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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회] 콤플렉스가 권력욕과 성적사디즘 불러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사적으로는 대단히 불운한 인물이다. 가장 따르던 셋째형 박상희가 대구 10ㆍ1항쟁 당시 미군정 경찰의 총탄에 맞아 죽고, 박정희 본인과 부인도 각각 총에 맞아 죽었다. 부모의 강압에 의한 결혼과 초혼의 실패, 이상적인 두 번째 여성의 가출과 이별 등 불행한 혼인생활, 아들은 한때 마약 중독자였으며 둘째 딸과 큰 딸은 남매의 혈육관계가 끊기고, 후계자로 대통령이 된 장녀 박근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후 당초 ‘원대복귀’의 약속을 팽개치고 정치에 참여하고자 군문을 떠나는 전역식 치사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기를” 기원한다고 했지만, ‘불운’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 다녔고 그의 운명이 되었다. 권력의 화려함 속에는 짙은 고독이 서렸다.

박근혜는 국민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대한 촛불시위와 국회의 탄핵을 받고, 국무위원 간담회 자리에서 “피눈물 난다는 말이 뭔지 알겠다”라는 투의 발언을 하였다.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로 인한 유족들의 ‘피눈물’, 경찰이 물대포로 쏴 죽인 백남기 농민 유족이 흘린 ‘피눈물’, 개성공단 폐쇄로 사업주와 노동자들이 흘렸을 ‘피눈물’,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문화인들의 생계를 빼앗은 영세문화인들의 ‘피눈물’, 그리고 수많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노동자 등 타인의 아픔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위정자였다.

박정희도 그랬다. 그는 집권기간에 수많은 민족ㆍ민주인사들을 처형하거나 고문하고 투옥하여 본인들은 물론 가족에 피눈물을 쏟게 하였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인혁당 관련자 8인 사형, 김대중 납치수장음모와 장준하 암살을 비롯하여 그의 시대에 독재에 저항하여 자결ㆍ분신ㆍ투신ㆍ실종자와 그 가족들의 피눈물은 이루 다 가늠하기 어렵다.

독재자 치고 잔혹하지 않은 인물이 없지만, 박정희 역시 심성이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프랑스에서 납치해다가 청와대 지하 벙커서 잔인하게 죽였다는 설도 나돌았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가난과 유기불안(遺棄不安)의 경험으로부터 단소한 체구, 대구사범 시절의 꼴찌, 식민지 교사의 불안과 불만심리, 일본군으로 출세욕망, 해방 후에는 일본군 출신과 좌익활동에 대한 숨기고 싶었던 전력, 끊임없는 쿠데타 음모욕구, 근대화 열망 등 각종 정신적 트라우마(trauma)로 가득찼다. 이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하여 정치적 잔혹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젊은 여성들을 안가로 불러 성적 사디즘(sadism)으로 배출되었다.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은 병영국가체제였다. 수시로 민간인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다는 데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군인과 예비역 장성들이 국가요직에 앉았다는 것만도 아니다. 중앙정보부, 국군보안사, 경찰과 검찰 그리고 여기에 꿰인 민간 정보원들에 의해 국민은 철저하게 감시받고 통제되었다. 술 마시고 버스안에서 박정희를 욕했다가 체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막걸리 보안법’과 ‘묻지마 반공법’이 상식과 법질서를 파괴시켰다.

학교에서는 박정희의 지시로 만든 <국민교육헌장>이 낭송되고, 직장에서는 그의 작사ㆍ작곡인 <새마을 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퍼졌다. 5ㆍ16 군정기에는 각급 행사장에서 <혁명공약>을 외워야 했다. 이를 암송하지 못하면 공무원들은 승진시험에서, 군인들은 휴가에서 누락되거나 취소되었다.

야당ㆍ사법ㆍ언론ㆍ대학이 사찰의 대상이 되고 ‘불건전가요’라 하여 대중음악을 가위질했으며, 젊은 여성들의 치마길이까지 규제하였다. 긴 세월 동안 신문ㆍ잡지ㆍ방송이 통제된 것은 물론이다.

히틀러의 나치시대에 독일에서는 제대로 된 한 편의 문화 예술작품도 창작되지 못하였듯이, 군사정권 치하의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국민들은 20세기 말 박정희의 충성스러운 신민(臣民) 노릇이 강요되었다.

'반공국시’를 내걸고 집권한 박정희는 안보를 정략으로 이용하여 혁신계 인사들을 좌경으로 몰아 탄압하고, 친일파 후손들을 중용하는가 하면 북한과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였다. 남북화해ㆍ협상론자들은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7ㆍ4선언을 통해 금방 통일을 할 것처럼 국민을 현혹시키고, 이어서 유신쿠데타를 단행하면서, 북한에 가장 먼저 이를 알려주었다.

주한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1972년 10월 30일자 비밀문건(2급-Secret)에 따르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0월 12일 북한 부수상 박성철을 만나서 “남북대화를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시스템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우리 정부는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이 비밀문건은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실무대표인 정진홍이 계엄선포 하루 전인 10월 16일 북쪽 실무대표인 김덕현을 판문점에서 만나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통보했다.”고 보고하였다.

남북 정권이 ‘짜고 친 고스톱’ 이었는지,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김일성을 유일체제로 하는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은 1972년 12월 27일 같은 날 제정공포되었다. 박정희가 반공과 국가안보를 내세우면서 북한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 온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 여전히 박정희를 추앙하는 사람은 많다.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의 자제들이 기념사업회를 비롯하여 학계ㆍ언론계ㆍ법조계ㆍ정계의 중심에서 활동한다. 출생지 경북 구미시에서는 2016년 박정희기념사업 예산 403억을 포함, 최근 7년간 책정된 예산이 1,356억 원에 달하였다. 100주년인 올해에는 이보다 훨씬 늘어나 국민의 혈세를 죽은 사람의 추모에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이 따른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정희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고 떠들고, 대표적 극우논객 조갑제 씨는 “박정희는 루스벨트 미국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 등과 같은 반열에 들어가는 것이 합리적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 10대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고 주장한다.

박근혜의 몰락이 아니었으면 2017년 한국에서는 정부와 어용인사들에 의한 ‘박정희 부활제’가 엄청난 국가예산과 재벌들의 ‘댓가없는’ 협찬에 의해 화려하게 진행될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딸의 ‘효심’이 지나쳐 젯상에 올리려든 국정교과서가 생명력을 잃고, 추진중이던 각종 추모사업이 주춤거리고 있다.

파리의 나폴레옹(보나빠르트) 묘소에는 사후 1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석이 ‘백면(白面)’인 채이다. 그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헌정유린의 쿠데타ㆍ대외침략전쟁 등 부정적인 사례가 너무 많아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 때문이다.

2018-12-04 13:07:28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kangdong [ 2018-12-05 07:04:20 ] 

다음 연재도 기다려 집니다.

1   coyotebush [ 2018-12-04 13:17:38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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