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극우 보수의 우상이 된 김동길의 과거는...
이승만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맹렬하게 비판하고 한때는 민주투사의 대명사로서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그가 현실정치 참여후로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극도로 찬양하는 자로 빠뀝니다.
한때 젊은이들의 우상으로서 추앙받던 일은 까맣게 잊은듯하고 실망감을 금할 길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남에게 잊혀져 가는 것은 노인들에게는 공포와 같은가 봅니다.
나는 늙더라도 곱게 추하지 않게 그런 노인으로서 살다가 가야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분들은 모두가 다 기억하실 겁니다.
그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투쟁해왔던 것을 … 그리고 오늘은 극우 보수 세력의 대변인 노릇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검색해봤습니다.
그는 이후 연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승진한다. 연세대 교수로 재임하며 사회 풍자를 하는 식으로 부패를 비판하였다가 조사를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2년에는 연세대 교무처 처장을 지냈다.
유신 시대에는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수필을 발표, 대통령이 된다면 부모도 섬기지도 않던 놈들이 청와대에 가서 아부하며 각하 각하 하는 것들을 차라리 모두 잡아다가 서해의 무인도에 보내 아첨도라 하겠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 고문을 받기도 했다.
출감 후 소학교 접장하던 사람도 18년째 대통령을 하는데 대학 교수가 대통령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어찌 죄냐며 항변하였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혐의는 제자인 김영준·김학민 두 학생에게 "긴급조치 1호로써 박정희 씨는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다."라고 말하여 긴급조치를 비방하고,
"학생 시위를 치밀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여 박 정권을 타도하라."고 격려하여,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변호사 한승헌을 선임했으나 최종 심문에서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지학순(池學淳) 가톨릭주교, 박형규(朴炯圭) 목사, 김찬국(金燦國) 박사 등과 함께 배후지원 혐의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윤보선을 제외하고는 전부 구속되었으며 일본인 관련자 2명 등은 20년의 중형에 처해졌으나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모두 석방되었다.
법원은 김동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였다.
김동길 교수는 1심 선고 당일에 항소를 포기하며
"법이 법 같아야지..."라는 언급을 하였다.
1975년 3월 1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동길·김찬국 교수의 석방을 환영하는 모임이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1975년 9월에는 양일동, 백기완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그 뒤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소위 ‘정치 교수’로 불리며 학원 자유화 관련 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신랄한 정치·사회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비평을 할 때마다 외치던 ‘이게 뭡니까?’라는 말은 개그맨 최병서 등에 의해 패러디가 되면서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연세대학교 교무처장, 부총장을 역임하고 조선일보사 논설고문으로도 언론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7년 학생운동권이 동료와 후배들의 분신 자살을 강조하며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자 그는 학생운동가들이 동료들을 이용한다며 비판하였다.
또한 민족 해방 계열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가들을 비판, 이후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언론과 방송에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 활동을 하기도 했다.
정치 참여와 시련
정치 활동과 동시에 방송, 언론 활동을 하였고 보수 성향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94년 신민당 총재 자리를 놓고 벌어진 각목 전당대회 파동과 이어진 각서 파동을 계기로 정치 인생에 최대 위기를 겪었다.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에 위촉되지만 자민련 전국구 공천헌금설으로 인해 박찬종, 김종필과 잇달아 갈라지며 그 해 1994년 5월, 차기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급기야 2년 후 1996년 3월에는 자유민주연합 탈당을 선언한다.
1990년대 후반 국민행동본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의 보수주의 단체에서 반공 시민단체 원로로 활동하면서 반 김대중 활동과 강연에 활발하게 참여하였으며 김정일의 북한 정권과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 김대중과 노무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 등을 비판하는 강연과 활동을 하였다.
2001년 2월 10일 서울YMCA 신관 대강당에서 조만식을 추모하는 고당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고당기념회 창립 25주년 기념 대강연회에 참석하였고, 인도 지도자 간디와 한국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민족 운동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 전후
2009년 4월 검찰 수사에서 뇌물 수수설을 부인하는 노무현을 비판,
대국민 사과 차원에서 자살하거나 재판받고 복역하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씨가 남의 돈을 한 푼도 먹지 않았다고 끝까지 우기기는 어렵게 되어 가는 듯하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의 과오를 시인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는 자가 그토록 비겁하게 굴어서야 되겠느냐'며 노무현의 부도덕성을 질타,
인류의 역사의 어느 때에나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인데 진실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 못하게 마련이며 그런 자가 공직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많은 백성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씨는 정말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
이어 '그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차라리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다'는 것이라며 노무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5월 노무현이 경남 김해 사저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자, 그의 노무현 비판 발언 관련이 결국 문제가 되었다.
친노 성향의 네티즌은 그의 비판을 막말이라 하며 역비판을 하였다. 6월초 김동길은 노무현의 국민장에 대해 차라리 가족장을 권했어야 했다며 국민장을 한 이명박 정부를 질타하였다.
방송 3사가 노무현을 순교자로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7월 조갑제와 함께 대구에서 공동강연회를 열었는데 2천명의 인파가 몰렸다.
2000년대 후반 이후
2009년 8월 당시 김영삼이 김대중을 찾아가 화해를 하자 그는 "이번에 벌어졌다는 '화해'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며 김영삼을 비난하였고 이에 연이어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김대중 씨를 찾아가서 그가 죽기 전에 사과할 일이 과연 있느냐"며 김영삼을 비판하였다.
이어 사과를 하기 전에는, 사과를 받기 전에는 '화해'가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거듭 반문한 뒤, "나라의 큰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면 도대체 국민은 무슨 꼴이 되냐"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논란 그렇게 되면 노무현은 정말 설 자리가 없다. 그에게는 “나는 간다. 맘대로들 해라”는 내용의 遺書(유서)나 한 장 남기고 장자연처럼 목을 매거나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배를 가를 용기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관해 김동길 측에서는 오해라 주장하였고 차라리 당당하게 하라는 의미였다면서 하루 이틀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사안 또한 크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으며 해당 관련 논란에 관한 것도 김동길은 주장한즉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5월 25일 다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요약한 것임).
“이전 고종 황제나 박정희 장군이 붕어하셨거나 피살되었을 때도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매체들이 왜 이렇게도 야단법석인가. 내가 전에 쓴 글을 갖고 노사모들이 나를 노 씨 자살의 방조자처럼 만들고 싶어한다.
주변인들이 테러 당할 위험이 있으니 외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테러 맞아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며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하지 않겠다.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감정과 동정뿐인가.
노무현 씨는 검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뿐이다.
<위키피디아> ”
진실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 못하게 마련이며 라는 당신의 말을 스스로 새겨봄이 어떠할런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