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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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Angeles
열린 마당
제목 너나 잘해!
작성자 dakshang

성공한 어느 탈북자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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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는 누굴 위한 구호인가

지난 4월 28일 “탈북난민 강제북송 저지를 위한 규탄결의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소재의 중국 대사관 앞에 갔던 적이 있다. 중국정부가 재중탈북자를 ‘불법월경자’로 보고 강제북송을 자행하고 있는데 대한 기독교 및 국제인권단체들의 국제적 대회였다.

얼마 전 미국의 비정부기구인 난민 및 이민위원회가 밝힌 데 의하면 한 해 동안에 무려 5천명씩 북송 된다고 한다. 탈북자를 난민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불법 도강한 범죄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발생초기부터 중국에서 거론된 문제다.

지금까지 중국당국은 북한과 맺은 ‘범죄자 인도조약’에 따라 탈북자들을 강제북송 하고 있다. 배고파 국경을 넘은 사람을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식량난이 시작될 때 30만 명으로 집계되었던 탈북자의 수가 현재 5~1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주장도 이러한 중국당국의 강제송환정책이 낳은 결과다.
얼마 전 한 중국 언론도 “1978년 7월 북중 공안당국이 맺은 ‘국경지역안전과 사회질서 유지에 관한 합작 협정(有关维持边境地区安全和社会秩序的合作协定)’에 근거해 중조 두 나라 는 비법월경사건 발생시 즉시 월경자의 명단과 사진을 제공하게 되어있다”고 밝힌바 있다.

중국은 이 조약에 따라 탈북자가 발생하면 즉시 북한에 넘겨준다. 중국인이 북한에 도망쳐나갈 일이 없기 때문에 북한은 이 조약에 충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덩치 큰 중국은 조그만 북한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 주고 있다.

탈북자는 잡히면 족쇄에 묶이고 무장경찰의 호송 하에 짐승처럼 끌려나간다. 그러나 중국인은 족쇄도 차지 않을 뿐 아니라 북한권력기관의 비호 밑에 호의호식하고 있다. 탈북자도 조선민족인데 같은 민족끼리 너무나도 북한당국의 처사가 고약하다. 살기 힘들어 가는 동족을 붙잡아 고문하고 잡아죽이는 그런 동족이 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는가?

북한당국이 외치는 "우리민족끼리"는 빈 구호인가, 누구를 위한 민족끼리이며, 결국 인민을 위한 민족끼리가 아니라 권력층의 잔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민족이 해외에 나가 잘살면 민족전체에게 이로운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중국외교부는 탈북자 강제북송이 국제적 비난을 받을 때마다 “조선 비법입경자(朝鲜非法入境者)를 국내법, 국제법 및 인도주의정신에 맞게 처리하는 중국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외망명을 요구해 외교공관에 들어간 탈북자들의 신병을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남한, 미국 등 해외로 내보낸 사건은 강제북송 당한 사람에 비해 볼 때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중국은 국제적으로 이슈화된 탈북자는 제3국이나, 해외로 추방시키고, 그렇지 않은 탈북자는 강제북송 시키고 있다.

미련 버린 고향, 미친 사람이 사는 땅
나도 강제북송 되어 북한에 두 번 끌려나갔던 사람이다. 배가 고파 떠난 조국은 나를 이미 반역자로 낙인 했고, 중국은 나를 범죄자로 경멸했다.

남한 이외에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남한은 우리에게 공민권을 주었고 동포애의 정으로 이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재원적 지원도 해주었다. 동심의 심리로 봐도 나를 범죄자로 보는 그 땅에 다시는 되돌아 가고 싶지 않았다.

처음 내가 북한을 떠날 때 한 가닥의 양심만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번 잡혀갔다가 2차 탈북부터는 모든 정과 미련을 다 버렸다. 북한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미친 사람이 사는 사회였다.

내 고향은 함경북도 00군이다. 90년대 중반 식량난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마을 여성들 중 10분에 1 이상이 살기 위해 중국에 왔다. 그들도 머리가 깬 사람들이다. 96년도 만해도 굶어 죽을 사람은 다 죽었다. 그래도 머리가 깬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혜산으로 나왔고, 나처럼 탈북한 것이다.

