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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가 뭘 좀 안다는 것은 무었인가
작성자 zenilvana

우리가 뭘 좀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었인가? 아침에 눈이 떠지면서 내가 지금 살아있는 현실에 와 있구나 하는 의식을 되찾는다. 밤사이에 잠 속에서 이런 저런 꿈을 꾸었을 때는 그것이 정말의 현실인양 좋아해 보기도 하고 무었에 쫒기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잠이 깨어서 "꿈속을 헤맸었구나"하는 깨닯음으로 내가 진짜 현실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거의 매일 경험한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의 莊子는 "나비의 꿈"이란 유명한 일화를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莊子(장자)가 어느 여름날에 대청에서 낮잠을 잤다. 자기가 나비가 되어 아름다운 꽃을 찾아 훨훨 날아다녔다. 나비로서 지금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나비가 자기를 꿈 꾸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나비를 꿈꾸다가 깨어났는지 분명치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는 자기와 대상의 認識(인식)이란 것은 이처럼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뭘 좀 안다는 것도 이와같다. 내가 안다는 것......그것을 知識(지식)이라고 하자. 이것이 보통사람의 常識(상식)이든지 아니면 무슨 과학적 論證(논증)이든지, 실은 다~ 나의 것이 아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우리가 眞理(진리)라고 하면서 자신의 것인양 목숨을 걸고 우기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짓이다.

眞理란 뭐냐? 東西古今(동서고금)에서 모두들 事實(사실)이라고 認定(인정)해 주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있다. 東西란 말은 空間(공간:space)을 말하고, 古今(고금:time)이란 시간을 의미한다. 絶對眞理(절대진리)란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서 진리로 통하는 것이 미국에서도 진리가 아닌 경우가 많다. 또 舊韓末(구한말)의 진리였던 양반상놈의 제도가 요즘에는 그렇지가 않은 진리로 변했듯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反共(반공)을 國是(국시)의 제일로 삼던 것이 요즘은 그렇지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 늘 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뭐를 안다고 자기의 주장을 남들 앞에서 내세워야 하는가? 자기로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피부로 만져보고, 혓바닥으로 맛보고 한 체험을 남이 말하는 것과 비교해 본 결과 眞理(진리)로써 너무나 확실하다고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事物(사물)을 認知(인지)한 主體者(주체자)로서의 경험과 지식이란 남의 정보 (Data)를 머리에서 분석하고 추리한 결론이니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문론 이것 마저 남들을 통하여 在次(재차) 확인하는 절차가 결국 "자기주장"이 되겠지만서도......

그런데 이 "자기" 또는 自我(자아)라는 것도 사람의 인식능력에 따라서 천차만별 다르게 경험으로, 기억으로 入力(입력)됨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 그 특정사람의 지식수준이나 선호경향에 따라서 같은 현상도 다르게 판단되어 경험으로 처리될 수가 있다. 이 판단이란 것도 우리에게 늘 냉철한 理性(이성)으로 받아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 누가 즐겨쓰는 단어로 感性(감성)이란 것은 느낌의 영역으로써 좋은 기분에서는 좋게 받아지던 것이 무슨 이유로 기분이 나빠지면 같은 것도 나쁘게 처리되는 그런 때가 있다. 현시국에서의 경거망동이란 말에서 이런 경우를 체험한다.

