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한국일보

오피니언
Los Angeles
커뮤니티
 
열린 마당
제목 '70년 한국의 한 촌넘이 세계무대로
작성자 zenilvana

좀 전에 JTBC 5월 12일자 방영을 보았다. 미-북정상회담이 싱가폴에서 6월 12일에 치루어질 것으로 약정되었으나, 어느 호텔이 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군.

오늘 아침에 "金씨 3대왕조가 저지른 비극적 종말"이란 글을 올렸었는데, 미국무장관이 완전히 핵을 폐기하면 미국이 북한 경제를 남한에게 한 것같이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그 방송에서 말하고 있더라.

1970년 봄에 10대 종합무역상사가 100억불 수출을 목표로 해외에 지사를 개설하라는 임무를 내가 띠우고 김포공항을 떠나서 싱가폴을 거처 드디어 Sydney, Australia로 날아갔던 적이 있다. 옛 추억이 새삼 되살아나서 그 때에 격었던 일을 상기하고 다음과 같은 회고의 감회를 피력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잘난 척 한다'느니, 뭐 어쩌구...... 아니꼬와 하는 인간들도 꽤 있더라 마는 그건 그 댁들 사정이고 나는 내 할 말을 해야하겄지, 그런 거가 아니겄오? 케싸문서......
-----------------------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며 국민소득을 높이는 길로써 해외수출을 경제발전 5개년계획의 핵심으로 삼았었다. 일본과 국교정상화의 댓가로 36년 간의 수탈보상금으로 몇 억불을 이미 받아서 경부고속도로 부터 완공했고 신진기업들을 격려하여 국제무대로 진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런 국가정책을 목적으로 해외지사를 세우는 일은 한국 무역역사상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경이 현대, 삼성, 대우, 금성 등등의 10대 종합무역상사중의 하나로 지명을 받았다. 회사 내에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고 수출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결국 호주지점을 개설하라는 명령이 나에게 떨어졌다. 가족이 없이 혼자 가야한다는 조건을 수락하고, 나는 내 생전 처음으로 국외로 여행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친세라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길로 나섰다.

여권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무역협회에 가서 정부의 해외지사 개발금으로 약간의 보조금을 받아 쥐었고, 회사 내에서는 해외지사를 가져본 적이 없어던지라 그 운영의 내규를 총무부 부장과 상의하여 그 첫 초안을 작성하며 출국할 준비를 서둘렀다. 내 가족에게는 내가 받던 월급을 지불하게 했고, 현지에서의 내 생활비로 $500불과 별도의 지사 운영비를 따로 계상해서 매달 송금해 주기로 내정하였다.

공항에는 우리 부모님과 집사람과 첫딸 그리고 여동생 식구들... 사촌형님들과 사촌누이들이 나를 전송하고자 그 곳에 나와 있었다. 나는 이미 여러번 말렸다. 그들 말이 "네 덕택에 김포공항을 구경한다는데 굳이 말리지 말라"는 것이다. 처음 나가는 출국수속에 경황이 없는 중에도, 이들을 대접하고 배가 막삭이된 여편네를 붙잡고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한국을 떠났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때는 무슨 특권층이나 하는 짓거리로 보이던 시절이었다.

해외지사가 거론될 때에 무슨 이유인지 나를 아끼던 독고 선이란 상무가 물러나고, 김응초란 분이 새로 부임해서 나를 인솔했다. 내가 탄 비행기가 힘겹게 떠오르면서 구름 위로 일본을 향하여 날아갔다. 창밖에 기묘하게 전개되는 구름모양에 넋을 잃고 살펴보던 나는 갑자기 안주머니에 넣어둔 상용여권을 상기했다. 출국수속의 경황 없었던 기억을 멀리하고 주위가 비로소단조로와 짐을 느끼게 순항의 속력으로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내 여권을 꺼내들었다. 내 나이 30살에 처음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복수의 상용 여권번호 MB11747 이라... 그때 '보잉'의 747 비행기가 새로 취항하던 때라 이 번호는 기억하기가 쉬웠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자는 듯이, 내 인생에 희망찬 새 출발이란 '11'이 앞에 써있었다. 나는 앞으로 화려하게 전개될 미래를 연상하며 가슴을 부풀리다가 일본의 '오사카' 공항에 내렸다.

그때 일본, ‘오사카’에서는 국제무역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곳 공항에서 한동안 기다리다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1등석에 다시 앉게 되었다. 우리가 1등석의 표를 산것이 아닌데도, 박람회 때문에 일반석에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서양사람의 옆에 앉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네델란드"의 어느 회사의 회장이라며 자기를 소개했다. 서양사람에, 더구나 높은 분을 곁눈질로 일거수 일투족을 자주 샆피던 중에 점심식사 시간이 됐던 모양이다.

