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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5회] 만주군관학교 혈서지원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가 안정되고 대우받은 교사직을 던지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생애에 중대한 갈림길이 되고 장차 대한민국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었다. 여러 가지 설이 뒤섞인다.

첫째는 아버지의 강요로 맺어진 아내 김호남과의 불화설이다. 방학 때 귀가해서도 합방을 하지 않아서 부모와 형들로부터 질책을 받으면서도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를 피하기 위해 만주행을 택했다는 주장.

둘째는 머리를 길렀다고 질책하는 장학사와 일본인 교장과 싸운 뒤 더 이상 학교에 근무하기 어려워서 충동적으로 택하게 되었다는 설.

셋째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자 만군장교가 되려고 했다는 주장.

넷째는 대구사범 재학 때나 문경교사 시절에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고 그쪽 분야에 기량을 키웠으며, “긴 칼을 차고 싶다”고 한 술회 등으로 보아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에 가고자 하는, 군인을 선망하는 의지에 따른 선택이었다는 주장.

부인과는 이미 애정관계가 없었던 관계로 굳이 만주에까지 가지 않아도 될 사안이고, 박정희의 문경교사 시절의 사진 중에 장발을 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로 인해 상급자와의 불화설은 설득력이 약하고, 독립운동의 목적이었다는 것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전후 그의 언행으로 보아 군인이 되고자 하는 자의적인 결정이었음에 방점이 찍힌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정점에 이르고 있을 때 박정희는 만군에 지원하여 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가족 특히 민족운동에 참여해온 셋째 형 박상희의 반대가 완강했는데도 그는 듣지 않았다. 박상희는 <동아일보> 선산지국장 등을 지낸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성향의 지역 엘리트였다. 박정희 전기작가 전 청와대 비서관 김종신의 회고.

만주군관학교는 왜 갔는지를 물을 기회가 있었는데 박 대통령의 대답은 단순 명쾌했습니다.

“긴 칼 차고 싶어 갔지.”

만주군관학교에서 1등을 하고 금시계를 받은 것도 모두 일본 육사로 유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어요. 어찌보면 민족의식이니 독립의식이니에 앞서 식민지의 가난한 젊은이로서 당시에는 자신의 직업적 전망을 더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죠.

박정희의 측근 김종신은 “일본육사로 유학을 가기 위해”라는 표현을 썼지만, 당시 일본 육사는 침략전쟁의 기간장교를 육성하는 기관이었다. ‘유학’이라는 용어를 박정희가 사용했다면 변명 또는 미화이고 김종신의 창작이라면 왜곡일 것이다.

박정희의 만군입대와 그 행적과 관련하여 <친일인명사전>의 기록이다.

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했으나 1차 탈락하고, 당시의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기사 전문에는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 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奉公)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를 봉입(封入)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중략)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 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이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군관학교 지원의 동기와 좌절된 사연을 미담으로 소개했다.

기혼자인 데다가 연령 초과로 입학 자격이 문제되었으나 다시 도전하여 결국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만계(滿系:일계(日系) 외 통합분류) 합격자 240명 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자격 제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사자의 강고한 지원 의지와 함께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 교련배속장교로 있다가 전임하여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의 추천, 그리고 대구 출신으로 신경군관학교 교관부에 일시 근무하고 있던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인 강재호 소위(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세칭 봉천군관학교 4기)의 도움이 있었다.

2018-12-16 11:13:56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coyotebush [ 2018-12-16 11:22:38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1   coyotebush [ 2018-12-16 11:22:00 ]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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