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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버지의 수첩
작성자 rainbows79

"하루라도 국가원수 안 돼"... 박근혜보다 더한 지도자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임시정부를 망친 이승만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는 3·1운동에서 폭발된 민족의 열망을 반영했다. 그해 4월 11일 임시의정원 의결을 통해 수립되고 4월 13일 수립 사실이 대외에 공포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치 시스템을 지향함으로써 세계사의 흐름에도 보조를 맞췄다.

그래서 높은 역사적 의의를 띠는 임시정부는, 하지만 항상 2% 이상 부족한 느낌을 풍긴다.
좌우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고 독립투쟁을 주도하지도 못했다.

임시정부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조직력을 구축하지도 못했다.
3·1운동 정신을 반영했다는 중대한 역사적 의의에 비해, 임시정부가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표출된 '민주공화국 형태의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의 열망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통해 어느 정도 성취됐다.

그래서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는 헌법 전문(서문)의
선언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은 움직일 수 없다.

임정이 제역할 못한 이유

임시정부가 그렇게 된 결정적 원인이 있다.
바로, '임시대통령'을 잘못 뽑아서였다.
지도자보다는 대중이 더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물론 맞는 이야기이지만, 지도자를 잘못 뽑으면 어떻게 되는가는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대한민국 역사가 잘 증명한다.

나라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든가 나랏돈이 증발되든가 결정적 순간에 지도자가 집무실을 비우든가 하는 수가 있다.
그런 문제점이 대한민국정부뿐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있었다.

알다시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그런데 애당초 임시정부에는 대통령이란 직책이 없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그를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그때는 국무총리가 정부 1인자, 정부수반이었다. 서울에서 별도로 수립된 임시정부에서도 그를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개의치 않았다.
스스로 대통령이란 직함을 내세웠다. 마음대로 명함을 파서 다닌 것이다.

역사학자 김삼웅의 <독부 이승만 평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대통령 호칭은 헌법에도 없는 참칭이라며
강하게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대통령 직함으로 행세하면서 오히려 임시정부에 대통령 직제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 타이틀을 합법적으로 쓰고 싶어, 임시정부에 개헌까지 요구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태평양 잡지사를 통해 3·1운동을 주체로 하는 <대한독립혈전기>를 발간했는데, 첫 장에 '대한민주국 대통령 이승만' 사진을 올리고 '대통령 선언서'를 실어 교포들에게 배포했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스스로를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유영익 석좌교수가 1996년에 펴낸 <이승만의 삶과 꿈: 대통령이 되기까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1919년) 6월 14일 미·영·불·이 등 열강 정부에 그리고 6월 27일에는 파리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에게 각각 한국에 '완벽한 자율적 민주정부'가 탄생했다는 사실과 자기가 그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대통령직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해도,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고 좋은 성과를 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는 좋은 성과를 내기는커녕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집무실을 지키지도 않았다.
아니,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도 부임하지 않았다.
미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해 밖에 머물다 '임지 이탈'한 지도자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요구 끝에 이승만이 임정 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20년 12월 13일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위의 김삼웅 책에서는 "이승만은 정무에 전념하지도 않았다"라면서 상하이 밖으로 여행하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이승만도 자리에 대한 집착이 지나친 반면, 직무 성실성은 현저히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이승만 때문에 김규식·이동희·안창호 같은 인물들이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이란 존재가 임정을 약화시키는 독소로 작용했다.

그뿐 아니다. 이승만은 임정의 단합에도 관심이 없었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배척하고, 소련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혐의를 씌우려 했다.

지도자로서 조직 통합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자세로 일관하다가 6개월 만인 1921년 5월 29일 상하이를 떠나버렸다. 임지를 이탈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직은 사임하지 않았다.

그가 지도자의 책임의식이 없었다는 점은 자금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원칙상으로는 지도자가 돈을 준비해야 하지만, 상하이 임정은 그에게 재정적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근무지를 떠나 호놀룰루에 도착한 직후에 대한인동지회 창립 모임에 참석한 자리에서, 자기가 돈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임정 사람들이 불만을 품었다며 임정을 비판했다.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지도자로서 자금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부끄러워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돈을 기대했다'는 식으로 임시정부를 헐뜯었다.
임시정부에서 기대했든 안 했든, 자금 마련이 지도자의 책무라는 점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직은 절대 놓지 않았다.
상하이를 떠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이승만은 탄핵을 당했다.
1923년, 임시정부 의정원은 탄핵 절차에 착수했다. 의정원은 탄핵서에서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遠洋一隅, 먼 바다 귀퉁이)에 편재해서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면서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 진행을 기하기 어렵다"라고 선언했다.