서양여자 승무원이 상냥한 미소를 내게 보내오면서 무었을 먹을 건가를 물어왔다. 내 옆의 회장이 마침 뭔가를 시켜서 '치즈'라는 초록색의 겉껍질을 칼로 짤라내면서 빨간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어줍은 시늉을 하면서 같은 것을 달라고 여승무원에게 주문했다. 그 녀는 처음 보는 초록색의 눈을 가진 '스튀어디스'였다. 서양의 젊은 여성들이란 이같은 미소를 한껏 먹음은 그런 사람들인가? 한국에서 성난 얼굴에 무표정 하던 한국여자들과는 천지의 차를 느끼게하는 그런 인상이 기분좋게 비추어 왔다.

이럭저럭 무료한 두어시간 후에 비행기가 홍콩에 도착하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불안하던 여행이었던 차에 홍콩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창가에 앉은 회장을 넘겨서 앉았다 일어섰다 들썩들썩거리며 창밖에 온 신경을 곧두세웠다. 비행기가 높은 삘딩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피해서 서서히 활주로에 내렸다. 드디어 멈추어 서자 후덥지근한 습기가 갑자기 기내로 몰려 들었다. 마치 목욕탕에 들어선듯 후끈한 더운 기운이 몸을 감싸왔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2층 뻐쓰와 중국사람들의 물결을 헤쳐 가면서, 대륙 쪽인 "쿠어룽"의 어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같은 촌뜨기가 겁낼 겨를이 없이 김상무가 이 모든 입국절차를 앞서가며 해결해 주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실은 그런 목적에서 나를 따라 나왔지만서도...

호텔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나를 내팽겨치고 어디론가 살아졌다. 저녁 나절에나 돌아왔다가, 나를 이끌고 다시 호텔 밖으로 나섰다. 택시로 어디론가 달려갔다. 어느 아파트를 찾아서 노크했더니 그 주인인 듯한 인도사람이 비좁은 방으로 우리를 맞아 들였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반가워 하며 나를 소개했고, 좁은 방안을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두-세평이 될까 말까 하는 공간은 온갓 잡동산이가 그득했다.

김상무가 대짜고짜로 "조니 워커"가 있는 가를 물었다. 마시다 남은 반 병짜리도 괜찮냐고 되물으면서 우리들 앞에 그것을 내어 놓았다. 문론 안주라는 것은 없었다. 주인이 술잔 둘을 내어놓자 김상무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도 같이 하자고 했으나 그가 사양했다. 우리 둘이 몇 잔을 마시다 보니 금세 바닥이 났다.

술기운이 돌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주인을 쳐다보자, 그가 따지 않은 새 병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자기네들 끼리만 아는 얘기를 주거나 받거니 하다가 취기가 꽤 돌았다는 건지 김상무가 나한테만 술잔을 자꾸 채웠다. 불청객인 내가 극구 사양했지만, 무료하던 남어지 그럭저럭 혼자서 거의 한 병을 다 마셨다. 호텔 방으로 돌아오기 까지 얼큰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했었다. 침대에 누워서 그날 사들인 양담배 한 보루를 뜯어서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잠에 떨어졌다.

다음날 쇼핑을 하고 내 호텔 방을 찾아드니, 호텔 종업원같은 친구가 방 가운데 서서 나를 보자마자 담요 한장을 쳐들어 보였다. 댓짜곳짜로 당신은 누구냐고 내가 물을수 밖에... 그는 대꾸 않고 담요의 한가운 데에 꺼멓게 불탄 자리를 더 높이 처들어 보였다. So...? What is the matter?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라고 내가 영어로 물었다. 내가 태웠다는 말이 나왔다.

놀랠 수 밖에. 연거퍼 "No... No" 를 외치다가 잠들기 전에 내가 담배 한대를 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왔다.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호텔을 ‘첵크 아웉’할 때에 담요 한장 값을 변상하면서 김상무가 내게 내뱉은 역정의 소리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나? 그 때 그 곳에서 불이 크게 나서 황천행 하지 않았던 것만은 아무튼 천만다행이라 해야겠지...