두 번씩이나 북송 되어 북한에 나가있는 동안 머릿속에는 항상 푸짐한 쌀밥과 고기반찬이 눈에 얼른거렸고 자유로운 시절이 나를 유혹했다. 애써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북한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지만,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항상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망쳐 중국에 다시 나왔고 천신만고 고생 끝에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자유란 참 귀중한 것 같다. 내가 이렇게 7년간의 중국생활과 제 3국을 돌며 자유를 찾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캄캄한 자유의 불모지에서 기약 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니 이만한 용단을 가지고 모험도 주저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장백현 지구의 한 작은 마을에는 아직도 내가 다니던 조선족 교회와 그 교회의 집사님이 살아 있다.

1차 탈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함경북도 00군 철도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나는 96년 해고되었다. 약품이 모자라 이름만 남은 병원에는 전기조차 주지 않아 수술도 못했다. 병원 의사들도 직장을 그만두고 장마당에 나가 국수장사와 약품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병원에 당직을 설 때면 촛불을 켜놓고 추위에 떨곤 했다.

생각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고 혜산에 올라가 우리 고장까지 약품 나르는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약품을 외상으로 넘겨주겠다는 중국사람의 말을 듣고 혜산에 올라왔다. 중국사람은 약품장사를 안전부에서 단속을 하니 밤에 가야 한다며 우리를 데리고 자그마한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널 때까지 나와 함께 갔던 동료 3명은 그 강이 압록강인줄 몰랐다. 다음 순간 그들이 강 건너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야 알아듣기 어려운 중국말이라는 것과 우리가 중국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중국 국경의 작은 마을에까지 조선밀정(조교)들이 거주하고 있어 고발당하면 잡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중국인은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약을 가지고 올 것이니, 하룻밤을 여기서 쉬고 다음날 밤에 조선에 넘어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중국에 와서 쌀밥에 고기를 먹고 나니, 오매불망 그리던 중국에 대한 환상이 그대로 만족을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동료들에게 “이왕 중국에 온 바에는 좀 더 들어가서 돈을 좀 벌고 나가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장백에서 연길, 길림까지 엄청나게 멀다. 우리같이 신분도 없는 사람들이 버스나 자동차를 탈 수 없고 곧장 산발을 타야 했다.

그날 저녁으로 나는 친구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겨울에 장백산 기온은 영하 수십도에 달한다. 우리는 밤에 야생동물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잡초 밑에 몸을 숨겼고, 눈을 덮고 잤다. 우리들 중 두 명의 동사자가 생겨났고, 다른 한 명은 손과 발이 얼어 불구자가 되었다. 나도 얼어드는 손을 호호 불며 추위를 이겨냈다. 그러나 아직도 손등에는 그때 입은 동상흉터가 남아 있다.

나와 요행 살아남은 다른 한 친구는 장백산으로 통한 오솔길을 중국내륙 쪽으로 들어왔다. 장백산에는 하루 종일 걸어도 인가하나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우리를 구원해준 것은 창바이산 지구 산림보호원들이었다. 배가 고파 몸도 지탱하기 어려운 여성들을 산림보호원들이 식량을 내놓아 목숨을 구해주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고 며칠 만에야 그들은 작은 마을을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국경까지는 직선거리로 수십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로를 따라오면서 큰 산들이 가로막혀 근 300km를 돌고 돌아 왔던 것이다.

그곳은 장백산지구에서 유일하게 석탄을 생산하는 곳이다. 옹기종기 크고 작은 탄광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고, 탄광 주위에는 작은 마을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국각지에서 온 광부들과 토착민들은 혼합되어 살고 있었다. 나와 동상 입은 친구는 탄광마을에 머물기로 하고, 직장을 얻어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그 중 내가 먼저 중국인에게 시집가서 마을에 정착해 살았다.

내가 살았던 중국동북지방인 장백현 부근에는 불법 월경한 북한 여성들이 많이 숨어살고 있다. 생활이 가난해 조국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다. 마을에서는 우리를 가리켜 ‘차오센꾸냥(朝鮮姑娘: 조선처녀)’라고 부른다.

