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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맥아더의 망상을 꺾지 못했다
작성자 rainbows79

ㆍ순진했던 미군정은 안정적 힘을 위해 이승만이 필요하다는 맥아더의
망상을 꺾지 못했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오른쪽)과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 앨버트 브라운 소장. 해방 후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정부 수립 때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하지는 남한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우익은
미군정의 딜레마였고
중도 리더십을 원한 하지 사령관은
30대 초반의 버치 중위에게
좌우합작위원회 조정을 맡겼다

수많은 한국 정치인을 만난 버치는
상부에 올린 보고서의 모든 사본과
개인 메모까지 빠짐없이 보관했다
1945~48년 한국을 담은 이 자료는
비합리적 한국 정치의 원형을 찾고
이 땅에 매카시즘이 작동하는
근원을 찾는 단서가 될 수 있다

1947년 5월 워싱턴에 소환되었다가 서울에 귀환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미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 간담회에서 자신이 다른 점령군 사령관에 비하여 두 가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러시아인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점령 지역 중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분할점령이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인들의 성격이었다.

“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아일랜드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즐기는 것을 좋아하고 유머의 센스가 많으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또한 주장이 많다.

공상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설화들이 있다.
술 먹는 것을 좋아하며 파티와 휴가, 정치권력을 사랑한다.
지적 수준이 높으며 동시에 그러한 수준으로 인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매우 획일적이며 중국인과 다르며, 일본인도 아니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내려왔으며,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동양의 기준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했다.”(버치 문서 박스 5)

평생을 야전에서 보냈던 하지 사령관으로서는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이끌어가면서 한국의 정치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국이 패전국이었다면?

점령 지역의 거주민들이 독일이나 일본에서처럼 승전국에 고분고분한 자세를 보였겠지만, 한국은 패전한 일본 제국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패전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 일본의 피해자들로서 승전과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받으러 온 야전사령관의 입장에서 이러한 한국인들을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편견에 가득 찬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국인의 독특한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본 것 같은 평가를 외신기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게다가 미군정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추진했던 신탁통치안을 보수 우익세력들이 반대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우익세력들을 지원하고, 이들이 신탁통치하의 주도권을 잡고 궁극적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지가 외신 인터뷰를 한 시점에서 그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이러한 딜레마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던 이는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중위였다. 그의 계급은 ‘중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통치했던 시기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고, 미소공동위원회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하버드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출신으로 오하이오주의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가 1945년 12월15일 한국에 배치되자 하지 사령관은 그를 중용하였다.
버치는 텍사스의 포트 샘 휴스턴(Fort Sam Houston)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우수 생도상을 받은 인재였다.

하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정권을 이양하라고 ‘떼를 쓰고 있는’ 골치 아픈 보수 우익의 지도자들이나 소위 ‘추수폭동’을 주도한 좌익이 아닌 중도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들로 리더십을 세우고 싶었고,
이를 위한 중재자로 버치 중위를 선택했다.

버치가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도록 지원하였고, 그 활동이 단독정부 수립이 확정될 때까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지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로 인해 버치는 30대 중반(1910년 1월8일생)의 나이에 한국의 쟁쟁한 정치인들을 만나고 거물이 되었다.
그는 정치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치적 동향을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흐름의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정치자금과 정치인들의 숙소와 당사를 마련하는 작업에도 관여하였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빈 공간들을 누가 차지하는가는 당시 한국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국내와 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유수한 한국의 정치인들이 버치를 만나고자 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고, 다양한 상황에 대해 청원을 하기도 했다. 버치는 자신이 만난 정치인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전달했는데,
그 복사본을 모두 보관하였다.

또한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부 문서들이나 개인 메모 역시 보관하였다.
그렇게 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은 사후 그가 졸업한 하버드 대학교 옌칭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으로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섰던 레너드 버치.
버치는 1948년 38선 이남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추진했던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한 통합 한국 정부의 수립이 실패한 직후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73년 버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미군정 시기 연구자로부터 그 시기를 전체적으로 평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버치는 마치 자신이 실패했던 한국에서의 작업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 10장이 넘는 분량의 편지를 그에게 썼다.

