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Los Angeles
열린 마당
제목 박정희와 싸우며 ‘행복했던’ 사람들 - (3) 김 종철과 기타
작성자 justin

박정희와 싸우며 ‘행복했던’ 사람들 - (3) 김 종철과 기타


김종철 언론인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여,1967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으나
1975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주동자라는 이유로
강제 해직된 뒤 문학 평론과 번역에 종사하였다.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았고,
1985년부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해서 논설간사, 편집부위원장, 논설위원 등으로 일했다.
그 후 연합통신(연합뉴스로 개명) 대표이사,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대표,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 <국제언론인협의회> 이사,
<한국신문협회> 감사 등을 역임했다.

김종철 개인은 박정희 정권 때 가장 혹독한 세월을 보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의 기자들이 발표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점으로
방송국의 프로듀서와 아나운서까지 합세한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벌어졌다.
그것은 독재자 박정희와 긴급조치에 정면으로 도전한,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투쟁이었다.
그 운동에 참여했다가 1975년 3월 중순에 강제해직당한 113명 가운데
대다수는 지금 70세를 넘긴 노인이 되었는데,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와 논평, 방송프로그램의 내용 때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정보·수사기관에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투옥될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거의 없었다.
박정희가 물려준 재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실을 사실대로 전하지 못하고, 이름만 언론인일 뿐이지
‘노예’처럼 살던 일상을 벗어나서 유신독재체제의 인권 유린과
민중 수탈을 샅샅이 알릴 수 있게 된 현실이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강제해직을 당해서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나던 때 그는 31세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 다섯 명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처지라서
늘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갑자기 실업자가 된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많은 선배와 동료는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의 가장들이었다.
그들은 6개월 동안 광화문의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서
‘복직과 강제해직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생업을 찾아 나섰다.
어떤 사람은 출판사 직원으로, 또 다른 이는 ‘날품팔이’나 다름없는 번역가로 나섰다.
남대문시장에 옷가게를 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불행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1976년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하던 교수들이 여러 대학에서 강제해직 당했다.
연세대의 성내운, 한양대의 리영희, 서울대의 백낙청 교수 등이었다.
그들은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들이 결성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에 이어 해직교수협의회를 조직했다.
지금 광화문 교보빌딩 뒷골목의 선술집이나 빈대떡집은
박정희가 생존권을 빼앗아 버린 ‘거리의 언론인들’과 해직교수들,
그리고 자유언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 전신) 회원들이 어우러지는 ‘친화의 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당장 집안 살림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나
적은 원고료를 받거나 약소한 수입이 생기면 밤이 새도록 막걸리 잔을 주고받았다.
그 시절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어서 자정이 넘으면 집에 갈 수 없었지만
그들은 흐릿한 불빛 아래서 밤을 지새곤 했다.

박정희는 그들에게 고통과 불행을 준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행복을 안겼다.
박정희는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했지만
그들 대다수는 독재의 가시덤불을 넘어 오늘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자유언론을 지키려다 거리의 기자,
해직 언론인이 된 이후 한 번도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한결 같이 민주언론 쟁취를 위한 길 위에서 함께 싸운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행복’이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2018-10-15 11:09:36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7   stephanos [ 2018-10-15 15:37:45 ] 

젠 영감 !!
여기에서도 편의상 반말한다.


우리는 조선시대 500년과 일제시대와 군사정권 50년의 역사 속에서 민족이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과거에는 지식이 소수의 전유물이어서 함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같은 서울대출신인데
한분은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한넘은 열당이나 중방에 죽치고 앉아 민족의 반역자 노릇한것처럼,,,,

쩝쩝,,,,,,

6   zenilvana [ 2018-10-15 14:37:23 ] 

Stephanos 읽거라!

번쩍인다고 다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무식하다고 해서 다 아는 게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네 놈으로 말하면 애비 덕에 돈을 만지지만
세상엔 자기 힘으로 크게 재산을 일군 사람들이 많어.

네 놈은 그게 아니라, 한국의 보수꼴통의 애비 덕이야!
나와는 다르지.

나는 내 스스로 공부해서 이나마 아는 척을 한다.
배가 아프면 너도 공부를 좀 하려무나.

5   yol0624 [ 2018-10-15 14:07:04 ] 

박정희와 싸워서 민주화가아닌 사회주의를 이루는거였군요..

4   stephanos [ 2018-10-15 13:33:44 ] 

같은 서울대출신인데
한분은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한넘은 열당이나 중방에 죽치고 앉아 민족의 반역자 노릇을 한다.

3   zenilvana [ 2018-10-15 12:53:04 ] 

오죽해야 1960년 4월 19일에 학생혁명이 일어났던고? 수백명이 길거리에서 죽었다. 이 통에 이승만이 망명했고, 뒤이어 윤보선, 허정 그리고 장면 같은 머저리들이 한 것이 뭐냐? 당연히 5-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현재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혼자서 해냈는가? 산업공단의 수십만의 시골처녀와 총각들의 피와 땀으로 시작했고, 나같은 월급쟁이들이 밤과 낮으로 그리고 일요일까지 쉬지 않고 혹사당한 결과다.

이 사람들이 이제 70세 중반에 이르렀더니 그 당시에 지 에미의 젓을 빨던가 아니면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은 존재들이 김일성의 농간에 빠진 전교조의 공산분자들의 획책으로 주사파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지금과 같은 문멍청이 대통령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늙은 꼰대가 뭐 어쩌구 저쩌구 지 한애비들을 보수꼴통이라고 욕지거리를 하는 인간이 바로 stephanos인지 '완전돌개가리'인지 마치 재벌이나 된양 열당에서 뻐기고 있다. 이런 년놈들이 지금 한국의 중견세력이 되어서 또다시 열강들의 틈새에서 공산당의 끈아풀이 되기를 희망하다니......

2 
로그인 해주세요!
전자신문
주간운세
시민권 취득 예상문제
운전면허 예상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