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들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장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편한 것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하면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안뜰에 죽으면 죽겠다는 각오로 나아갔습니다(스4:11~17). 미가야는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뺨을 맞았고(왕상22:24),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갇혔습니다(렘37:17).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우상에게 절하지 않아서 풀무불에 던져 졌으며, 다니엘은 왕이 다른 신에게 구하지 말라는 금령을 듣고도 자기 집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단6:10). 히브리서 11장 35~38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말리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제지를 당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했고,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했습니다.
진정한 사명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른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출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작성자 bartholom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