2차 탈출, 인민폐 10원에 북한사병을 매수하다

첫 번째 남편은 광부였다. 중매는 마을에 있는 조선족 교회의 나이 많은 어머니가 섰다. 그 어머니는 “이 자매의 운명이 기구하다. 우리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자”며 마을 사람들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몇 년 전부터 조선 여자들이 많이 넘어와 밥을 빌어 먹었다. 우리도 형편이 좋지 않아 많이 도와줄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경비를 보내주고 마른 음식을 쥐어주며 더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한편 어떤 때에는 시집을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첫 번째 광부는 도박꾼이었다. 깨어나면 제일 먼저 도박꾼을 하는 것이었다. 집안의 생활은 남편이 도박에 빠져 있어 대단히 가난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생활한지 1년 만에 나는 이 남편을 떠났다. 그 후 그는 한 임산마을로 옮겨갔고, 같이 온 동상 입은 자매는 줄곧 그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1999년 봄, 나는 그 광부를 떠나기 전에 조금 건사한 돈으로 조선반찬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임산마을에는 조선족들이 많았다. 장사는 조선족들의 관심 속에 그럭저럭 이어갔고, 생활을 유지하고도 돈을 좀 모았다. 돈을 모아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 부쳐주기로 작정했다. 북한에는 공장에서 차를 모는 내 남편이 있었고, 9살짜리 아들애도 있었다. 집을 떠난 후 그는 다시 아이를 보지 못했다. 아이에 대한 소식은 다만 두 번째 북송 되었을 때 아는 사람을 통해 대충 알 수 있었다.

조선 반찬을 파는 장사는 나에게 안정된 생활을 길게 제공하지 않았다. 1년 후 그 광부는 내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장사해서 돈도 모았다는 것을 알고 도박 놀 돈을 요구했다. 나는 그 광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돈을 얻지 못한 광부는 창바이산 지구 변방무장대에 나를 고발했다.

중국 변방대는 재빨리 나를 체포했고, 먼저 지린성 변경도시에 구류시켰다. 그곳에는 전문 조선 사람을 가두는 간수소가 있다. 며칠 후 나는 북한에 강제 송환되었다. 간수소를 떠나기 전에 그는 인민폐 10원짜리 5장을 돌돌 말아 비닐조각에 싸서 삼켰다. 이렇게 해야 인민폐를 무사히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북한 감옥에 갇혀있는 3일 동안 안전부에서는 나의 신분을 대조하고, 나의 고향과 일하던 병원의 간부들에게 통보하였다. 심문하는 사람들은 나를 매일 한번씩 취조하였다. 매번 같은 질문을 던졌고, 매번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물었다. 심문자는 나에게 북한의 법률대로 하면 첫 번째 탈출자는 노동개조 1년, 두 번째는 3년, 세 번째는 5년에 처한다고 이야기 했다.

심문자의 입을 통해 나는 남편이 러시아에 물자를 싣고 가다가 한차례의 차 사고로 사망했고, 아이는 할머니가 데리고 생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문 당한지 며칠 지나 나는 같이 잡혀 나온 사람들과 함께 큰 차에 압송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에 달아났다는 죄로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 북부의 한 노동개조 농장에 끌려가게 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삼킨 돈 50원을 이미 감옥에서 변을 볼 때 꺼내 건사했다. 그 중 한 장을 꺼내 옆에 총을 들고 지키는 안전원 계호에게 주었다.

나는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앞으로 가면 집이 있는 쪽이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그는 압송하던 차를 멀리 보내고 다시 몸을 돌려 압록강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흑룡강 양계장에 일하러 가다

1999년 초 나는 재차 국경을 넘어 중국에 들어왔다. 첫 번째 중국을 넘은 경험이 있어 두 번째는 아주 순조롭게 되었다. 나는 중국조선족이 많이 모여 사는 지린성 연변자치주의 한 국경마을로 들어갔다. 여기서 철로를 따라 줄곧 서쪽으로 가면 사람들이 조밀한 지방으로 갈 수 있었다. 사람이 적은 마을로 가면 밥을 빌어먹기도 아주 어려웠다.

중국에서 2년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나는 중국동북의 생활습관과 언어를 비교적 익숙했다. 이미 한족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서쪽에 들어갈 때도 나를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 오자마자 눈썹을 그렸다. 눈썹을 찍고 귀고리를 다는 것은 중국여성들의 일종의 애호이다. 주의 사람들의 권고로 나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눈썹을 찍었다.

나는 다시 임산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안전이 가장 큰 문제였다. 처음에 보살펴주었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하얼빈에 있는 양계장에서 일하도록 노반을 소개해주었다.