이 탄핵에 의해 이승만은 6년 만인 1925년, 대통령직에서 해임됐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대통령임을 자처했다.
2007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에 실린 김수자의 '이승만은 왜 두 번이나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나?'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면직된 이후에도 그 직위를 그대로 사용하며 미국에서 활동하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결정적 패착

▲ 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과 하지(왼쪽), 맥아더(

이승만은 한마디로 골칫거리였다.
그런 사람을 임시정부 초대 정부수반으로 추대한 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결정적 패착이었다.
그런 지도자를 내세웠으니, 일이 잘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도 남아있기 힘들었던 것이다.

박근혜를 두고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임시정부에 두고 있으니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탄핵된 이승만'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으로 해석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 최초 탄핵'으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바뀌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어 대한민국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그는 두 번째 기회도 활용하지 못하고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두 번째 쫓겨날 때인 1960년에는 탄핵이나 형사재판을 받기도 전에 하와이로 망명해버렸다.
1925년에 비해 훨씬 더 무책임했다.

이승만은 애당초 대통령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쫓겨난 것이다.
불행한 것은, 우리 국민이 그런 사람을 두 번씩이나 지도자로 추대했다는 점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 역사가 잘못 꼬인 데는 이승만 같은 '저급 지도자'를 선택한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임시정부를 위축시키고 독립운동을 약화시킨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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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노동 하는 아버지 낡은 수첩에 적힌 '숫자'의 의미
종이와 펜 대신 못과 망치를 들어야 했던 아빠의 삶

아빠는 글자를 쓸 때면 손을 떨었고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었다.
자음 하나 쓰고 쉬고, 모음 하나 쓰고 힘주고, 다시 자음 하나 쓰고 보고, 그러면 글자 하나를 겨우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쉬고 힘주고 보고를 반복해 자기 이름 석 자를 써냈고 그 이상 길어지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글을 쓰는 게 익숙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글자를 잘 써보지 않아서, 더 정확히 말하면 아빠의 인생에는 손보다 몸으로 하는 일들이 많아서였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빠는 겨우 한글을 뗐을 것이고 학업이라고조차 표현할 수 없는 얕은 배움의 시간들을 짧게 보냈을 것이다.
'국민학교도 중퇴할 수 있는 건가?',
'그럼 몇 학년에 아빠는 학교를 그만 다니게 됐을까?' 차마 그 학년을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 이후의 삶은 죄다 몸으로 일구었기에 어쩌다 종이 위에 글씨를 써야 할 때면 익숙지 않음을 티내듯, 손은 진동했고 바짝 긴장했다.
몇 줄도 아닌 몇 글자를 쓰고 나면 종이는 항상 울퉁불퉁해졌다.

아빠는 손에 종이와 펜을 쥔 날보다 못과 망치를 쥔 날이 훨씬 많았다. 무거운 벽돌과 시멘트, 철근과 나무판들은 매일 만졌어도 그 얇디얇은 종이 한 장 만질 날은 많지 않았다. 아빠의 직업은 그랬다.

▲ 아버지 수첩에 적힌 숫자들


하지만 그런 아빠에게도 수첩과 펜은 항상 필요했다.
그 수첩에는 하루하루 일한 날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일용직 근로자였던 아빠에게는 일한 날 수를 잘 적어두고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삶은 글자보다 숫자가 많았다.
그 숫자들이 차오를 때면 아빤 항상 나에게 불쑥 물었다.

"8만 원씩 26일이면 얼마냐."
"이백팔만 원이요."

곱셈을 해드리고 나면 아빠는 기쁨도 슬픔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고개 한번을 끄덕이고 나가셨다.
아빠의 월급에는 감정이 없다.

수첩을 두고 가신 어느 날 나는 그 낡은 흔적들을 넘겨보았다. 숫자들이 가득 적힌 몇 장을 넘기면 가족과 친척, 지인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휴대폰이 있어도 스마트폰을 사드려도 평생 직접 손으로 적은 수첩 속 전화번호부를 보셨다.

가끔 휴대폰을 만지는 아빠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빠는 굳은살이 가득 차오른 뭉툭하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항상 0과 #, 1과 2를 같이 눌렀다. 전화 한 번을 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휴대폰 안에도 수많은 글자들이 있기에 전화기능 이외에 다른 것들은 사용법을 익히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 시절 내가 가장 부러웠던 건 엄마 아빠와 문자로 얘기하는 친구들이었다. 매번 아빠는 휴대폰 화면을 보고 망설인다.
누르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한글이 익숙지 않다는 것은 아빠를 아날로그에 머물게 했다.
그래서 아빠는 아직도 전화를 걸 때 휴대폰 대신 먼저 수첩을 연다.

