이로서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운자들이 구제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바티칸에서는 반대의 교시를 내렸고, 일부에서는 맑스의 개념에 입각했다고 해서 "기독교적 맑시즘'(Christianized Marxism)이란 별명이 붙었다.
서방의 기독교세계에서 "부자들에게서 버림받은 가난한 者들을 구제하는 문제"가 시끄러울 시절에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강원용 목사가 그러한 신선한(?) 바람을 노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분이 서울의 경동교회에서 강론한 골짜가 바로 십자가의 '가로와 세로'의 구원사상의 가르침이 해방신학의 논조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나는 멋도 모르고 내 친구를 경동교회로 안내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 사람의 운명의 갈림길을 잘못 제시했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의 부인 한명숙이가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직장을 가지게 했던 것이고... 거기서 이 여자마저 간첩으로 몰려서 2년의 옥살이를 해야 했고... 노무현 대통령시절에 국회의원을 하다가 국무총리를 8개월 했고... 지금은 뇌물죄로 또다시 2년의 복역을하고 2017년에 출옥하였다. "내 뜻대로 말고 당신의 뜻대로 해달라"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던가? -다음 편에 계속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