연변에서 헤이룽장(黑龍江)성 소재지인 하얼빈까지 나는 줄곧 밥을 빌어먹으며 들어갔다. 양계장 노반(老板: 사장)은 과연 좋은 사람이었다. 노반은 나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매월 인민폐 500원(한화 6만 5천원)씩 주었다. 노반은 내가 중국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만난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하얼빈 양계장에서 2001년까지 일했다. 배고픈 걱정은 없어졌는데, 아이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중국인들의 방조로 지린성 호구(戶口: 호적)와 합법적인 신분증을 얻게 되었다. 그는 공개장소에서 여전히 자기의 옛 신분을 폭로하지 않았다.

내가 중국신분증을 얻은 지 1개월이 되던 날, 양계장화물을 나르던 한 운전사가 그를 헤룽장성 변방부대에 고발했다. 그는 재차 북한에 북송 되었다. 이번에도 그는 인민폐 250원을 비닐로 싸서 집어 삼켰다.

호적을 말소, 남편과 아들애는 친족권 포기돼

북한 재판소에서는 징역 3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내가 살던 도시의 호구를 말소 시켰다고 알려주었다.

증산교화소에 끌려간 내가 하는 일은 돌을 까는 일을 했다. 교화소 범인들은 대부분 나처럼 탈북자들이었고, 어떤 사람은 살기 힘들어 죄를 범한 경제범들이었다. 나는 매일 힘든 일을 했지만, 먹은 음식은 옥수수 빵과 멀건 소금국 한 사발이었다.

매일 심각한 굶주림으로 사람이 죽어나갔고, 일부 죄수들은 경찰들에게 맞아 죽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일하던 장소에 큰 구덩이를 파고 죽은 사람들을 묻었다. 그러면 다음날 또다시 사람들이 죽어나기 시작했다. 교화소에는 사람을 전문 파묻는 작업대가 조직될 지경이었다.

내가 감옥에 끌려간 후 가족들은 밖에서 나를 꺼내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젊어서 법관출신이어서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형기를 마치고 나가는 고향친구에게 인민폐 250원을 쥐어주며 부친이 이 돈으로 뇌물을 준비해 나를 구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2002년 10월 나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나는 부모 곁에 돌아온 후 안전부에 가서 다른 지방으로 않을 것과 남편과 아이의 집에도 가지 않을 것을 서약했다. 안전부에서는 아이와 남편은 이미 그와 친속관계를 포기했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나는 호구도 없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정부에서 주는 배급도 없었다.
아버지 '난 널 먹여 살릴 수 없다'

아버지는 72세였다. 법원에서 퇴직한지 오래되어 정부에서 받는 보조금으로 한 가족을 부양하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애야, 난 너를 먹여 살릴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민족반역자의 딸을 둔 아버지라는 비난도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직업을 얻을 수 없는 나를 늙으신 부모님이 먹여 살린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내가 아버지에게 얹혀사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원래 다니던 병원의 간부를 찾아가 복직을 애원했지만, 병원에서는 중국에 도주했다 북송 된 사람을 받을 수 없다고 잘랐다. 안전부에서도 내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기 때문에 어디에 가지 말고 집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담당 안전원은 내가 집을 떠나지 않았는가 수시로 조사를 나왔다.

그가 우리 집에 얼씬거리며 왔다 갈 때는 가슴이 조마조마 함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집 떠날 기미가 보이면 다시 감옥으로 데려갈 판이었다. 도저히 부모님에게 미안해서 같이 있을 수도 없었다. 감옥에 갔다 온 내가 다시 좋은 남편을 얻어 살수도 없는 처지였다.

집에서 부모님께 효도를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 없어진 것으로 치고 중국으로 훌쩍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같이 있어야 딸 구실도 못하는 바에는 돈을 벌어 부모님의 노후를 위해 돈을 드리고 싶었다. 부모님들이 농사를 지어 벌어놓은 곡물이 줄어들수록 어머니는 한숨만 짓는다. 입을 하나라도 더 덜어야 새 풀이 돋아나는 봄까지 버틸 수 있었다.

중국에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나는 여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틈틈이 내가 쓰던 물건을 정리하고, 팔아 돈 될만한 것은 다 팔았다. 이것 저것 정리해 팔고, 아껴 먹으니 내 손에 2천원이 쥐어졌다.

