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정희 시리즈(7) 이어 변호인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안동일 변호사가 먼저 물었다.
안동일변호사: 검찰관이 신문할 때처럼 그냥 『네, 네』 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주세요. 궁정동에 도착해서 바로 방에 들어갔습니까?
정: 6시30분에서 40분 사이에 도착해서 잠깐 대기했었습니다.
안변호사: 방에 들어갔을 때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나요?
정: 대화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들어가 인사하고 앉았습니다.
안변호사: 대화 중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습니까?
정: 없습니다.
신호양 변호사: 대화 중 차실장과 김재규 부장 사이에 언성이 높았습니까?
정: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이병용 변호사: 합동수사본부에 몇 번이나 갔지요?
정: 한 번 갔습니다.
이때 검찰관이 『본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문을 삼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이변호사는 『검찰신문의 신빙성에 관한 질문이다』고 응수했다.
이변호사: 그날 김계원 청와대비서실장이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는 것은 높은 어른 앞이라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꾸지람이나 죄책감이 있어선가요?
정: 무언가 초조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변호사: 그 날 저녁 손양이 자리에 들어가니 대통령 각하가 본관이 어디냐고 묻고선 얼마 전 작고한 총무처장관과 본이 같다고 했다는데….
정: 맞습니다.
이변호사: 각하가 총에 맞았을 때 비명소리가 있었나요?
정: 숨소리가 좀 거칠었습니다.
이변호사: 증인은 관상학을 공부한 일이 없지요. 그날 김계원 실장을 처음 보았고 조명도 흐렸지요?
정: 조명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안동일 변호사: 조명이 어두웠나요 밝았나요.
정: 조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대생 패션모델 정혜선은 어린 나이에 비해 의외로 침착하게 진술했다.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증언이었다. 현장에서 넋이 빠져서 허둥대거나 겁 먹었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텐데 상당히 자세히 돌발상황을 설명했다. 오히려 나이가 위이고 유명가수여서 사회경험도 많은 손금자는 진술이 엉성했다. 그런 정혜선이 당시 술자리를 가진 방의 조명 얘기가 나오자 거부반응을 보였다. 실내가 밝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진술이었다. 권력자들이 여자와 술을 희롱하는 관립비밀요정도 시중의 룸살롱처럼 어두컴컴했다는 얘기다. 이어서 가수 손금자가 증인석에 앉았다.
검찰관: 그 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대통령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가요?
손금자: 조금 높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검찰관: 만찬석에 들어간 뒤 대통령 각하께서 총에 맞을 때까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보세요.
손: 처음 들어가니 각하께서 차실장에게 『TV에서 삽교천 행사를 방영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차실장은 『시간이 되면 제가 켜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시계를 봤습니다. 이때 저도 시계를 보았는데 7시10분전쯤이었어요. 삽교천에 대한 말씀이 계속됐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들어와 김부장의 귀에 대고 『과장님이 뵙자는데요』 하자 바로 나갔습니다. 그후에 나갔던 김부장이 언제 들어왔는지 곧 총소리가 났어요.
검찰관: 그때 상호간에 주고받은 얘기는 없었습니까?
손: 『이 버 러 지 같은 놈』이라는 고함소리만 들었습니다.
검찰관: 김재규 피고인이 두 번째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쳤다고 했는데….
손: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설마 했으나 각하 머리에 총을 갖다대는 걸 보고 밖으로 튀어나갔는데 남효주 사무관이 부속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두 여인의 진술은 사건 당일의 현장목격담이었다. 거기에 관립 비밀요정의 풍속도를 전해준 증언이었다. 두 여인은 사건 당일 밤 11시경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박선호는 이들에게 팁을 주어 내보냈다. 다음날 김재규가 국방부에서 헌병과 보안사요원들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중앙정보부는 평소대로 움직였다는 증거다.
다음은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회 공판의 녹음이다.
변호사: 만찬에 참석한 여자 둘을 몇 시에 보냈습니까?
박선호: 제가 11시경에 보냈을 겁니다.
변호사: 11시경에, 그러니까 거사가 있고 난 뒤에 그날 보냈죠? 그날 돈도 주어 보냈죠?
박선호: 네, 완전히 다 계산해서 보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의 술자리여인들에게 주는 화대는 지금 돈으로 쳐서 보통 50만~100만원 선이었고 이름 있는 스타인 경우는 그 두 배를 주었다. 「당대 최고」의 술자리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의 상상보다 꽤 짠 편이었다.
그 이유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공급이 많으니 가격이 비쌀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도 수요와 공급의 시장법칙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중간책이 장충동에 있던 모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김마담은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거물정치인과 접하려는 「화류계 매미(賣美)」들의 대모였다.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가 되기 전 20대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마담으로부터 은밀히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응락했다. 이들은 그런 자리에 갔다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것으로 연예계의 정상에 다가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박선호는 급할 때면 종종 김마담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고 변호사 접견시 털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대통령이 영화나 TV연예프로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려왔다. 다만 유부녀로서 본인이 거절하면 강요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궁정동 연회 차출지시로 영화나 TV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쓰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