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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한이 작심하고 핵무기를 숨긴다면?
작성자 rainbows79

혁명기의 하루는 평상시의 1년과도 같다는 말이 있다.
2018년의 5월만큼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지난 5월23일 한미정상회담과 그 직후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싱가포르 북미회담 취소발표, 그리고 26일 전격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이르는 ‘운명의 나흘’이었다.

궤도를 잠시 이탈한 듯 보이던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열차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른바 ‘주말 번개 회담’을 계기로 다시 싱가포르를 향한 여정을 재개했다.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인 김영철은 며칠 전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김영철과의 면담을 끝낸 트럼프의 첫 마디는 북미 정상회담을 예정대로 개최한다는 발표였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아직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믿지 않는 분위기가 더 강한 모양이다.
김정은 이전 시대의 북한과 협상에 나섰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특사나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관점에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들의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거나 단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시샘 때문 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의 처지에서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따져 본다고 생각해 보자. 상황을 아주 단순화하면 북한이 CVID를 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 각각에 대해 미국이 그에 상응하는 CVIG(체제보장)를 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의 네 가지 시나리오가 나온다.

먼저 미국이 CVIG를 보장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 북한은 CVID를 하는 것이 이득일까, 하지 않는 것이 이득일까?
애초 북한의 의도는 CVID와 CVIG를 맞바꾸는 것이었으므로 CVID를 하는 것이 이득이다.

혹시 북한이 미국을 속이고 몇 기의 핵무기를 어딘가에 몰래 숨겨둔다면 어떻게 될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1차적인 이유는 미국의 선제 핵공격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의 체제를 완전히 보장하는 상황이라면 숨겨둔 핵무기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다.
더구나 겉으로는 CVID를 이행한 상황이므로 “우리에게 핵무기가 있으니 우리를 핵공격하면 우리도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이른바 상호확증파괴에 의한 공포의 균형도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각되었을 때 미국과 국제사회의 보복에 대한 우려가 더 클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CVIG를 보장하는 경우 북한은 CVID를 이행하는 게 이득이다.

미국이 북한을 기만하고 CVIG를 보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이때는 북한이 CVID를 이행했을 때 미국의 위협에 맞설 수단이 없게 된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을 기만하고 핵무기를 다 폐기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그러니까 북한으로서는 CVID를 했을 경우 미국의 배신에 따른 피해를 걱정해야 하고, 기만적으로 핵무기를 숨겼을 경우 발각에 따른 보복을 걱정해야 한다.

만약 북한이 발각의 우려를 떨쳐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미국의 배신에 따른 체제위협을 상쇄시킬 수 있는 이점이 훨씬 우세하므로 기만적으로 핵무기를 숨기는 것이 이득이다.

갈루치 전 특사가 우려하는 대목도 이 지점이다.
북한이 작심하고 핵무기를 숨긴다면 그걸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발각의 우려만 없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숨기는 것이 무조건 이득인데 왜 CVID를 하겠는가, 이런 이유로 미국 여론은 북미 협상을 대체로 비관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미국은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
어차피 CVID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좇아 북한과는 절대 협상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제재와 압박을 계속 유지하거나, 아니면 쉽지 않더라도 끝까지 CVID를 관철시켜 미 본토에 대한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워싱턴의 기존 외교 프로토콜은 전자를 따르라고 하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허리를 맞대고 있는 우리는 미국과 똑같은 처지가 아니다.
아무리 CVID가 어렵더라도, 설령 북한의 속내가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그 의심까지 계산에 넣고 한반도 비핵화와 냉전종식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북한이 체제보장에 대한 확신을 가져, 발각의 우려를 안고 핵무기를 숨기기보다 완전한 비핵화의 길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비핵화를 향한 북한의 약속과 진정성이 어떤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할 것인가, 북한이 가질 법한 기만의 유혹을 어떻게 얼마나 제거할 것인가 등의 결코 쉽지 않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아마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영철 부위원장과 만난 뒤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지난한 과정의 시작일 뿐이라고 한 것도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우리의 절박함과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이번 게임의 실마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트럼프 본인이 자신의 셈법을 이제 확신한 것 같다는 점이다.
그 확신이 역사적인 12일 회담의 성공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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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유 값이 1원인 나라

일반 휘발유가 L당 1원, 프리미엄급이라고 해도 8원인 나라가 있다.
베네수엘라 이야기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라서 휘발유가 물보다 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정부가 환율을 조작하고 가격을 통제해서 공짜나 다름없이 공급했다.

휘발유가 거저나 다름없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차를 샀다.
경제 수준에 걸맞지 않게 차량이 늘어나고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다.
자동차나 부품, 그리고 이에 필요한 윤활유 수입을 위해 베네수엘라는 막대한 달러를 지출했다.

국영석유회사인 PDVSA는 원가 이하로 휘발유를 팔면서 적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부채투성이가 됐다. 채권자들의 압류로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이런 모순이 쌓여 베네수엘라 경제는 파탄이 났다. 국가부도 상태로 국제금융시장에서 퇴출됐다. 국가채무 등 각종 통계를 믿지 못하게 됐고 아무도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국민 생활은 비참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4월 1만3,864%로 추정했다.

물가가 이틀이면 두 배가 되고, 중남미 국가가 경험한 것 중 역사상 최악의 수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값이 문제가 아니라 식량을 구할 수 없고 병원에는 약품도 바닥났다.
원유 부국의 국민은 콜롬비아 등 인근 국가로 탈출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경제 파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5월 20일 치러진 선거에서 야당에 재갈을 물리고 승리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성공이고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자찬하여 국제적인 비웃음을 사고 있다.