2003년 2월 압록강이 채 풀리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또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집에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한번 더 모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고향에서 혜산까지 가자면 가장 빠른 방법은 기차를 타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증명서가 없어 기차표를 살 수 없었다.

나는 철도병원에서 일할 때 알고 지내던 기관차대의 기관사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북한 돈 1000원을 쥐어주며 혜산까지 좀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내가 중국에 갔다 잡혀 나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기 망정이지 그는 내가 중국에 가려는 것을 알았다면 데려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2월 20일 나는 그 기관사를 만나 견인기를 타고 국경지역인 혜산에 도착하게 되었다.

3차 탈출, 인민군을 300원에 녹이다

막상 국경에 도착했지만, 경비가 너무 심해 도강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혜산시에 머무르면서 매일같이 거리를 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루는 혜산시장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휴대한 중국상인 세 명이 시장에 나타났다. 나는 그들의 앞을 막고 중국말로 “할빈에 전화 한 통화만 좀 하자. 친척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유창한 중국말 솜씨에 그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핸드폰을 뽑아 건넸다.

나는 북송될 때 할빈 양계장 노반의 전화번호를 암기하고 있었다. 전화버튼을 누르자 그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 나왔고, 나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노반, 나 감옥에서 풀려났어요. 지금 혜산에 나와 있는데, 중국에 가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한다.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노반은 “알았다. 내 급히 나갈 테니, 좀 기다려라. 네가 있는 위치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과연 2일째 되는 날, 그는 수속을 마치고 혜산에 건너왔다. 노반은 혜산 국경경비대 군관에게 인민폐 200원을 뇌물로 주고 초소를 지키는 병사에게도 100원을 주었다. 이렇게 북한경비대의 허가를 받아 나는 3번째로 중국에 오게 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 조선족교회를 찾아갔다. 집사님은 나를 보자 기뻐하며 “내 생각에는 네가 가장 안전한 방법은 맞는 짝을 찾는 것이다”고 말했다. 2003년 4월 나는 두 번째 중국남편을 만났다. 그 역시 광부였다. 내가 이번 남편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얄궂은 운명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편은 늘 술에 취해있었다. 그리고 나보고 조선에서 도망쳐왔다고 욕하곤 했다. 그를 떠나고 싶었지만, 내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남아 있어야 했다.

자유를 찾아 남한 행을 택하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2005년 겨울이었다. 교회집사님이 한국의 선교사 한 분을 앞세우고 나를 찾아왔다. 중국에서 국적도 없이 불쌍하게 살아가는 내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집사님은 “한국에 나가면 국적도 준다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귀가 번쩍 띄었다.

북한 감옥에서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국적도 없이 압록강을 건너온 후 나는 중국에서도 국적 없이 숨어살았다. 중국에서 먹고 사는 걱정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권리가 더 중요했다. 나는 집사님과 선교사님의 손을 잡고 “제발 날 한국에 데려 가달라”고 말했다. 선교사님은 연길 모 장소로 나를 인도했고, 한국행을 준비하는 탈북자들과 함께 제 3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제3국에서 몇 개월을 기다리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중층한 구름을 뚫고 비행기는 기수를 올려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밑에 깔린 구름을 보노라니 눈물이 고였다. 마치 비행기가 최 바닥을 치고 고공을 날아오르는 나의 인생을 재현하는 것 같았다. 지난 7년간의 세월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천천히 북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세상을 다 안은 듯한 기쁨과 부모님께 미안함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저 멀리 계시는 부모님 생각이 났고, 남편과 아이 생각도 났다.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도 도와드리고, 아이도 데려오고 싶었다. 뉴스를 보니 한국적응이 어렵다는 사람들이 다시 미국으로 간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자유와 권리만 찾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 남들처럼 꼭 같은 권리를 가졌는데, 중국에서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떠나온 중국동북지방에는 지금도 탈북여성들이 광범하게 분포되어 살고 있다. 정부의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여성들이 북송되면 그들이 남겨놓은 중국의 아이들 역시 또 하나의 큰 문제로 남게 된다.