그의 편지는 “나는 한국에서의 진행상황을 보면서 철저하게 실망했고, 용기를 잃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지 장군은 나에게 동의했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안정적 힘을 갖기 위하여 이승만이 필요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도쿄,

특히 연합군최고사령부로 인해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고 2년 반 동안 스스로의 활동이 실패했던 원인의 결론을 내렸다.

이 편지를 쓰기 전이었던 1965년 ‘주한미군정사’를 집필한 호그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버치는 웨스트포인트 출신과 비육사 출신 간의 갈등과 함께 맥아더가 이끌고 있었던 연합군최고사령부와 미군정의 갈등,

국무부와 국방부 사이의 견해 차이에 대해 언급했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 하지 장군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미국을 대표해서 참여했다.

1973년의 편지에서 태평양사령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다음 버치는 한국 내 정치적 문제의 핵심으로 이승만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고 첨언했다.

물론 버치 역시 하지와 마찬가지로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참여시켜야만 하는 미국의 딜레마를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편지는 “하지 행정부는 순진했다”라고 마무리되어 있다.

버치는 왜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는 왜 좌절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성공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던 것인가?

버치가 보관하고 있다가 하버드 대학으로 이관된 그의 자료들은 그가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보고 느꼈던 내용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와 견해를 달리했던 미군정 내 군인, 관리들과의 갈등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미군정 시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부 문서들은 미군정 자료가 공개될 때 이미 햇빛을 보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료들도 적지 않다.
또는 기존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자료들 역시 주목된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분단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을까?

국내에 전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승만이 미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빠른 시간 내에 한국민주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의 재기용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알면서도 미군정은 왜 이들을 계속 고용해야 했는가?


이러한 해답을 찾는 과정은 한편으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기원과 그 원형을 찾아낼 것이다. 이는 버치 중위가 갖고 있었던 자료들이 비이성적 세력들이 권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과 함께 지방정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연재를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의 탈냉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한국에서 매카시즘이 작동하고 있는 그 근원을 찾아가도록 하겠다.
<경향신문>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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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그룹의 고위급 여성 임원이 자신의 승진을 위해 남성 상사들을 위한 술접대 자리에 부서 여직원들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수년 전부터 일어난 일로 직원들 사이에서 문제 인식이 팽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여직원은 인사담당자에게 관련 사실을 밝히며 퇴사까지 했다고 한다. 회사 측은 몰랐던 일이라는 입장을 보이며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다.

피해 여직원의 말을 인용해 여성 고위 임원이 자신의 인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남성 상사를 만나는 자리에 부서 여직원을 동석시켜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방에서 함께 춤을 추도록 강요했다고 1일 보도했다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해서라면? 얼어죽을 미투?
[출처] -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246407&code=61121211&sid1=s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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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1950년 9월 7일] 이즈음 우리 마을에서는 어느 집이나 도토리를 따다 말리지 않는 집이 없다.
모두들 북한산에 올라가서 도토리 따는 것이 생업이 되었다.
그런 줄 알았음인지 산에서도 또 의용군 모집이 있기 때문에 젊은 남자들은 며칠씩 나가다가 말고 이 고된 일도 역시 노인네와 여인들과 아이들이 맡아 하게 됐다.

도토리를 따다 껍질을 벗기고 물에 담가서 오랫동안 유독 성분을 우려낸 후 말려서 가루로 빻아 떡도 해 먹고 묵도 만들어 먹는다.

옛날에 비황(備荒, 흉년 대비) 책에서나 듣고 보고 하던 이야기를 20세기의 한 마루턱에 앉아서 몸소 겪게 되었다.
하루 진종일 도토리 껍질을 벗기고 나면 손톱 밑이 얼얼하니 아프다.
그리 못 견디게 아픈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난다

[1950년 8월 14일] 쌀을 한 줌 넣고 거기다 호박이랑 호박순이랑 다른 푸성귀를 듬뿍 넣어서 머얼거니 쑨 죽이 이즈음 우리의 상식(常食, 늘 먹는 음식)처럼 되었다.

