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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회] 식민지 교사양성소 대구사범 입학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1932년 4월 8일 대구사범 4기로 입학하였다.
대구사범학교는 총독부가 국민학교 교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1920년대 중반에 최초로 서울ㆍ평양과 함께 대구에 설립한 세 개의 사범학교 중의 하나였다.

정규 중학교와 달리 사범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이 분리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100명의 합격자 중 51등으로 합격하여 구미면 일대에서 일대 경사로 여겼다. 아버지는 학비 걱정 때문에 전학을 만류했으나 박정희는 시험을 치렀고 별로 좋지 않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대구사범은 지역의 명문으로 아무나 들어가기 쉬운 학교가 아니었다.

박정희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사범 진학을 강행한 가장 큰 배경은 자신감이었다. 성적만 좋다면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입시를 치를 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쩌면 내심 최상위권을 넘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겨우 중위권에 불과했던 입시성적(1백명 중 51등)은 그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고, 입학 이후의 성적부진은 그런 충격을 더욱 가중시켰을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 공부할 즈음(1937년) 당시 대구 인구는 110만 866명이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은 8만 3,512명, 일본인은 7,192명이었다. 대구 주민의 4분의 1 가량이 일본인이었다. 대구는 서울ㆍ평양ㆍ부산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대구사범은 일본에서와 같이 조선어로 말하고 쓰고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930년대 중반기는 아직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조선어가 통용되고 있었지만 이 학교에서는 전면 금지하고 일본어만 쓰도록 하였다. ‘충용스러운’ 교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학생들은 거의 ‘보통’학교의 교사가 되게끔, 일본인 학생들은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도록 훈련되었다. 사범학교는 기숙사, 식사, 수업료가 제공되었기 때문에 입학자격이 매우 엄격했으며 가난하고 시골에서 자랐지만 명석한 조선아동들을 많이 끌어당겼다. 박정희가 그 전형적인 예였다.

그렇지만 조선의 젊은이들이 사범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명석하고 가난하고 시골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사는 조선아동으로 하여금 “정신적, 육체적 훈련과정을 통해 진실하고 충직한 제국의 신민들”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특수한 책임이 있었으므로 일본제국의 장래의 교사로서 사범학교 학생들 역시 “진실하고 충직한 제국의 신민들”임을 증명해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 진학할 때는 일본제국주의가 전승기에 이르고 있었다.
1931년 9월 만보산사건을 일으켜 만주침략을 도발하고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데 이어 3월에는 만주국을 세웠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혈서지원’을 하게 되는 등 그와는 밀접한 관계가 되는 ‘만주국’은 일제가 1932년 3월 1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세운 괴뢰국이다. 일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집정(執政)에 앉힌 다음,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여 만주국을 승인했다. 부의와 관리들은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일본 관동군사령관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만주국 수립으로 이 지역의 한국독립운동가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민족적으로는 1932년 1월 8일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을 암살하려다 체포되고, 4월 29일에는 같은 단원 윤봉길이 상하이에서 일왕 생일과 상하이 점령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사령관 사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을 폭살시켰다. 두 애국단원은 일본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일제는 대륙침략을 앞두고 조선에 사범학교를 세우고 우수한 청년들을 입학시켰다.
‘충직한 제국의 신민’을 양성하는 초등학교 교사를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교사는 가장 안정되고 선호하는 직업이었다. 일제는 교사들을 대우도 잘 해주어서 사범학교의 인기가 높았다.

박정희는 1937년 3월 25일 졸업할 때가지 5년간 대구사범학교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교육비는 무료였으나 식비와 기숙사비는 자부담이었다. 40등 이내에 드는 학생들에게는 매달 70원의 관비를 지급했으나 박정희는 실력이 못 따라 한 번도 관비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식비와 기숙사비의 마련을 위해 고향집으로 가느라 결석하는 날이 많았다. 박정희가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절이다.

박정희가 어린시절과 대구사범 시절에 겪은 가난은 뒷날 그의 경제발전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이해되었다. 실제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고, 또 당시 소수의 친일파와 지주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생활상이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5ㆍ16쿠데타 후인 1963년에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20년간의 군대생활, 그리고 소년 시절에도 본인은 자립에 가까운 생활을 배워왔다.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이 있는 일에서 떠날 수 없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성적은 1학년 때에는 97명 중 60등, 2학년 때에는 83명 중 47등, 3학년 때에는 74명 중 67등, 4학년 때에는 73명 중 73등, 5학년 때에는 70명 중 69등이었다. 초기에는 중급 수준이던 것이 상급학년에 갈수록 바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성적이 이렇게 나빴던 것은 전시체제이긴 했어도 인문교육 위주로 진행되는 사범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이며(…) 가난 등과 같은 환경적 요인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같은 성적은 무엇보다 자부심이 강했던 박정희 자신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생활기록부 공개를 금지했으며, 대구사범 시절을 회상하기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다.

2018-12-08 10:51:16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coyotebush [ 2018-12-08 10:53:32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1   coyotebush [ 2018-12-08 10:52:50 ] 

저자 김삼웅은 전 서울신문 주필이며,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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