아빠의 수첩은 노동의 증명이다

아빠가 적은 그 수첩의 전화번호부는 내가 아는 이름들이 많았지만 적혀 있는 이름들은 달랐다. 아니 틀렸다.
아빠는 본인 이름 석 자를 쓰는 것 외에 다른 글자를 쓰는 일이 익숙지 않다.
틀린 이름들이 가득 적힌 몇 장을 넘기면 아들과 딸인 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은 여러 번 다르게 적혀 있고 여러 번 지워져 있다.

그러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면 이내 정확한 내 이름 석 자와 오빠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아들과 딸의 이름은 적확하게 새겨져 있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그 두 이름만큼은 바르게 쓰고 싶으셨을 것이다.
자식의 이름만큼은 여러 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 쓰셨다.

아빠의 하루는 그 수첩에 오늘의 날짜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 숫자들은 하루 치의 노동이었고 증명이었다.
50년을 넘게 노동했던 아빠의 수첩은 다 합치면 몇 개나 될까?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 작은 수첩을 펴고 무딘 손으로 볼펜을 잡고 떨며 써 내려갔던 노동의 숫자들. 1부터 31까지 쓰고 나면 다시 반복됐던 삶의 숫자들.
아빠가 평생 막노동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숫자도 31까지만 배웠으면 됐을까?

"8만 원씩 31일이면 얼마냐."
"이백사십팔만 원이요."
"이만 원 더 준거 맞네. 아빠가 오늘 월급 이백오십만 원 받았다."

한 달을 꼬박 일한 아빠의 보너스는 이만 원이었다. 그날 아빠의 퇴근길 손에는 이만 원어치 삼겹살이 들려 있었다.

▲ 아버지의 수첩

우리 아빠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아빠의 삶은 지금보다 글자가 많아졌을까?
무거운 연장 대신 가벼운 펜을 쥐고 몸 대신 손으로 일을 했을까?

대학을 졸업한 딸이 펜을 쥐고 아빠의 삶을 써 내려 가는 것으로 작은 보상을 대신한다.
나의 펜은 아빠의 연장이고 나의 글은 아빠의 삶이니까. 나는 아빠의 연장으로 글을 쓴다. 오늘도 아빠는 그 낡은 수첩에 오늘의 날짜를 적고 잠이 드셨다.

<오마이뉴스>

2018-04-10 18:00:40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rainbows79 [ 2018-04-11 19:34:33 ] 

문재인정부의 확증편향

시민운동가 출신 김기식 전 의원의 금융감독원장 임명은 문재인정부의 인력풀이 얼마나 협소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피감기관의 돈으로 외유성 출장을 다녀왔다는 도덕성 논란은 제쳐놓더라도 그가 금감원장 직을 수행할 만큼 금융에 전문성이 있는지에 대해선 대부분 회의적이다.

문정부 인력풀의 한계는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자기들과 성향과 이념이 같은 사람만 쓰겠다는 극심한 ‘사람 가리기’의 결과다.
박근혜정부처럼 악의적이고 조직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우리끼리만’ 하는 폐쇄성에서는 도긴개긴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남북 대화파들로만 판을 까는 것을 넘어 다른 시각에 재갈을 물리려는 조짐도 보인다.
국립외교원 S 교수의 아산정책연구원 이직,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세종-LS 객원연구원의 사직에 청와대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문정부 대북정책을 비판한 이들의 기고문이나 방송 발언이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스트라우브의 사례는 S 교수와 달리 일본어로 손타구(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알아서 행동함)에 가까워 보이지만 맥락은 그대로다.

경제 분야도 다르지 않다.
공무원은 물론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국책연구소 연구원들도 최저임금 인상이나 청년실업 대책 등 논란이 되는 정책에 대해서는 사석에서조차 의견을 말하길 꺼린다.

인간은 자기의 신념과 일치하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믿고 싶은 정보만 믿는 심리적 성향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쉬운 말로 하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다.
이런 편향성은 의사결정 때뿐 아니라 정보 수집 단계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모이면 잘못된 판단과 정책 실수를 할 가능성이 커진다.

각 부처 자문위원회 등이 문정부의 이념과 성향에 맞는 전문가들로만 채워지고 있다는 얘기는 오래됐다.

김기식 원장에 대한 비판과 의혹 제기가 금융개혁 반대 세력의 음모라는 여권의 반응은 이 정부의 확증 편향이 이미 위험한 수준이라는 신호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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