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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회] 2ㆍ26사건 장교만나 쿠데타 씨앗 배태
작성자 coyotebush

졸업식은 ‘박정희의 날’ 선포식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했다. 그는 답사에서 일본천황과 만주제국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했다.

관례대로 <선서>도 그의 몫이었다. 박정희가 읽은 <선서>를 들어보자. 혹시 당신에게 그의 목소리 주파수가 남아 있다면, 냉동시켜 버릴 듯한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로 들으면 더 실감이 날 것이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만주군관학교에서 군인 박정희는 장차 고국에서 쿠데타의 주역이 되는 충격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 2ㆍ26사건에 가담했다가 만주군으로 밀려난 일본인 장교 간노 히로시(舘野弘) 소령과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2ㆍ26사건이란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황도파인 노나카 시로(野中四郞) 대위와 청년 장교들이 1,4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상관저와 경시청 등 주요 관청을 습격하여 점거했다. 이들은 내부대신 사이토 마코토, 대장상 다카하시 고레키요, 육군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 등을 살해하고, 국가개조와 군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쿠데타 시도였다.

군 수뇌부는 처음에는 이들의 반란을 허용하는 듯 하다가 일왕의 진압지시와 해군의 강경자세에 떠밀려 결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다. 주모 장교들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지고 하사관과 사병들은 원대복귀시켰다. 간노 히로시는 초급장교라는 이유로 만군으로 추방된 장교였다. 박정희는 간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그 역시 자신을 따르는 박정희를 따뜻이 아꼈다.

박정희가 해방 후 국군장교로서 몇 차례 군부쿠데타를 기도하고 마침내 1961년 5ㆍ16쿠데타에 성공한 것은 간노 히로시의 2ㆍ26사건에서 영향받은 바 적지 않았다. 박정희의 군사쿠테타 발상은 만주군관학교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간노로부터 각별한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지도에는 2ㆍ26사건과 관련된 사건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군관학교에서 황도파 출신의 장교들을 만남으로서 박정희는 처음으로 군사쿠데타를 통한 국가개조라는 눈을 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각은 사관학교 입교를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박정희는 사관학교 재학시절 2ㆍ26사건과 같은 청년장교들의 국가개조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박정희는 군관학교와 사관학교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군관학교와 사관학교의 교육 내용은 거의 동일했다. 교과서도 같은 것을 사용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배운 ‘본방사(本邦史)’의 교과서는 “일본은 신국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이 천황의 나라이며 군대도 천황의 군대라는 내용의 서술로 채워져 있었다.

이밖에도 매일 군인칙유를 외우고 궁성요배를 하는 가운데 천황에 대한 충성을 내면화시키는 것이 군관학교와 사관학교의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만주 타호산에 있는 제6관구 예하 제5단 제3영(營)에 파견되어 2개월간 조장으로 부대실습을 한 뒤 다시 관동군 보병 제30연대 일명 다카다 부대에 파견되어 4개월간 실습을 마쳤다.

2018-12-19 11:56:54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coyotebush [ 2018-12-19 11:57:52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1   coyotebush [ 2018-12-19 11:57:34 ]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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