혹자는 베네수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전임자인 차베스 대통령이 19년 전 물꼬를 튼 무상복지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면서 정부 곳간은 텅 비게 됐고국민은 무료에 길들여져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상복지가 베네수엘라 경제 난국의 주범이라는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가들이 무상으로 많은 복지를 제공하고도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는 건실한 경제를 이루고 있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망가진 진짜 원인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생필품 가격을 정부가 통제해서 원가에 못 미치는 싼값으로 공급하는 무리한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발상을 바꿔 가격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되도록 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만 보조금을 지급했더라면 경제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량 구입, 휘발유 소비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달러 낭비를 막을 수 있었다. 재정건전성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어느 나라보다 많은 복지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제공할 수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홍콩의 무상복지정책은 그런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모든 가구에 전기요금을 매달 300홍콩달러씩 6개월간 지원했다.
전기회사는 원래 가격대로 요금을 부과하고 정부 지원 금액을 제외한 차액을 이용자가 납부하는 방식이다.

같은 금액일 경우에도 요금을 인하하기보다 차액만큼을 보조금으로 주라는 경제이론에 충실했다. 재원은 재정수지 흑자를 통해 쌓아둔 정부저축으로 충당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가격체계를 왜곡시키지 않고 재정건전성을 지킴으로써 경제에 미치는 부작용 없이 어려운 시기에 처한 시민들을 도왔다.
베네수엘라의 기름값 복지와 차별화되는 이유다.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적 명제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사회안전망을 확충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구비해가야 할 복지정책은 유상일 수도 있지만 거저라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베네수엘라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유ㆍ무상 여부보다는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 신호를 존중하면서 중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나쁜 놈을 혐오하면
증오와 혐오가 일상이 돼가는 사회, 모든 관계에 증오의 연쇄반응 일어
극단의 지배, 중간균형자 말문 막아
사실 지금 어느 때보다 인권 의식은 높아졌고 절대적 차별도 줄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심리적인 갈등은 더 심각해졌다.
증오와 혐오가 일상이 된 사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남녀 혐오로 시작해보자. 18세기까지도 인간이라는 말이 사람들을 두루두루 지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인간’을 말하면서 언제나 남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었고, 그래서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졌으며 그 정도는 괜찮았고 좋기도 했다.

남녀 평등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그럼 절대적 차별을 계속 줄이면 될까? 그러나 그 차별이 줄어든다고 갈등이 그에 비례하여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큰 차별은 없어지더라도 ‘미세한’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작은 것이 더 큰 증오를 낳는다.

그래서 이젠 남과 여만 갈라지지 않는다.
일단 전투적인 집단이 양쪽에 있다. ‘일베’와 ‘남성연대’를 비롯한 남성주의자가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 열혈 페미니스트가 있다. 처음 ‘메갈리아’는 남성의 ‘여혐’을 미러링하면서 되돌려주는 수준이었다.

남성이 여자를 혐오하니 여자도 남자를 똑같이 혐오하며 비슷하게 폭력적인 말을 남자에 대해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꼭 똑같이 저질스럽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욕설의 미러링은 정당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공격적인 여성들이 생겨났다.

적대감은 처음엔 반사되는 정도였는데, 이젠 그 자체로 공격적이다. 그리고 이들 극단주의자 사이에 남성주의자도 아닌 남성, 열혈 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닌 여성이 있다. 아마 ‘침묵하는 다수 또는 상당수’일 것이다.

증오의 연쇄반응은 현재 거의 모든 관계에 적용된다. 정치도 증오의 경연장이다. 수구꼴통이 진보를 혐오하자, 진보도 수구꼴통에 대해 혐오를 반사했다.

수구꼴통들도 서로 혐오할 뿐 아니라, 진보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문빠’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자, 결국 이들도 혐오를 반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치권력이 원래 그런 것인가? 아니다.
옛날에도 싸움과 전쟁은 있었을 뿐 아니라, 피비린내가 더 났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싸우더라도 서로 ‘대등한 인간’이라고 여겼고, 적을 존중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다.
잘나고 잘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우린 비슷하게 존귀하다’는 묘한 우월성을 공유했고, 그것이 갈등이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싸움은 명예를 지키거나 잃는 선에서 봉합되었다.
서로 명예를 지킨다는 존중심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차별이 없어질수록 증오와 원한이 확산되는 경향이 있으며, 감정싸움이 빈번해진다. 차별과 증오의 역설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이 원한에 쉽게 사로잡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리의 평등을 위한 싸움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나눌 것이 넉넉할 때는 괜찮지만, 작은 불평등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쉽다는 것이다. 성장만 추구해도 문제지만 성장이 멈추어도 갈등이 심해진다.

노동시간이 줄면 모두 좋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소득이 준다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람들이 파편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적 혐오를 반사할 때 생기는 더 큰 문제가 있다. ‘뿔뿔이’ 사회에서는 차분한 논의와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극단적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장악하고, 기우뚱하게나마 균형을 잡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한 예로, 여혐과 남혐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들은 말을 해도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극단적 진영논리에 대한 적대감에 물들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까?

서양철학사와 대판 싸웠던 니체는 말했다.
악마를 증오하며 싸우면, 악마를 닮는다고. 나도 어떤 ‘안티’ 운동을 할 때는, 나쁜 놈을 좀 닮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쁜 놈을 너무 닮으면, 무슨 소용인가?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한국일보>

2018-06-05 03: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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