오늘내일로 양식이 동이 나는 것은 아니로되 앞길은 막연하고, 아이들은 식욕이 왕성하고, 하여 이러한 비상 조치를 취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거나마 끼니를 잇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오히려 송구스러울 지경인데 아이들은 절박한 사정을 알 턱이 없다.

"정녕 쌀알을 넣긴 넣었는데 워낙 잡초가 무성하여 보이지가 않는구려" 하고 죽을 푸면서 아내는 서글픈 웃음을 짓는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이들이 다소곳하니 받아먹기에 "그놈들도 전쟁을 아는가 보다" 하고 한결 다행히 여겼더니 이즈음은 죽상을 대하면 외면한다.

그래도 잘 타이르면 봉아(아이 이름)는 그러려니 하고 술(숟가락)을 들지만 목아(아이 이름)는 아무리 말해도 본체만체다.
정 말하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언제까지 이래야만 할는지 앞길을 생각하면 아득할 뿐이다.

[1950년 8월 28일] 인민보(人民報)에 식량운반 돌격대에 관한 기사가
사진을 넣어서 실려 있다. 그 내용은...

"경기도 여주군의 농민들이 강도 미제와 그 주구인 이승만 매국도당들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그들을 하루바삐 격멸하려면 자기네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궁리한 결과 식량을 모아서 서울에 나르기로 하고, 70 노인이랑 열세 살 먹은 아이랑 젖먹이 어린이를 가진 여인이랑...

이러한 사람들이 쌀 두 말 혹은 세 말씩을 혹은 지고 혹은 이고 이 8월의 불볕 아래 200리 길을 걸어서 서울에까지 가져왔다.

오는 도중에서 혹은 병들어 죽고 혹은 폭격에 희생이 되었으나 이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맹세코 그들을 쳐 무찌르고야 말 결의를 새롭게 하고 있다고."

이런 기사는 광적인 열성분자가 있어서 이거나마 자랑이라고 쓴 것인지, 또 혹은 반동 기자가 있어서 인공국의 내막을 폭로하려고 일부러 쓴 것인지 우리로선 분간할 길이 없다.

이러한 기사를 읽고도 인공국의 정치는 참 훌륭하다고 생각할 어수룩한
친구가 세상에 과연 있을 것인지?"

오마이 뉴스에,들어가면 관련 사진과 글이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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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언론 "트럼프와 브로맨스 과시했던 아베, 이제 후회할 것"
자동 요약 결과가 어땠나요?
폴리티코 칼럼…트럼프에게 공 들이고도 무역·대북 정책서 '소외'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비위 맞추기에 공들인 끝에 한때 '브로맨스'를 과시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이제는 이를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고 미 언론이 보도했다.

유명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1일(현지시간) 미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에 기고한 칼럼에서 "그 어떤 세계 정상보다 빠르게, 더 따뜻하게, 트럼프 대통령을 껴안았던 아베 총리가 아마 지금쯤 '구매자의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는 내가 크게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던 아베 총리의 발언이 무색하리만치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일본의 기대를 크게 비켜나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1980년대 이미 일본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인사였다. 1989년 이 부동산 재벌은 일본을 "미국의 피를 조직적으로 빨아먹는다"고 비판하며 모든 일본산 제품이 20%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또 대선 기간에는 "우리가 더는 부담할 수 없다"며 일본이 안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11월 8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꺾고 대선에서 승리하자 아베 총리는 세계 정상 가운데 가장 먼저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갔다.

불과 50일 전 뉴욕 방문 때 클린턴 후보를 먼저 찾아간 것을 생각하면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아베 총리는 당시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과 "신뢰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며 추켜세웠다. 이때만 해도 아베 총리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 같았다. 일본학자들도 두 사람의 '브로맨스' 조짐을 칭송하며 두 정상의 이런 관계가 미·일 동맹의 견고히 유지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제럴드 커티스 미 컬럼비아대 일본 전문가는 "아베가 일본에 관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발언을 중단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들의 관계가 좋게 시작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도박은 날이 갈수록 더욱 나쁜 상황으로 흐르는 듯하다. 아베 총리의 계산이 엇나갔다는 것은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발을 뺐을 때 이미 감지됐다.

