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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회] ‘팔로군 토벌’ 참여에는 양론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충용스러운 황군’의 장교로서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의 최전선에서 소임을 다하였다. 일각에서는 그가 맞서 상대한 측이 중국공산군이라 하여 박정희의 ‘반공정신’을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당시 팔로군은 일제와 싸운 항일군이었고, 앞서 말한대로 조선청년들도 ‘일제타도’를 목적으로 팔로군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만주시절 일본군 장교시절의 행적과 관련하여서는 자료가 크게 엇갈린다. 국제언론인 문명자는 일본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을 인터뷰한 기록을 남겼다.

박정희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라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박정희가 ‘벚꽃처럼 활짝 폈다가 한순간에 떨어지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는 증언도 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또 다른 기록은 관동군 8단 본부에서 박정희와 같이 근무했던 중국인 고경인의 증언이다.

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걸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대토벌 작전이 있었는데, 8단에서는 2개 대대가 참가했습니다. 박정희는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간 제2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지요. 그러나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은 있으나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만군출신 한국인 신현준의 증언이다.

내가 8단으로 부임해 가보니 박정희는 이미 나보다 한 달 전에 단장 부관으로 와 있었다. 그가 맡은 것은 중요한 직책인 것 같았다. 박은 부관이니까 일선부대에 나가는 일은 없었다. 반면에 나는 중대장이니까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전투를 더러 했다. 8단 시절 나는 일선 지휘관이어서 (밖에 나가 있느라) 그를 자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더러 만나기는 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야무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은 같은 부대원(한국인) 방원철의 증언.

나는 소규모 전투를 포함, 10여 차례(팔로군 토벌)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연대을종 부관으로 있어서 전투 경험이 전혀 없다. 나는(지휘관이다 보니) 중국인 사병들과 어울리면서 중국말도 배웠다. 반면 박정희는(내근을 하다보니) 그럴 기회가 없어서 중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박정희가 관동군 장교시절에 팔로군 토벌전에 참여했느냐의 여부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많았으나 증언ㆍ기록에 따라 차이가 난다. 지금은 당사자들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추적이 어려운 미스테리에 속한다.

박정희의 만주시절 행적을 두고 친일 여부를 논할 경우 구체적인 행위도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겠지만 그가 어디에 소속돼 무슨 일을 했는지도 중요한 요소이다. 즉 일제의 주구노릇을 한 밀정의 경우 그가 독립운동 진영에 구체적으로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밀정으로 활동한 그 자체가 이미 반민족 행위인 셈이다. 물론 일제하 군인의 경우 계급만으로 친일을 가늠하려는 것은 온당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황군’이 되기 위해 제 발로 군관학교를 찾아갔다면 그것은 달리 보아야 할 문제이다.

1945년 8월 일제의 투항은 한ㆍ중 국민과 항일군은 환희와 축복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본군에 복무한 한인이나 친일파들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고 절망의 소식이었다. 박정희는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하고 8월에는 보병 8단 예하 부대와 뒤룬(多倫)으로 진출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0일부터 이동을 개시하여 8월 17일 싱릉에 집결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박정희의 생애에서 이 순간이 가장 참담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충성을 바쳤던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었다.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관동군의 엘리트 장교 박정희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였을까. 일설에 의하면 박정희는 일찌감치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만 마시면 독립군가를 불러댔다고 한다. 그가 정말로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주장에 동의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그에게 해방은 일종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해방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장군을 향한 그의 오랜 꿈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심지어는 당장의 생계조차 막연했다. 촉망받던 젊은 군인이 졸지에 고등실업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박정희는 경천동지의 상황에 직면하고 졸지에 ‘고등실업자’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의 생애로 보아서는 만군ㆍ일군시절이 꼭 ‘저주’의 기간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인맥으로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로당 사건으로 처형 위기에 놓였을 때 그를 구명해 준 사람들이 만군 출신들이고, 5ㆍ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병력을 동원하여 정부 주요 기관을 점거할 때 앞장 선 것도 그들이었다. 박정희가 얻은 것이 또 있었다.

만주국군 안에서 일본인이나 만주인(중국인)과 경쟁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나 팔로군(八路軍) 토벌에 나서, 마침내 박정희는 생존과 출세를 위한 과감한 행동력과 정치적 처세술을 익혀가게 되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니헐리스틱한 심정과 정적(政敵)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 그리고 가혹한 탄압까지도 마다지 않는 군정지배를 일삼았던 ‘독재자’. 그 뿌리는 분명 만주국 군인의 혹독한 체험 속에서 발효되었던 것이다.

2019-01-07 13:09:35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2   coyotebush [ 2019-01-07 13:10:30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1   coyotebush [ 2019-01-07 13:10:09 ]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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