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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1회] 1959년과 1960년 쿠데타 모의
작성자 coyotebush

박정희는 순탄한 군대생활을 하고 진급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남로당 관련 호적의 ‘붉은 줄’은 미국 유학이나 장성진급 심사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그때마다 백선엽과 장도영의 적극적인 노력과 신원보증으로 무난히 해결되었다.

1950년대 초반 군부의 한 축을 형성하면서 박정희가 믿고 추종하면서 ‘정치적 개입주의’를 주도했던 이용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박정희의 쿠데타 추진은 잠시 유보되었다.

대신 자체 역량과 기회를 탐색하던 중 1958년 1월 이승만이 정치적 라이벌인 조봉암을 제거하고자 진보당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1959년 7월 31일 이른바 ‘사법살인’을 통해 그를 처형하였다.

“이에 박 장군(박정희)은 유원식 등과 모의하여 1959년 11월 20일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출되자 포기하였다.”

이는 박정희의 두 번째 쿠데타 음모에 속한다.

뒷날 5ㆍ16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유원식의 회고담이다.

59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한 나는 육군본부에 있는 군사발전국 차장으로 보직명령을 받았다. 군사발전국에서 행정차장을 맡은 나에게는 결재할 서류가 며칠 만에 한 건 정도 생길 뿐 많은 시간이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내가 5ㆍ16군사혁명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나는 박정희 장군과 상의, 거사일을 59년 11월 20일로 잡기로 했으나, 거사일을 앞두고 박정희 장군과 박병권 장군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설이 나돌아 박정희 장군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출되는 바람에 거사일은 다시 12월 24일로 연기됐다가 그나마 여의치 않아 해를 넘기고 말았다.

박정희는 1959년 11월 쿠데타를 기도하던 중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출되면서 이를 포기했다가 1960년 3ㆍ15부정선거가 시작되자 다시 준비하였다.

1960년 3월 20일 육군대학총장 이종찬 장군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군사쿠데타가 요청되니 협조 언질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김종필 중령 등과 모의하여 1960년 5월 8일 쿠데타를 단행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4ㆍ19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중지했지만 정군운동을 통해 써클을 확대시켜 정군운동세력을 쿠데타주체세력으로 전환시켜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창군 이래 한국 군부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및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에 의해 움직여졌다. 노회한 이승만은 군부 안의 평안도파와 함경도파를 분리 통제하였다.

백선엽으로 대표되는 평안도파와 정일권으로 대표되는 함경도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모두 졸업하여 이들과 친밀했다. 예를 들어 좌익 전력을 가진 박정희로서는 “모든 사람을 일단 빨갱이로 의심한다”는 특무대의 김창룡이 무서운 존재일 수 있었으나, 김창룡은 백선엽을 추종하는 평안도파의 일원으로 박정희는 좌익 경력이 문제가 될 때마다 백선엽의 도움으로 구제될 수 있었다.

요컨대 박정희는 승승장구하지도 않았지만, 군부 내 주요 파벌로부터 배척당하지도 않으면서 비교적 순탄한 군대 생활을 영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군부 내 요직인 6관구사령관과 군수사령관과 군수기지사령관을 맡을 정도로 인정받는 장성이었다.

백선엽을 비롯하여 군최고위층을 형성한 만군ㆍ일본육사 출신들이 박정희가 남로당이라는 결정적인 하자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살뜰히 챙겨준 것은 ‘군맥을 통한 동질성’ 때문이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라고 토로할만큼 일제에 충성하면서, 해방 후 같은 길을 걸었던 만군 인맥을 보살폈다.

박정희는 유능한 군인이었다. 거기에다 청렴하기도 하였다. 제국군인 출신으로서 절도가 있었고 다양한 군사지식에 정통하여 따르는 장교도 적지않았다. 조선경비사관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가르쳤던 5기생과, 전투정보과에 근무했던 육사 8기생 중에 그를 추종하는 장교가 많았다.

박정희가 6ㆍ25 직후 김종필을 수장(?)으로 하는 육사 8기생들을 만난 것은 5ㆍ16쿠데타의 운명이었다. 5ㆍ16은 경비사 5기생 일부와 육사 8기생 일부가 주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 드려라.”

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 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2019-01-23 10:19:10
► 이 글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
1   coyotebush [ 2019-01-23 10:20:12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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