당초 무역 장벽을 고수하던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TPP에 참여한 것은 획기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미국은 중국을 경계하기 위해 일본의 TPP 참여가 필요했고, 일본은 자국 수출을 확대할 기회로 여겨 참여를 결정했지만, 이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어그러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TPP 탈퇴에 그치지 않고 수입산 알루미늄과 철강에 관세를 매기는 등 잇달아 관세 부과 정책을 내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23년간 지속된 강 달러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아베 총리의 리플레이션(통화 재팽창) 계획을 위기에 빠뜨렸다.

제프 킹스턴 템플대 도쿄캠퍼스 아시아연구소장은 "트럼프에게 굽신거리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다니 불쌍하다"고 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오락가락하는 대북 정책도 아베 총리의 후회를 부추긴 요인이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와 화염" 발언에 박자를 맞추며 애를 썼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의 회담을 선언하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내정자로 "슈퍼 매파"인 존 볼턴을 내정하면서 일본의 공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북한의 보복 대상은 지근거리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이 될 것이 분명해서다.

아베 총리의 후회를 키우고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국으로 대우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상관없이 중국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시 주석이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길을 열자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시 주석을 부러워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지난해 방중 때는 시 주석과 "대단한 화합"을 보였다며 중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중국의 전략적 야심에 일종의 방어벽을 치기 위해 공동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제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중 대계획' 속에 일본의 소외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에서 아베 총리 지지율은 최근 30%대로 떨어졌는데 이는 '사학스캔들' 여파도 있지만 부정적인 '트럼프 효과'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배르드 글로서맨 다마대 교수는 "아베는 트럼프와 가깝게 지낸 모든 책임은 지고 계획한 이득은 아무것도 못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18-04-01 20:42:50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rainbows79 [ 2018-04-01 21:36:08 ] 

도전과 응전에 관한 보고서
中, 트럼프 ‘관세폭탄’에 보복관세 맞불…128개 품목 최고 25%
중국이 미국산 과일, 돼지고기 등 128개 품목에 최대 25%의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했다고 중국 재무부가 1일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부터 수입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규모 관세를 매기자, 중국도 즉각 보복 관세를 부과하며 맞불을 놓은 것이다.


중국이 쓰레기통 닫자… 집집마다 "우린 어쩌란 거냐"
중국 수출길 막혀 적자 나고 정부는 소각·매립 부담금 부과
재활용업체 "수지 맞추기 어렵다"

문재앙이 중국발 미세 먼지에 대해서 한마디하자 즉각적인 중국의
협력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백인 일색' 백악관 인턴… 단체사진 공개 후폭풍
90여명 중 아프리카계 남녀 1명씩
"백인 아닌 사람 찾기 어렵다" 비판
미국 백악관이 새 인턴사원 단체 사진〈사진〉을 공개한 이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90여 명 인턴 사원 중 비(非)백인이 1~2명에 불과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행정부의 다양성 부족이 고위 관료 인사에만 한정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31일(현지 시각) 보도했다.<조선일보 헤드라인들 입니다>

힘없는 소수민족, 힘없는 국가만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 주의자 미 대통령에
무조건 충성하자는 보수 틀딱들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합니다.

1   rainbows79 [ 2018-04-01 21:17:36 ] 

‘총기 난사’ 플로리다 고교생들 “학교 가기 두려워”
학생들은 학교의 강화된 보안 조치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2일부터 더글러스 고교 학생들은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진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며, 항상 새로운 학생증을 착용해야 한다. 또 교내 경찰 배치가 늘어나고,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된다. 더욱이 학교는 교문에 금속 탐지기를 설치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로빈슨은 "우리는 더 이상 정상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없다"라며 "벌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계엄령 선포하고 학교에 공수부대, 탱크 배치하고 선샌들에게
기관총 소지가 답이외다 ~갈갈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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