그 전의 어느 저녁은 홍콩의 단골거래 수입상인 왕서방이 우리를 대접한다 해서, 부둣가에 떠있는 큰 보트식당이라는 데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사람은 정말 비단장사 왕서방인데, 한국에 올적 마다 다이아몬드 반지, 다이아 넥타이 핀, 다이아 목거리를 착용했다가는, 그 다음에는 금이나 '루비' 등등의 보석을 '셑트로 맞추어서 온 몸에 장식하고 나타났었던 사람이다. 아무튼 중국인들이 법석이는 그 식당에서 그렇게 맛있는 중국요리를 그 때 처음 먹어 본 적이 없다. 한국사람들은 주로 산동성이나 북경요리가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다만 홍콩의 것은 사뭇 다른 별미라고 할까.

식사 후에 그는 자기의 "멜세데즈 벤츠"에 태워서 어두컴컴하고 외진 어떤 외진 데로 우리들을 몰고 갔다. 덩치 좋은 문지기가 막아섰다가 안으로 들여보내자, 환하게 밝혀진 넓직한 홀이 갑자기 내 눈앞에 펼쳐젔다. 불빛에 익숙해지자 그 영업장소의 이것 저것이 보였다. 중앙의 홀을 끼고 한 단계 높게 둥그런 회랑이 둘러져 있었다. 그 중앙은 환한 조명과 손님들의 어둑한 자리가 대조되어 있었다. 넓직한 한 복판이 손님들을 춤 추게 하자는 모양이었다. 이르다는 건지 고객이 별로 많아 않았다. 우리 일행은 한 곳에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좀 있으려니 한 사나이가 공책 크기의 나무판대기를 우리들에게 돌렸다. 보자하니 그 붉으무레한 나무는 두 조각으로 겹처져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라 내가 유심히 살피는 중에, 왕서방이 그 판을 열어서 중국말로 뭐라고 웨이타'로 보이는 자에게 주문하는 것 같았다. 아하~ 이게 그 메뉴라는 것이구나... 그렇게 짐작하고 그것을 열고 자세히 살폈다. 한문이 위 아래와 좌우로 써있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어느 젊은 아가씨가 내 옆에 와 앉았다. 무슨 일인 가를 새삼 묻기도 뭣해서, 그냥 꼿꼿이 정색하고 앉아 있으려니까 그 처녀가 말도 없이 가버렸다. 잠시 후에 또 누가 와서 앉았다.

나는 그 때서야 겨우 그 메뉴라는 것이 소위 조선시대의 성춘향이 기생 점고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중국은 그때까지도 그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가? 내가 놓칠세라, Do you speak English?라고 두째 여자에게 말을 거니까 이 여자가 무슨 이유인지 아무 대꾸도 없이 또 사라졌다. 세번째로 누가 왔는데, 영어고 뭐고 상관않고 이젠 아주 눌러앉아 버리고 마는 게 아닌가. 삼세번이면 끝장이라는 거다. 이러고 있는데 왕서방은 그의 첫 여자와 숙덕거리다 못해 '춤의 마루'로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김상무도 이처럼 자리를 떳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그 역시 한국사람이 아니던가? 뻔할 뻔자다.

이 아가씨들이 본토에서 팔려왔는지 영어를 전혀 못했다. 나 역시 춤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말도 안 통하고 춤출 줄도 몰랐고, 그 결과를 더 말해서 무었하리... 이런 정도는 할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제무대로 무었인가를 팔러다녀야 할 사람들 만이 하는 짓을 말하는게 아니다. 미국에서 한국동포들 결혼식에 가 보시라. 촌뜨기들이 여기가 미국이라고 서양 판을 벌려놓고는 두리번거린다. 그것도 아주 점잖은 체 버티고 있는 꼴이란... 그런데 입 마저 붙어 버렸지 않은가? 그래도 게거품은 잘 물더만.

'홍콩'을 등지고 '말레이지아'의 수도인 '쿠아라룸풀'에 잠간 내렸다가 비행기가 우리를 '싱가폴'로 모셔갔다. 중국과 로마를 통하던 두 갈래의 길이 옛날에 이곳에 있었다. 하나는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란 육로였고, 또 하나가 말라카 해협을 거치는 바닷길이었다.

인도양으로 들어서서 아라비아 반도의 마호멭의 고향인 ‘메카’를 통과하는 ‘카라반의 남쪽 육로가 있고, 또 다른 길은 紅海(홍해)를 서북쪽으로 더 항해하면, 오늘날의 Jordan의 유일한 항구인 Aqaba에 이른다. 거기서 현재에 관광지로 둔갑한 Petra 사막을 거치면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북쪽 길목에 다다른다. 이렇게 東과 西의 문물이 통과하던 한 무역의 요지가 오늘의 싱가폴란 도시국가이다.