지난번 이곳 TV에서 어떤 젊은이가 18살때에 교통사고로 코마에 들어갔었는데, 어머니가 20여년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멀정한 아들로 대하던 끝에 어느날 갑자기 눈을 뜨고 의식을 회복했던 기이한 사건을 보여주었었다. 이젠 중년이 된 남자가 자기의 어린 딸이었던 여자를 자기 부인이라고 했고, 현재의 대통령을 Ronald Reagan이라고 말했다. 이때는 Geroge W. Bush의 시대였었다. 이런 현상을 보고 과연 自己의 인식과 지식을 꼭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드닷없이 들면서, 뭔가를 깨닯았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우리가 直觀(직관)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Intuition... 어떤 추리를 한다든가, 아니면 합리적인 사고에 의한 생각이 아닌 것이다. 맑은 하늘의 벼락같은 그런 銳感(예감:날카로운 기분), 혹은 豫知(예지:미리 안다는 것)같은 것이 떠오르면, 누구에게도 말 못하지만 자기 혼자로는 분명히 진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은 이런 直觀에 의하여 모든 과학적 발견이 시작되었으나, 지난 몇세기를 지내면서 과학, 과학하면서 論理的(논리적)인 立證(입증)이 아니고서는 眞理라고 받아주지 않은 시대가 왔다.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이런 Science 만능의 시대에서 Quantum 이론이 非論理(비논리)로도 모순의 진리로써 인정받기 시작했다. Intuition의 영역이 다시금 활기를 띄우는 시대를 우리가 지금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과학적 논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이제는 진리로 접근할 수 있다. 실은 Quantum이론 자체가 이런 直觀에 의하여 시작됐던 것이다. 문론 옛날의 귀납적이니 연역적이니 하는 과정을 거쳐서 증명돼야 한다. 촬스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이론, 뉴톤의 만유인력, 후로이드의 꿈의 분석, 등등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直觀이란 것은 이를 증명하는 충분한 정보와 반추된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견이라면서 어떤 주장이랄까, 아니면 괜한 추측을 하고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함을 자주 본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쨌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오? 말하는 것이 남의 지식이요, 아니면 자신의 경험이요? 과연 필요하고도 충분한 정보를 수집했던가요? 그리고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해 봤었오? 아니면 나만의 直觀이란 말이요? 진짜로 아는 사람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오이다. 알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無識(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안다는 것이 얼마나 조금인 가에 통탄하게 된다. 그만큼 모른다는 것을 알때, 비로소 뭐를 좀 안다고나 할지요?

佛敎(불교)에서는 "자기"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왜냐? 이 우주의 모든 것은 항상 변하는 Impermanent...! 다시 말해서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내가 아닌 처지에, 어찌 뭐를 안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기독교가 오늘날에 와서 인류의 정신세계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이 그 신학의 논리적인 dogma 에 집착하는 데에 있다. 16세기의 地動說(지동설)이 최근에 이르러서야 카토릭이 그것을 진리로 인정했고, 미국 남부의 Bible Belt에서는 하나님의 創造論(창조론)에 아직도 매달려 있다.

1888년에 Adolf Juelicher란 신학자가 ‘Die Gleichnisdreden Jesu’란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어놓고 난 기원 후 3세기 이래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200 여개의"비유 說話"(설화: Parables)를 Allegory性 (상상에 맡겨 임의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확대부연하는 전통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런 혁신적인 접근으로 오늘날에는 Sitz im Leben (독일말로 '삶의 현장')의 원칙에 입각하여 현 실정에 맞게 재 해석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시대는 변하고 사람의 생각도 변한다. 오직 한 진리만이 옳다고 우기는 태도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 서서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진리라고 본 것을 겸손히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뭐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공자의 말씀대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참고:

1. 形而上學(형이상학)은 쉽게 말해서 "철학적 사고의 학문"...형이하학은 물질세계의 탐구를 말한다.

2. Adolf Julicher (1857?1938) was a German scholar and biblical exegete. Specifically, he was the Professor of Church History and New Testament Exegesis, at the University of Marburg.

3. Julicher also helped to change the understanding of the parables of Jesus among scholars, emphasizing that there was usually a single point of comparison between the story and what it represented.He made a distinction between parable and allegory, claiming that a true allegory was a literary type of which Jesus was not aware and did not use.

4. An Introduction to the Parables of Jesus (by Robert H. Stein)과 "Rediscovering the Parables" (by Joachim Jeremias)란 책들을 참고하시라.

禪涅槃

2018-03-24 09:43:58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dakshang [ 2018-03-24 23:19:55 ] 

붙들어야 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놓아야 하는 시간이 있듯, 진리라는 것도 어렵게 생각하면 더욱 어려운 것인 고로, 그냥 마음 편하게 사는 것도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하며 산다면 사는 것이 즐거워질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람 마음 편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1   rainbows79 [ 2018-03-24 17:46:32 ] 

친구 쉬운말로 한마디 하면 될것을.... ㅉㅉㅉ
인간에 속한 것은 절대 진리가 없고.
절대 진리는 ?

신의 영역에 있다. 쉽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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