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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회] 구미에서 막내로 출생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현 구미시) 상모리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5남2녀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박정희의 부모는 칠곡군 약목면에서 살다가 1914년경 선산군으로 이사했다. 그래서 박정희만 구미에서 태어나고 형제들은 모두 칠곡군에서 출생하였다. 박성빈이 상모리로 이사한 것은 처가의 묘지를 돌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백씨 집안(박정희 어머니의 집안)의 8마지기의 논을 부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두주불사’하고 ‘호주로 소일’할 만큼 술을 좋아하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이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처형의 위기에 풀렸던 것으로 보아 평범한 농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박성빈은 동학군의 진압 측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박정희의 할아버지 박영규는 지역에서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재력가였으나 아들 대에서 가세가 어렵게 된 것은 박성빈이 술을 좋아하고 한량끼있는 권위주의 사람으로 농삿일에 등한시하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박정희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성장하였다.
어머니는 <사씨남정기>, <장화홍련>, <홍길동전>과 같은 언문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자존심이 강하고 마을에서 독하다는 평을 받을만큼 억척스럽게 농사일을 하고 자식들을 키웠다.

어머니는 양가의 규수로 태어나서 출가 전까지는 고생이라고는 별로 모르고 자랐으나 출가 후에는 계속된 고생 속에서도 우리 7형제를 남 못지 않게 키우시느라 모든 것을 바치셨다. (…) 학교 다니는 나보다 더 고생을 하시는 분이 어머니시다. 시계도 없이 새벽 창살을 보고 일어나서 새벽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다음에 나를 깨우신다. 겨울 추울 때는 세숫대야에 더운 물을(담아) 방안에까지 들고 와서 아직 잠도 덜 깬 나를 세수를 시켜주시고 밥을 먹여 주신다.

어린 박정희는 권위주의적이고 능력이 없는 아버지 보다 자애롭지만 강인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면서 자랐다. 어머니가 막내아들 박정희를 특히 사랑했던 데는 ‘막내’ 이외의 까닭이 있었다.

어머니 백남의는 45세가 되어 이미 아들 넷과 딸 둘을 둔 상태에서 다시 임신을 하였다. 당시 그 나이면 할머니 소리를 들을 연배였다. 남사스럽기도 하고 살림도 어려워서 여러 차례 낙태를 시도하였다.

간장을 한 사발씩 마시기도 했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시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이나 장작더미같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했으며,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지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뱃속의 아이가 한동안 놀지 않았는데, ‘이제 됐구나’ 싶으면 아이가 또 놀아서 버들강아지 뿌리를 달여 마시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방법이 다 실패하자 “아이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말아 아궁이에 던져버려야지”라는 결심을 한 후 아이 지우는 일을 포기했다.

백남의는 출산 후에도 가끔 어린 박정희에게 “네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둘둘 말아 아궁이에 던져버리려 했다”는 말을 무심코 내뱉곤 하였다. 이것이 박정희에게는 심리적인 ‘유기불안’으로 작용하고, 어머니에게는 애처로움과 연민의 정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유독 박정희를 극진한 사랑으로 감싸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낙태 시도 끝에 태어난 박정희는 유난히 왜소하고 자라면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박정희의 성장기는 나라 사정이나 그의 가족사가 어려운 시기였다. 3ㆍ1혁명 후의 국내사정은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총독정치가 날로 혹독했다. 박정희 가족의 실정을 살펴보자.

당시 장남 박동희는 부도를 맞고 만주로 피신하여 가족과 연락이 끊겨 있었다. 둘째 박무희는 무던해서 집안의 농사일을 도맡아 했으나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아마도 무희가 여러 형제 중 가장 효자였을 것이다. 셋째 박상희는 기골이 장대하고 똑똑해서 구미초등학교도 다녔지만, 박정희와의 나이 차이가 11살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에서 경쟁관계는 아니었다.

넷째 박한생은 정신박약의 증세를 보였는데, 16세 무렵 사망했다. 결국 백남의가 사랑을 쏟을 유일한 존재는 박정희였으며, 박정희가 총명한 아이로 판명이 나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어려운 살림 중에도 박정희의 등록금을 한 번도 기한을 넘기지 않고 마련해주곤 했다.

박정희는 파란많은 생애 만큼이나 생장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둘째누나 박재희의 증언이다.

어머니는 젖꼭지가 말라붙어서 정희는 모유 맛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밥물에 곳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 같은 것을 숟가락으로 떠먹였습니다. 그게 우유 대용이었지요. 변비가 생겨 혼이 난 적도 있었어요.(…)

정희가 두 살 때, 아직 기어 다닐 적인데 어머니가 정희를 큰형님(장남 동희의 아내)에게 맡겨 놓고 출타를 하셨어요. 형님은 바느질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정희가 기어 다니다가 문지방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요. 그아래로는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정희는 벌건 화로에 처박혀서 한 바퀴 굴렀어요.

2018-12-06 14:44:05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coyotebush [ 2018-12-06 14:46:05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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