수천년의 무역중심지로 발달된 도시로써 고층건물들과 여기 저기로 뻗어진 길가는 매우 깨끗했다. 그 곳의 High Street라는 포목시장을 둘러 봤다. 상점들이 늘어선 좁은 길의 좌우에는 온갓 색갈의 천들이 아래 위로 걸려서 휘황찬란했다. 마치 ‘천일야화'에 나옴직한 '바그다트'의 미로가 이랬었지 않았을까고 상상하게 하는 그런 장거리였다. 인도사람들의 특이한 향불냄새가 상점들을 하나 둘 지날 적 마다 각각 다르게 바뀌었다. 어떤 것은 'not bad'했는가 하면 다음의 것은 역한 것도 있어서 내 코를 찔렀다. 김우중씨를 비롯하여 무역의 수많은 우리 선배들이 한국의 세계적 진출을 위한 노력으로 이곳을 이미 누볐던 그런 상점가였다. 아랍, 인도, 중국, 일본상인들의 오랜 역사 속에 뒤늦게 섞여들은 나같은 풋내기가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참고로 싱가폴은 76.2%가 중국계 화교이고, 말레이 15% 그리고 인도사람은 7.4%라고 한다. 어째서 중국인들이 이토록 많은가? 그 이유는 Zheng He, 鄭和(정화; 1371–1433)란 명나라 태조의 4번째 아들인 Yongle(永樂帝)의 환관으로 있다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모두 4차례의 항해 (1405-1433년)를 해서 남지나해, 인도양, 아라비아 반도, 페르샤의 홀무쯔, 그리고 아프리카 동쪽까지 탐험했다. 수백척으로 따라 거기에 나섰던 후예가 바로 그들이다.

마지막 여정인 시드니를 향하여 그 곳에서 호주의 "콴타스" 비행기를 탔다. 언제 떠나는가 하고 궁금해 하며 창밖을 내다 보노라니, 어떤 인도인이 사진기로 보이는 것을 한 손에 높이 쳐들고 우리 비행기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아~ 내 캬메라!"... 나는 타랍의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서 그것을 받아 쥐었다. 몇일 전에 홍콩에서 샀었던 내 생애에 처음 만져본 나만의 것이었다.

돌아와 앉자, 김상무가 코웃음을 치면서 못마땅해 했다. 홍콩에서 부터‘본의 아닌 실수’가 거듭되어 왔었던 지라 이번 일을 챙피하게 생각해 오던 차였다. 그런데 또다시...! 나는 부끄러운 현실에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한번은 '싱가폴'을 돌아다니다가, 야외꺄페에서 7UP 이란 사이다를 주문해 마신 적이 있다. 싱가폴 돈을 내놨다. 잔돈을 가져다 주길래 "You keep it" 이라고 말했다. 팁을 주어야 한다고 하니, 그렇게 했던 것이다. 김상무가 "너가 재벌의 아들이냐?"고 비웃었다. 팁으로서는 지나치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벌써 여러 나라에서 환전(돈을 바꾸다)을 해 왔었던 바라, 돈의 가치를 나라들 마다 제데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몇일 전에 또 캬메라를 대합실에 남겨놨던 것이다. 갑자기 바뀌어가는 새 환경에 모든 것이 새로왔고, 두뇌는 이에 맞추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내가 이토록 얼철철 해질 수가 있다는 건가? 더구나 나를 인솔한다는 웃사람은 나를 내버려 주기는 커녕, 일일이 빈정거리고 나무래기를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외국물을 처음 먹어보는 내 입장을 염려한다는 아량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나를 완전히 바보로 몰아넣는 것이 그가 할 일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딴 의도에서 이래야 하는지, 만난지가 얼마 안됐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 집히는 것이 있다. 한국사람들은 거의 다 이런 삶을 산다는 거...

시드니 행의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으려고 그 안쪽을 바라보니, 노랑머리의 서양사람들로 꽉 메어져 있었다. 그들이 우리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까만머리를 한 승객은 우리 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위축돼오는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를 비행했는지 지루하기 시작하던 때에 승무원들이 종이 한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무슨 증명서 같았다. 우리가 방금 적도선을 넘었단다. 옛날 바다와 싸우며 세계를 정복했던 그들다운 발상이었다. 적도를 넘어서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야 인도나 호주에 도착했던 영국민족의 역사적 기념장이었다.

드디어 시드니..., 그 공항에 내리니 여기가 가을에 접어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듯 찬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다. 몇일 전에 봄을 떠났던 내가 아니었던가? 세상의 진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이 말을 내가 새삼 깨닫는 내 인생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가슴이 설레어 왔다.


禪涅槃

2018-05-12 15:45:28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로그인 해주세요!
주간운세
시민권 취득 예상문제
운전면허 예상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