나는 내가 겪었던 뼈아픈 과거를 또 겪고 있는 탈북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중국당국에 난민지위 인정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한명옥(가명)/ 2006년 입국

http://pscor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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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이 바닥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수 많은 탈북자들이 증언하고 있고 관련 선교사들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열당에 북송되는 탈북자들 관련하여 딱 한번 글을 올린 적 있다. 약 3년 정도 전의 올린 글에서 "선비도 3일 굶으면 남의 담장을 넘는다"는 말이 있다. 탈북을 결심한 인민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배고파 죽으나 가다 잡혀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냥 주저 앉자 있으면 그대로 죽는 것이고 그나마 압록강을 넘다 다행이도 잡히지 않으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강을 건넌다. 엄동설한 살인적 깡 추위에 얼음 강을 건너다 눈바람에 치어 얼어 죽으며 어떤 이는 넘어져 그대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 수라한다. 사선을 넘은 탈출자들이 다행이 강을 건넜다 하더라도 공안 당국에 걸릴까 두렵고 살을 찢는 추위에 견디지 못해 그로인한 사망자가 또 발생한다. 그런 사람들 중 어쩌다 그나마 숨을 곳을 찾은 사람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사 직전의 사람들을 붙잡아다 다시 북송 해버리면 그 사람들은 이리저리 시달리다 금수보다 못한 행색으로 처참하게 죽는다. 하긴 어차피 죽은 목숨들이라 하지만 말이다... 중국 당국은 배고파 살길 찾아 나선 사람들 붙잡지 말고 북으로 돌려보내지 말라" 대충 이러한 내용인 것 같다.

최근의 평양측이 더욱 부쩍 남한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특정 정당을 음해하는 내정 간섭적인 사례가 늘어나는 어설픈 모양을 볼 수 있다. 사실을 따지자면 박치기 당신들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다.

-너나 잘해!-

2018-05-11 14:24:56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4   dakshang [ 2018-05-11 20:47:05 ] 

본 글을 적은 한명옥이라는 사람은 그 쪽에서 고등교육정도는 받은 사람임에도 북측에서 말하는 '우리민족'이라는 뜻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참담한 북쪽의 인권에 대해 국제 사회가 특별히 위원회들을 조직하여 꾸준히 압력을 가하고 있었으나 별 효과 없었든 참이라 이번 비핵 과정에서 이 문제들을 좀 더 심도 있게 부각했어야 했다는 지적 나오고 있는 실정이건만 그럼에도 작금의 문정권은 뭔가 하나 똑 부러지는 효과 없이 그저 마시고, 먹고, 사진 찍어 치적 자랑 자료 만들기에 분주한 것 같슴다. 상황은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으나 남조선 냄비근성 에미나이들은 머가 그리 좋다고 아우성인지 말입니다....

3   zenilvana [ 2018-05-11 17:21:59 ] 

내겐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어제 날자로 you tube 탈탈탈의 134회를 빠뜨리지 않고 읽어 왔다.
눈물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없는 일화들이다.
문재인은 중국정부를 압박해서 탈북자를 송환하지 말라!
니도 인간이라면......

2   dakshang [ 2018-05-11 15:01:04 ] 

작금의 문정부 문제 많습니다. 아니 내것 다 갔다 퍼주자면 MB도 할수있고 GH도 할수있고 그 누구라 하지 못할 자 어디있습니까? 여기 지나가다님이 올린 글에서 남한에서는 고개 빳빳들고 북경에 가서는 허리가 꺽어 지도록 인사하는 장면. 그야말고 배신감 드는 것이고 이게지난 12월 인가 언제 문 정부가 북경에 갔을때 동행한 기자가 문 통 바로 뒤에서 죽 사발이 된적 있엇지요. 그리고도 말한마디 대꾸 조차 못하는 문정부임다. 난 왠지 선조의 굴욕이 생각납디다.

1   yu41pak [ 2018-05-11 14:49:55 ] 

긴 글 가지고 옮기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자세히 두 번을 읽고 나니 가슴이 웬지 찡해지고 코 끝이..
그래요, "누구를 위한 [우리들]" 일까요.
맞습니다. 네나 잘 하세요.

이 밑에 글에 보고 Google에서 확인을 하니
작년 "탈북 식당 종업원"을 이제와서 다시 조사를 해서
돌려보내니 어쩌니 하는 말이 있던데 이렇게 된다면
문재인 정부는 3대를 벌을 받는 엄한 뭣이 따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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